희망의 백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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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생활 중간 점검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는 데 더디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과거 없는 현재나 미래는 없는 법,
오늘 이렇게 지난 시간을 되돌아봅니다. 이곳에서 보낸 날이 벌써 9년이 다 되어갑니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고 앞으로도 그만큼의 시간을 살아야 사회로 나갈 수 있습니다. 부끄럽지만 수용생활이
처음이 아닙니다. 여주에서 출소하던 날, 교도소 앞 뻥 뚫린 도로처럼 제 앞날도
그럴 줄 알았지만 우여곡절 끝에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글. 채○○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니 제 주위에는 못난 저를 걱정해주는 사람이 늘 있었습니다.
곁에서 도와주었던 분들을 모두 얘기하려면 밤이 모자랄 정도입니다.
그분들이 있었기에 위태했지만 여태껏 큰 탈 없이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여주교도소를 출소한 저는 운 좋게 벌이가 괜찮은 일을 바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진심으로 원했던 것은 가족과의 관계 회복이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잘못한 게 있어서 적극적으로 다가가기 힘들었고 차일피일 뒤로 미루다 보니 소원한 상태가 계속됐습니다. 일할 때는 일에 몰두하느라 외로운 느낌이 덜 했지만 퇴근하고 인기척 하나 없는 어두운 방에 들어설 때에 훅 들어오는 쓸쓸함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핑계일 뿐이지만 외로움을 덜기 위해 마신 한두 잔의 술은 제 이성을 마비시켰고 결국 또 철창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죽자! 차라리 이 세상에서 없어지는 게 낫다고 여겼습니다. 유치장에 있는 내내 밥도 거의 먹지 않고 어떻게 하면 죽을 수 있을까만 궁리했습니다. 목을 맬까, 굶어볼까, 높은 데서 뛰어내릴까. 여러 생각을 해봤지만 막상 실행에 옮기기는 어려웠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구치소로 옮겨진 후 감시카메라가 있는 독방에 수용되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수용 생활 중에 가장 힘들던 때였는데 다행히 옆에서 신경 써주는 분이 있었습니다. 김OO 계장님, 9년이 지나 얼굴은 흐릿하지만 이름만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저는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정신을 못 차리는 저를 위해 제 처에게 전화해주었습니다. 밥을 잘 먹지 않는다며 구매과에 연락해서 먹을거리는 물론이고 면도기나 내복 같은 생필품도 넣어주었습니다. 기동순찰반 팀장으로 계셨는데 수시로 저를 불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구치소엔 10년 전에 무기형을 선고받고 교도소 생활을 하다가 추가사건으로 송치된 사람이 있는데 삼시 세끼 꼬박 챙겨먹고 좁은 방에서 팔굽혀펴기 같은 운동도 열심히 하면서 살고 있다. 너는 그 사람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이니 희망을 가져라.” 대전교도소로 이송오던 날에는 대기실까지 찾아와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고 시간은 끊임없이 흐르니까 건강하게 잘 살라고 배웅해주었습니다.

이곳의 고충처리반에서 저를 집중해서 관리해 주신 분이 있었는데 김OO 주임님입니다. 이분은 김계장님과는 달리 그냥 제 얘기를 들어주셨습니다. 처음에는 대화 없이 커피만 마셨습니다. 그냥 멀뚱멀뚱 서로 쳐다만 보다가 만나는 횟수가 늘어가면서 한두 가지씩 내 속에 있는 괴로움이나 두려움, 우울함 등을 털어놓았습니다. 김주임님은 당신이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은 바로바로 처리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정신과 진료를 받아보는 건 어떠냐고 권유했습니다. 처음에는 당황스럽고 화도 났는데 ‘죽니 사니 하는 마당에 그깟 정신과 진료쯤이야’라는 마음으로 상담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6개월 동안 약을 먹으면서 치료를 받았는데 효과가 있던 건지 약간의 안정을 찾으면서 자연스럽게 공장으로 출역하게 됐습니다.
남들이 보기엔 그럭저럭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마음 한구석엔 잘못에 대한 죄책감이 절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면회 오지 않는 가족에게 서운함이 들기도 했다가 ‘오죽하면’이라는 미안함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살아 숨 쉬고는 있었지만 의미 없는 하루하루가 답답하기만 했고 계기가 생긴다면 깨끗하게 세상을 떠야겠다는 마음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즈음 법무부에서 성폭력, 가정폭력, 아동학대, 마약사범 등에 대한 재범방지교육을 하기 위해 심리치료센터에서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2016년도에 교육을 받았는데 제 징역살이의 전환점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강제로 받는 것에 거부감이 가득해서 삐딱하게 나가기 일쑤였습니다. 교육하는 시간에도 삐딱하게, 상담하는 시간에도 삐딱하니, 담임 윤O 선생님과 부담임 순O 선생님이 묻는 말에 이죽거리고 툭툭 쏘는 경우가 태반이었습니다. 화가 날 만도 할 텐데 싫은 내색 하나 없었습니다. 선생님들의 인내심 덕분에 차츰 교육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수료식 때에는 우수상까지 받았습니다. 무엇보다도 6개월 동안의 교육은 바닥까지 떨어졌던 제 자존감을 높였고 ‘조금은 열심히 살아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육을 무사히 마친 저는 좋은 기운 가득히 안고 다시 작업장으로 돌아왔습니다. 작업장에는 같이 지내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모르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보통 짝을 지어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저는 15년째 수용생활하고 있던 무기수 종O 아저씨랑 일하게 됐습니다. 무기수인 그는 징역살이 시작이나 다름없는 저를 걱정하고 이렇게 저렇게 살아가면 좋겠다는 조언을 많이 해주었고 구하기 힘든 생활용품도 챙겨주었습니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니 제 주위에는 못난 저를 걱정해주는 사람이 늘 있었습니다. 곁에서 도와주던 분들을 모두 얘기하려면 밤을 새워도 모자랄 정도입니다. 그분들이 있었기에 위태했지만 여태껏 큰 탈 없이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있던 장애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고 암처럼 치료하기 힘든 병에 걸린 사람이 낫는 걸 우리는 기적이라 부릅니다. 저는 감히 지금까지의 제 수용생활을 기적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절대로 혼자서는 무사히 올 수 없었을 긴 시간들, 징역살이가 높고 험한 산을 넘는 것이라면 이제 막 산꼭대기에 오른 거라 말할 수 있습니다. 힘들고 어렵게 올라왔으나 산 아래로 내려가는 것은 조금만 조심하면 어렵지 않게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르막을 오를 때 곁에서 지팡이가 되어주었던 많은 분을 기억하며 이제는 제가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지팡이가 될까 합니다. 또 사회로 돌아갔을 때 구성원으로 잘 녹아들고 제 잘못을 속죄할 방법을 준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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