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고난이 들이닥쳐도 지금 이 순간을 지켜내는 일은 고귀한 노력이 아닐 수 없어요.
드로잉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첫 책에 들어갈 삽화를 직접 그리기로 했거든요. 선으로 쓱쓱 그려진 드로잉들을 보며 이 정도는 나도 그릴 수 있겠지!
일하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옛날에 미대 가라 소리도 들은 적 있으니 한번 그려보지 뭐. 예술 에세이 책이라서 모든 내용이 그림 이야기였어요.
먼저 그릴 수 있겠다 싶은 걸 정했습니다. 마티스의 원무, 국립현대미술관 앞 노래하는 사람, 김환기의 점묘화 등 의미 있고 쉬운 이미지로 골랐죠.
로트링 펜과 붓펜, 목탄 등 도구도 준비했습니다. 자, 이제 그리기만 하면 돼!
일하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옛날에 미대 가라 소리도 들은 적 있으니 한번 그려보지 뭐. 예술 에세이 책이라서 모든 내용이 그림 이야기였어요.
먼저 그릴 수 있겠다 싶은 걸 정했습니다. 마티스의 원무, 국립현대미술관 앞 노래하는 사람, 김환기의 점묘화 등 의미 있고 쉬운 이미지로 골랐죠.
로트링 펜과 붓펜, 목탄 등 도구도 준비했습니다. 자, 이제 그리기만 하면 돼!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직선을 긋는데 삐뚜름하고, 원을 그리는데 찌그러집니다. 마음이 삐딱한 건지 손 그림엔 꽝인 건지 헛웃음이 나왔어요. 분명히 옛날에 그림 잘 그린다 소리 좀 들었는데 말이죠. 선명한 사진을 놓고 그대로 보고 그리는데도 선은 제멋대로 삐뚤빼뚤, 원근도 엉망입니다. 그래요. 세월은 재능을 그냥 두지 않습니다. 오직 노력하는 재능만을 인정해주죠. 그렇게 첫 책은 그림 없는 그림 이야기 책이 되었습니다. 다행히 그게 특색이 되어 그림을 검색해보는 재미가 있었다고 위로들을 해주셨죠.
얼마 전 놀라운 드로잉 전시를 보았습니다. 안충기 작가의 <비행산수>展. 바늘보다 가는 펜촉으로 일일이 그려낸 펜화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림이 예술 이전에 순전한 노동과 헌신의 결과라는 것이죠. 상상할 수 없는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은 흔적이 역력했어요.
비행산수란 하늘에서 본 국토입니다.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찍고 평양까지 비행기를 타고 내려다본 도시 풍경. 처음엔 까마득하다가 자세히 내려다보니 온갖 것들이 다 들어 있어요. 보통 한 도시를 그리는 데 6개월, 메인 작품인 <서울 강북 전도>는 무려 4년 반이나 걸렸다고 합니다. 와, 불광불급이라 했던가요. 큰 칼 옆에 차고 위풍당당한 이순신 장군님, 빼곡한 빌딩 숲들, 고궁들을 둘러친 산들은 둘째 치고 막히기 시작하는 강변북로, 길 위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까지. 그림 안에 이야기가 한가득입니다. 과거로부터 이어져 현재를 살며 미래로 날아갈 우리의 시공간이 고스란합니다. 그림이지만 기록이고 삶이자 역사와 다름없었죠.
안충기 작가는 12년 동안 그려왔다고 합니다. 그 얇디얇은 펜으로 풍경을, 도시를 그리고 또 그렸겠지요. 눈은 충혈되고 손목은 시큰거렸겠죠. 그런데도 굳세게 계속 그렸을 거예요. 참으로 집요한 마음과 질기디질긴 엉덩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작가는 ‘날마다 한 획이라도 긋고 한 줄이라도 쓰자’를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고 해요. 엄지와 중지에는 두꺼운 굳은살이 박혀 있고요. 정말 지독한 노력가입니다.
몹시 부끄러워집니다. 오래된 깃털 같은 재능으로 드로잉을 할 수 있다 여긴 건 교만이었죠. 물론 더러 세상이 노력보다 운 같고, 깊은 내공보다 얕은 재능들이 횡행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래 두고 보면 다 드러납니다. 길게 내다보면 더 알게 됩니다. 안 되는 일에 포기는 빨라서 드로잉은 접었지만 예술적 순간을 기록하는 일은 계속 노력해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구슬 꿰듯 살아갑니다. 똑같은 날들이어도 삶에 정성을 들이지 않은 날은 없지요. 우리 교정인들도 마스크를 한 채 각자의 자리를 지켜가고 있습니다. 어떤 고난이 들이닥쳐도 지금 이 순간을 지켜내는 일은 고귀한 노력이 아닐 수 없어요. 삶은 이렇듯 작은 노력들이 모여 만드는 아름다운 드로잉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