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이 저에게는 봄날처럼 따뜻했습니다. 섬유유연제를 넣어 돌린 빨래에서는
봄꽃향기가 났고 어머니의 웃음소리도 그날따라 유난히 크고 유쾌했습니다.
봄꽃향기가 났고 어머니의 웃음소리도 그날따라 유난히 크고 유쾌했습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의 면면은 다양할 겁니다. 기결되어 모든 걸 내려놓은 채 마음 편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미결이어서 아직 끝나지 않은 재판 신경 쓰랴, 가족들 걱정에 한숨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실수를 여러 번 해서 교도소가 익숙한 이들도 있을 테고 처음이라 이곳의 분위기가 낯설고 속없이 장난치고 웃는 수용자들을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인생이 끝났다고 여겨 극단적인 생각을 하는 이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꼭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인생은 끝나지 않았고 봄날은 아직 오지도 않았습니다. 당신의 봄날은 언제나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올 테니 힘내시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곳이 담장 안이든 담장 밖이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우울해 하지 말고 고개를 들어 주변을 돌아보세요. 모두가 우리를 걱정해 주시는 분들입니다. 계장님도, 주임님도 우리가 무사히 출소할 수 있도록 애를 쓰고 있고 바깥에서는 우리의 소중한 사람들이 무사히 품으로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혹독한 겨울 같은 날은 언젠간 지나갈 것이고 봄날은 올 것입니다. 우리에게 찾아온 봄날을 신경질적이고 날카로운 마음으로 떠나보내지 않기를 바랍니다. 봄날이 찾아온 줄도 모른 채 추운마음으로 살아가지도 맙시다. 돌아보면 저에게도 봄날의 따뜻했던 기억이 있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는데 늘 고단했던 저는 휴일이면 늦잠을 잤습니다. 어머니는 작은 미용실을 운영했는데 바쁜 와중에도 늘 저의 아침밥을 챙기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자식 굶기지 않고 키우겠다고 애를 많이 쓰셨습니다. 그날도 저는 늦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손님이 없는 틈을 타 미용실 옆에 붙어있는 텃밭으로 일하러 가신다며 잠에 취한 저에게 세탁기에 빨래를 돌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한 다음 날이라 정말로 간절하게 늦잠을 자고 싶었습니다. 하지않고 버틸까 하다가 밭일 하고 오시면 피곤할 어머니를 생각하며 몸을 움직였습니다. 세탁기가 빨래를 해주기는 했지만 마지막 탈수 전에 섬유유연제를 넣어야 했던지라 귀찮음이 가득한 마음이었습니다. 당시 우리집 세탁기는 저보다 나이가 많은 일명 ‘통돌이’였습니다. 통돌이가 낡은 소리를 내며 마지막 탈수를 마치고 ‘삐삐삐’ 소리를 내었습니다. 그때도 키가 작아서 빨래를 꺼낼 때면 통돌이에 매달리다시피 했습니다. 대야에 빨래를 담아 텃밭쪽으로 갔습니다. 미용실에 딸린 집이다 보니 빨래를 말리려면 무조건 건조대를 들고 바깥으로 나가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여전히 텃밭에서 밭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늦잠을 자지 못한 저는 입이 나올 대로 나와 있었지요. 고추모종을 심고 계시는 어머니에게 시위라도 하듯 일부러 귀찮은 티를 팍팍 내며 빨래를 널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짐짓 모른 채 하셨지만 저는 뭔가 불만을 터트리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때 발 아래에 갈색의 길고 긴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처음에 돌인 줄 알고 걷어차려 했는데 자세히 보니 ‘개똥’이었습니다. 저는 이때다 싶어 어머니를 향해 소리를 질렀습니다.
“엄마, 어떤 개XX가 똥을 싸 놓았어요!” 어머니는 아직도 미용실 손님들과 그때의 이야기를 하면서 웃는다고 하십니다. 얼굴에는 귀찮음에 가득해서 뚱해 있던 아이가 하기 싫다고 짜증을 내는 것이 아니라 개똥 때문에 짜증을 내며 소리치는 상황이 너무 우스웠다고 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이 저에게는 봄날처럼 따뜻했습니다. 섬유유연제를 넣어 돌린 빨래에서는 봄꽃향기가 났고 어머니의 웃음소리도 그날따라 유난히 크고 유쾌했습니다.
스무 살 무렵부터 6년 가까이 어머니의 연락을 무시하고 살았습니다. 그때에도 미용실 손님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며 겉으로는 웃고 계셨을 테지만 마음속으로는 소식을 끊은 딸로 인해 얼마나 마음고생을 하셨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아픕니다. 어느덧 스물여덟 살이 된 저는 7개월 후면 어머니 곁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항소 선고 전, 어머니께서는 제가 몇 개월을 받든지 죗값을 다 치룰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어머니 곁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바쁘시다는 어머니를 졸라 봄나들이도 하고 싶습니다. 어머니! 처음 잡혀 왔을 때 어머니께서 ‘많이 무서웠제?’라고 하셨던 말씀에 이제 대답할 수 있습니다. 네,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이젠 무섭지 않습니다. 어머니께서 기다리고 있으니 저는 잘 생활할 수 있어요.
저는 다시 태어나기 위해 여기 있습니다. 저를 키워주시고 허물많은 딸을 포기하지 않으신 부모님을 위해 여기 있습니다. 저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다림에 보답하기 위해 여기 있습니다. 나가서 ‘기다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라고 말하기 위해 여기 있습니다. 나가서 더 잘하기 위해 여기 있습니다. 죗값을 치르고 다시 일어설 준비를 하기 위해 여기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인생이 끝났다고 여겨 극단적인 생각을 하는 이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꼭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인생은 끝나지 않았고 봄날은 아직 오지도 않았습니다. 당신의 봄날은 언제나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올 테니 힘내시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곳이 담장 안이든 담장 밖이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우울해 하지 말고 고개를 들어 주변을 돌아보세요. 모두가 우리를 걱정해 주시는 분들입니다. 계장님도, 주임님도 우리가 무사히 출소할 수 있도록 애를 쓰고 있고 바깥에서는 우리의 소중한 사람들이 무사히 품으로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혹독한 겨울 같은 날은 언젠간 지나갈 것이고 봄날은 올 것입니다. 우리에게 찾아온 봄날을 신경질적이고 날카로운 마음으로 떠나보내지 않기를 바랍니다. 봄날이 찾아온 줄도 모른 채 추운마음으로 살아가지도 맙시다. 돌아보면 저에게도 봄날의 따뜻했던 기억이 있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는데 늘 고단했던 저는 휴일이면 늦잠을 잤습니다. 어머니는 작은 미용실을 운영했는데 바쁜 와중에도 늘 저의 아침밥을 챙기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자식 굶기지 않고 키우겠다고 애를 많이 쓰셨습니다. 그날도 저는 늦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손님이 없는 틈을 타 미용실 옆에 붙어있는 텃밭으로 일하러 가신다며 잠에 취한 저에게 세탁기에 빨래를 돌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한 다음 날이라 정말로 간절하게 늦잠을 자고 싶었습니다. 하지않고 버틸까 하다가 밭일 하고 오시면 피곤할 어머니를 생각하며 몸을 움직였습니다. 세탁기가 빨래를 해주기는 했지만 마지막 탈수 전에 섬유유연제를 넣어야 했던지라 귀찮음이 가득한 마음이었습니다. 당시 우리집 세탁기는 저보다 나이가 많은 일명 ‘통돌이’였습니다. 통돌이가 낡은 소리를 내며 마지막 탈수를 마치고 ‘삐삐삐’ 소리를 내었습니다. 그때도 키가 작아서 빨래를 꺼낼 때면 통돌이에 매달리다시피 했습니다. 대야에 빨래를 담아 텃밭쪽으로 갔습니다. 미용실에 딸린 집이다 보니 빨래를 말리려면 무조건 건조대를 들고 바깥으로 나가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여전히 텃밭에서 밭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늦잠을 자지 못한 저는 입이 나올 대로 나와 있었지요. 고추모종을 심고 계시는 어머니에게 시위라도 하듯 일부러 귀찮은 티를 팍팍 내며 빨래를 널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짐짓 모른 채 하셨지만 저는 뭔가 불만을 터트리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때 발 아래에 갈색의 길고 긴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처음에 돌인 줄 알고 걷어차려 했는데 자세히 보니 ‘개똥’이었습니다. 저는 이때다 싶어 어머니를 향해 소리를 질렀습니다.
“엄마, 어떤 개XX가 똥을 싸 놓았어요!” 어머니는 아직도 미용실 손님들과 그때의 이야기를 하면서 웃는다고 하십니다. 얼굴에는 귀찮음에 가득해서 뚱해 있던 아이가 하기 싫다고 짜증을 내는 것이 아니라 개똥 때문에 짜증을 내며 소리치는 상황이 너무 우스웠다고 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이 저에게는 봄날처럼 따뜻했습니다. 섬유유연제를 넣어 돌린 빨래에서는 봄꽃향기가 났고 어머니의 웃음소리도 그날따라 유난히 크고 유쾌했습니다.
스무 살 무렵부터 6년 가까이 어머니의 연락을 무시하고 살았습니다. 그때에도 미용실 손님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며 겉으로는 웃고 계셨을 테지만 마음속으로는 소식을 끊은 딸로 인해 얼마나 마음고생을 하셨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아픕니다. 어느덧 스물여덟 살이 된 저는 7개월 후면 어머니 곁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항소 선고 전, 어머니께서는 제가 몇 개월을 받든지 죗값을 다 치룰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어머니 곁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바쁘시다는 어머니를 졸라 봄나들이도 하고 싶습니다. 어머니! 처음 잡혀 왔을 때 어머니께서 ‘많이 무서웠제?’라고 하셨던 말씀에 이제 대답할 수 있습니다. 네,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이젠 무섭지 않습니다. 어머니께서 기다리고 있으니 저는 잘 생활할 수 있어요.
저는 다시 태어나기 위해 여기 있습니다. 저를 키워주시고 허물많은 딸을 포기하지 않으신 부모님을 위해 여기 있습니다. 저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다림에 보답하기 위해 여기 있습니다. 나가서 ‘기다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라고 말하기 위해 여기 있습니다. 나가서 더 잘하기 위해 여기 있습니다. 죗값을 치르고 다시 일어설 준비를 하기 위해 여기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