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진 작 <Birds 2015>
차를 마신다. 차를 마시는 가만한 마음이 좋다. 물이 차가 되는 시간이 좋다. 물이 보글보글 끓어오르면 팽주(차 우리는 사람)는 능숙한 솜씨로 차를 우린다. 보기 좋은 널따란 차판에 차구들이 조로록, 어른들의 소꿉 같기도 하다. 한 손에 딱 쥐어지는 귀티 나는 자사호, 한 번에 호록 마시기 좋은 작은 잔. 향과 맛이 날아가기 전에 마시라고 그렇다 한다. 보이차의 유래와 과정, 역사를 드문드문 들으며 차를 마신다. 보이차는 계속 변한다고 한다. 맛과 향이 계속 변화를 겪으며 안정기가 될 때까지는 생장한다는 것. 그러므로 맛없는 보이차라고 제쳐두지 말고 보관을 잘해두면 내 영혼을 적시는 근사한 차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후발효라고 했다. 세월이라고 했다. 차를 진짜 차로 만들고 나를 진짜 나로 만드는 것은. 처음의 거칠고 떨떠름한 맛이 세월과 함께 깊어지고 농익어가듯 우리의 삶도 그리되길 바란다. 둥글고 순한 차처럼 살게 되기를 바란다.
마음이 순하고 다정해지는 차가 좋을 뿐 나는 차에 대해선 문외한이다. 그런데 이 시간이 참으로 대단하다. 차를 마시는 것 외에 별 것 없는 이 시간이, 삶의 속도로 치자면 거의 멈춰있는 이 시간이 엄청난 힘을 응축하고 있다. 정중동, 가만한 가운데 에너지가 솟아오른다. 생각 중심에 창의가 똬리를 튼다.
이토록 향그러운 차를 우리는 사람은 최영진 사진작가다. 그를 처음 본 것은 10년 전쯤이다. 그때도 그의 시선은 멀고 넓은 곳을 향하고 있었고 작고 세심한 것도 놓치지 않았다. 하늘이거나 바다거나 큰 세계를 담으면서도 그 안의 작은 생명 하나에 더욱 천착했다. 사진에서 이야기가 들렸고 이야기에서 삶이 보였다. 그의 사진은 모든 걸 껴안고 있다. 새만금의 죽어가는 새마저 그저 자연의 일부인 양 무심하게 찍었는데 그 처연한 평온함이 가슴을 파고든다. 누군가 죽어 나가도 노을은 아름답고 우리는 자기 앞의 생을 살아내야 한다.
“나는 잘 몰라요.” 그는 입버릇처럼 말한다. 사진에 대해 물어도, 차에 대해 물어도 느릿하고 빙그르르한 웃음으로 머리를 긁적 한다. 하지만 그만큼 지혜롭고 사유 깊은 작가를 본 일이 없다. 차에 대해서도 많이 마셔온 만큼 꼭 그만큼 이야기해주고 또 나도 잘 몰라요 시치미를 뗀다. 그 마음을 알 것 같다. 우리는 잘 모른다. 몰라서 살펴보고 들여다보고 느끼고 생각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의 삶은 창의 된다. 아주 작은 생각의 발현, 그 생각의 차이에서 생이 창의되는 것이다.
그의 이번 전시는 하늘 가득 솟구치는 새들이다. 머리 위를 새까맣게 덮었을 새들을 고스란히 프레임 안으로 날게 했다. 그들은 자유롭다. 뜨겁다. 퍼덕이는 비상도 까마득한 추락도 그 안에 있을 것이다. 이 장관을 담으려고 오래오래 기다리고 끈질기게 인내했을 그는 무엇을 담고 싶었던 것일까. 작품의 의미를 묻지 않았다.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오롯이 향유하는 사람의 몫이다.
새들의 소요와 차의 고요 속에서 다시 생을 마신다. 역동하는 맑은 기운이 훅 끼친다. 이런 순간이야말로 삶이 예술이 되는 시간이다. 우리는 거창하고 멋있는 순간을 쫓으며 살아간다. 화려하고 근사한 일상을 동경하기도 한다. 하지만 삶은 새들의 날갯짓처럼 고단하고 어려운 일투성이라 멋진 순간이란 것은 허허롭고 요원한 일이다. 그저 차 한 잔을 마시는 시간, 나를 잠시 멈추고 들여다보는 시간, 이런 가만한 시간이 진짜 나를 만드는 시간이고 근사한 순간이다. 바로 창의의 시간이다.
마음이 순하고 다정해지는 차가 좋을 뿐 나는 차에 대해선 문외한이다. 그런데 이 시간이 참으로 대단하다. 차를 마시는 것 외에 별 것 없는 이 시간이, 삶의 속도로 치자면 거의 멈춰있는 이 시간이 엄청난 힘을 응축하고 있다. 정중동, 가만한 가운데 에너지가 솟아오른다. 생각 중심에 창의가 똬리를 튼다.
이토록 향그러운 차를 우리는 사람은 최영진 사진작가다. 그를 처음 본 것은 10년 전쯤이다. 그때도 그의 시선은 멀고 넓은 곳을 향하고 있었고 작고 세심한 것도 놓치지 않았다. 하늘이거나 바다거나 큰 세계를 담으면서도 그 안의 작은 생명 하나에 더욱 천착했다. 사진에서 이야기가 들렸고 이야기에서 삶이 보였다. 그의 사진은 모든 걸 껴안고 있다. 새만금의 죽어가는 새마저 그저 자연의 일부인 양 무심하게 찍었는데 그 처연한 평온함이 가슴을 파고든다. 누군가 죽어 나가도 노을은 아름답고 우리는 자기 앞의 생을 살아내야 한다.
“나는 잘 몰라요.” 그는 입버릇처럼 말한다. 사진에 대해 물어도, 차에 대해 물어도 느릿하고 빙그르르한 웃음으로 머리를 긁적 한다. 하지만 그만큼 지혜롭고 사유 깊은 작가를 본 일이 없다. 차에 대해서도 많이 마셔온 만큼 꼭 그만큼 이야기해주고 또 나도 잘 몰라요 시치미를 뗀다. 그 마음을 알 것 같다. 우리는 잘 모른다. 몰라서 살펴보고 들여다보고 느끼고 생각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의 삶은 창의 된다. 아주 작은 생각의 발현, 그 생각의 차이에서 생이 창의되는 것이다.
그의 이번 전시는 하늘 가득 솟구치는 새들이다. 머리 위를 새까맣게 덮었을 새들을 고스란히 프레임 안으로 날게 했다. 그들은 자유롭다. 뜨겁다. 퍼덕이는 비상도 까마득한 추락도 그 안에 있을 것이다. 이 장관을 담으려고 오래오래 기다리고 끈질기게 인내했을 그는 무엇을 담고 싶었던 것일까. 작품의 의미를 묻지 않았다.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오롯이 향유하는 사람의 몫이다.
새들의 소요와 차의 고요 속에서 다시 생을 마신다. 역동하는 맑은 기운이 훅 끼친다. 이런 순간이야말로 삶이 예술이 되는 시간이다. 우리는 거창하고 멋있는 순간을 쫓으며 살아간다. 화려하고 근사한 일상을 동경하기도 한다. 하지만 삶은 새들의 날갯짓처럼 고단하고 어려운 일투성이라 멋진 순간이란 것은 허허롭고 요원한 일이다. 그저 차 한 잔을 마시는 시간, 나를 잠시 멈추고 들여다보는 시간, 이런 가만한 시간이 진짜 나를 만드는 시간이고 근사한 순간이다. 바로 창의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