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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사피엔스의 문해력 블루스
읽고 왜 딴소리야!

한국의 문맹률은 1~2% 수준이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문맹률을 조사한 건 2008년이 마지막인데 당시 조사에서
1.7%가 나왔다.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고학력 지향 사회인 만큼 그 후로 문맹률은 더욱 떨어졌을 것이다.
재미있는 건 실질문맹률이 75%나 된다는 점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수준이다.
실질문맹이란 모르는 글자가 없는데도 문장이나 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걸 뜻한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문해력은 호모사피엔스의 후천적 성취

문해력(文解力)은 호모사피엔스의 가장 중요한 후천적 성취 중 하나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 다른 종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다. 미국 신경심리학자 매리언 울프가 그의 책 <책 읽는 뇌>에서 “인류는 책을 읽도록 태어나지 않았다. 독서는 뇌가 새로운 것을 배워 스스로를 재편성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인류의 기적적 발명이다”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호모사피엔스가 지구 위에 나타난 것은 약 20만 년 전, 문자가 발명된 것은 고작 8000년 전이다. 인류는 문자 없이 살아온 세월이 훨씬 더 긴 존재였다. 그렇다면 문해력의 DNA는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울프는 우리의 유전자 속에 문해력의 유전자가 생겨날 수 있었던 것은 오랜 세월 훈련해온 독서의 힘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울프는 책 읽는 데 훈련된 인간의 뇌가 디지털 시대를 맞아 변하고 있다며 우려하고 있다. 이는 자신의 경험에 기반한 성찰의 결과다.
젊은 시절 자신이 열렬히 사랑했던 헤르만 헤세의 소설 <유리알 유희>를 더는 읽을 수 없었던 것. 어려운 단어, 꼬인 문장, 느려터진 전개를 견디지 못했다. 책을 읽는 동안 울프는 책장을 빠른 속도로 앞뒤로 뒤적이면서 같은 문장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댔다. 뇌가 문장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이야기의 심층을 살피는 데 필요한 ‘인지적 참을성’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수천 년간 진화해온 ‘읽는 뇌’가 퇴보한 이유에 대해 울프는 디지털 정보 소비에 중독된 탓이라고 분석했다. 최고의 독서학자도 이러할진대 140자 트위터에 익숙해진 인간의 뇌는 머지않아 문해력의 힘을 망각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인공지능(AI)과 경쟁할 유일한 힘, 문해력

문해력의 위기, 즉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점점 저하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는 다른 곳에서도 찾을 수 있다. 빅데이터와 인공지능(AI) 기술이 급부상하고 과학(Science), 기술(Technology), 공학(Engineering), 수학(Mathematics)의 융합 학문인 스템(STEM)이 차세대 교육으로 떠오른 마당에 웬 문해력 타령인가 생각할 수 있지만, 문해력이야말로 인간이 AI와 경쟁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로 꼽힌다. AI가 갖추지 못한 능력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뇌와 달라서 AI는 통계와 확률에 기반한 계산기 같은 존재다. 평균치는 그 누구보다 빨리 도출할 수 있지만, 정작 평균의 의미는 모른다는 치명적 한계를 안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두렵다. 체스나 장기에서는 이미 인간의 지력을 뛰어넘은 능력자이기 때문이다. 대학 입시도 AI와 경쟁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일본에서는 그 가능성을 실제로 실험해 화제가 된 사람이 있다. 일본 국립정보학연구소 아라이 노리코 교수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2011년부터 ‘도로보 군’이라고 이름 지은 AI를 자식처럼 키우면서 도쿄대학교에 합격시키는 것을 목표로 도전해온 수학자다. 100여 명에 이르는 과학자의 지원을 받아 2021년 도쿄대 입학을 목표로 도로보 군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여느 수험생처럼 출제경향과 문제유형을 분석하고 모의고사를 치르며 문제해결 능력을 높여갔다.
7년을 공들인 보람이 있어, 도로보 군은 전체 수험생의 상위 20%에 해당하는 우등생으로 성장해 웬만한 대학은 입학할 수 있는 성적을 얻었다. 그러나 목표한 도쿄대에 가기에는 2% 부족한 점이 있었다. 도쿄대 입학 프로젝트를 추진한 연구팀은 결국 4수 만에 도전을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현재의 기술로는 도로보 군이 도쿄대에 합격할 가망성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연구팀이 AI 도로보군의 한계로 꼽은 것은 무엇일까.
“AI는 교과서에 적힌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맥락을 파악해서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입력된 데이터를 활용해서 통계적으로 답을 도출한다. AI의 약점은 1만 개를 가르쳐야 간신히 하나를 아는 것, 응용력이나 유연성이 없는 것, 정해진 프레임 속에서만 계산 처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AI는 독해력을 기반으로 한 커뮤니케이션 능력과 이해력이 없다. AI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필요한 능력도 바로 이것이 될 것이다.”
아라이 교수가 말하는 ‘독해력을 기반으로 한 커뮤니케이션 능력과 이해력’, 이것이 바로 문해력이다. 그는 AI와 경쟁하며 살아가야 하는 인간에게 필요한 능력으로 이것을 꼽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한 가지 더 있다. 아라이 교수는 인간이 AI보다 문해력이 뛰어나니 안심해도 된다고 결론 내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인간이 문해력을 갖추지 못할 경우 AI와 경쟁하며 살아야 할 미래의 아이들은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없다고 경고한다. 아라이 교수가 미래를 암울하게 예언하는 이유는 현재의 교육방식 때문이다. AI와 ‘마찬가지로’ 단순암기와 계산에 의존하는 공부 방식을 우려한다. 이런 공부 방식을 극복하지 못할 경우 머지않아 AI와 마찬가지로 간단한 문장의 인과관계조차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문해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경고한다.

왜 제대로 읽고 딴소리일까, 실질문맹의 나라

우리나라는 다를까. 문맹률이 1~2%로 전 세계에서 가장 낮은 나라로 손꼽히는 나라. ‘읽기쯤은 식은 죽 먹기’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문제는 ‘오빠라고 읽으면서 언니라고 부르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읽고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실질문맹’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실질적인 문맹이라는 뜻으로 문해력, 즉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을 기준으로 삼는다. 한국교육개발원의 자료에 따르면 문해 측정 영역은 산문 문해, 문서 문해, 수량 문해로 나뉘는데 여기서는 우선 논설이나 기사, 시, 소설 등의 텍스트 정보를 이해하고 사용하는 데 필요한 산문 문해를 중심으로 이야기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문맹률이 가장 낮은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이 ‘실질문맹률’에서 꼴찌다.
실질문맹 검사는 약봉지에 쓰인 설명을 읽고, 투약 시기나 투약량 등을 맞추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정보는 생존에 필요하기 때문에 딱히 길거나 전문적이지도 않고, 비유나 상징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실질문맹들은, 모르는 단어 없이 다 읽고도 의미를 독해하는 데 실패하여 틀린다.
문해력은 글을 안 읽을수록 떨어지고, 시기를 놓치면 어느 수준 이상 올라가지 않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독서 경험이 빈곤했던 중장년층에서 실질문맹이 가장 많지만 최근에는 10대 학생들의 비율도 눈에 띄게 높아지고 있다. 문해력 부재는 인터넷상에서도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잘 벼린 칼 같은 논리와 찰떡같은 비유로 읽는 것만으로도 황홀해지는 글 아래에 달린 댓글들이 그렇다. 글의 맥락을 무시한 채 몇 개 어휘에 매달려 서로 옥신각신하는 댓글들을 보면 씁쓸해진다.
높은 실질문맹률의 원인으로 부실한 교육과정, 열악한 노동환경이나 과다한 학습시간 등이 지목된다. 책을 읽기에는 너무나 ‘저녁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 데다 읽고 쓰는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경제적·시간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만 열심히 읽는 것은 아니니, 구조적인 문제로만 접근할 수도 없다. 어떤 삶이든 시간이 충분한 사람은 없고, 안 읽는 사람은 어떤 조건에서도 안 읽으니까. 어려운 글들을 기피하고 인터넷의 세 줄 요약 정보에 만족하는 동안 어딘가에서는 수천, 수만 페이지의 전문적 글들이 쏟아지고 있다. 이런 방대한 정보가 특정 소수만이 독점하는 정보로 남게 된다고 생각하면 정신이 번쩍 든다. 디지털 시대에도 ‘힘 있는 사람들’은 문해력을 바탕으로 그 힘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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