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떠올리는 유일한 순간이 있다. 행복했던 만선의 기억 속에서
엄마는 항상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손을 흔들고 있다.
엄마는 항상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손을 흔들고 있다.
어느덧 내 나이 39세, 초등학교 2학년 때 일이다. 우리 가족은 아빠, 엄마, 오빠, 나 이렇게 네 식구였다. 그러나 행복했던 기억은 까마득하다. 나는 늘 불행했다고 생각한다. 부모님은 어업을 하셨다. 새벽 3시가 되면 조업을 하기 위해서 바다로 나가셨다. 그리고 나가시기 전에는 늘 하시는 일이 있었다. 따르릉 시계를 7시에 맞춰 두고 시계 밑에 용돈을 놓아두고 새벽바람을 맞으며 조업을 나가신다. 조업에는 엄마도 늘 함께 가셨다. 남자의 몸으로도 힘든 뱃일이었지만 엄마는 하루도 빼먹지 않고 배를 타셨다. 난 그 어린 나이에도 학교를 마치면 바삐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고된 뱃일을 마치고 지쳐 돌아오는 부모님을 위해 조금이나마 힘겨움을 덜어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빠는 하루도 빠짐없이 엄마를 때렸다. 이유도 없이 그냥 무차별적으로 폭력을 휘둘렀다. 엄마는 아빠의 장난감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엄마처럼 그렇게 모질게 맞은 사람이 있을까 싶다. 아직도 잊지 못하는 것은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집에 돌아와서 본 광경이다. 엄마는 두들겨 맞아 온몸이 피투성이였고 집안 살림살이도 다 박살이 나서 난장판이었다. 그런 엄마가 너무 불쌍했다. 그래서 엄마가 조업을 마치고 돌아오면 조금이나마 엄마의 일을 덜어주고 싶었다. 어린 마음에도 엄마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연탄불부터 확인했다. 추운 바닷가에서 고생한 부모님이 집에 돌아와서도 차디찬 바닥의 냉기에 떨까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연탄불을 꺼트리지 않는 것이 나에게는 무척 중요한 일과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엄마처럼 그렇게 모질게 맞은 사람이 있을까 싶다. 아직도 잊지 못하는 것은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집에 돌아와서 본 광경이다. 엄마는 두들겨 맞아 온몸이 피투성이였고 집안 살림살이도 다 박살이 나서 난장판이었다. 그런 엄마가 너무 불쌍했다. 그래서 엄마가 조업을 마치고 돌아오면 조금이나마 엄마의 일을 덜어주고 싶었다. 어린 마음에도 엄마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연탄불부터 확인했다. 추운 바닷가에서 고생한 부모님이 집에 돌아와서도 차디찬 바닥의 냉기에 떨까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연탄불을 꺼트리지 않는 것이 나에게는 무척 중요한 일과였다.
매일매일 냄비에 밥을 해서 이불 밑에 넣어 두었다. 그러고 나면 화장실 한구석에 쪼그려 앉아서 빨래를 했다. 따뜻한 물 한바가지를 옆에 두고 손이 시릴 때마다 손을 녹였다. 그렇게 시린 손을 호호 불어가며 손빨래를 마치고 날 때쯤이면 부모님이 바다에서 돌아오셨다. 아빠는 저녁마다 거하게 취하셔서 엄마를 괴롭혔다. 이런 집이 싫어서 오빠는 일찍 집을 나가서 속칭 깡패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나에게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언제나 이런 일이 일상이었다. 언제쯤이면 이 불행들이 멈출까 생각해 보았지만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난 집안일을 다하고 나서 집 밑에 있는 바닷가 등대에서 부모님을 기다렸다. 아빠는 조타실에서 운전을 하였고 엄마는 뱃등 위에 계셨다. 꽤 먼 거리였지만 엄마아빠가 탄 배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엄마가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갑판 위에 나와 계신다는 것은 만선이라는 뜻이다. 난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그러면 엄마도 손을 흔들었고 아빠는 가끔 뱃고동을 울려줬다. 무사히 돌아온 부모님을 보고 있으면 내 마음이 놓였다. 만선인 채로 돌아오는 날에는 잠깐 행복이라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행복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엄마가 조금씩 이상해졌다. 엄마가 매일매일 아빠한테 폭행을 당하고도 힘든 일을 이겨 낼 수 있었던 것은 술기운 때문이었다. 엄마는 소주를 숨겨두었다가 매일매일 안주도 없이 몰래 마셨다. 결국은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 늘 고생만 하다가 마흔다섯이라는 젊디젊은 나이에 눈을 감으셨다. 엄마를 잃은 나는 오랫동안 아빠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런데 나도 이제 나이를 먹었나 보다. 원망스럽기만 했던 아빠를 용서하는 마음이 생겼다. 오히려 내가 너무 어린 나머지 엄마한테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는 자책감만 커졌다.
엄마는 늘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이라는 노래를 즐겨 부르셨다. 이제는 나도 힘이 들 때면 그 노래를 자주 부르고 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꼽으라면 늘 떠올리는 유일한 순간이 있다. 행복했던 만선의 기억 속에서 엄마는 항상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손을 흔들고 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행복했던 순간. 그러나 현실로 돌아오면 엄마는 내 곁에 안계셨다. 나의 지난날들을 돌아보면 엄마의 빈자리가 너무 컸다. 내 나이 스무 살 때 엄마가 돌아가셨으니 벌써 20년이나 지났다.
어느덧 40세를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지만 종종 아이처럼 ‘엄마’라고 소리내어 불러보곤 한다. 엄마, 엄마 불러도 이제는 대답이 없으시다. 엄마한테 잘 했던 기억은 없는 것 같고 잘 못해줬던 일들만 기억난다. 엄마는 행복하실까.
4월의 꽃망울들이 터질 때쯤이면 엄마의 기일이다. 엄마는 봄나들이를 하듯 멀리 떠나셨나 보다. 내 기억 속에서 엄마는 어느 꽃들보다도 곱고 예뻤다. 그래서 너무 안타깝다. 지금은 한순간의 실수와 잘못으로 영어의 몸이 되어있다. 뼈저리게 반성하고 뉘우친다. 이곳에서 나가면 엄마의 딸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겠다고 다짐을 해본다.
엄마는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다. 그래도 부르고 싶다.
엄마, 그립습니다.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난 집안일을 다하고 나서 집 밑에 있는 바닷가 등대에서 부모님을 기다렸다. 아빠는 조타실에서 운전을 하였고 엄마는 뱃등 위에 계셨다. 꽤 먼 거리였지만 엄마아빠가 탄 배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엄마가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갑판 위에 나와 계신다는 것은 만선이라는 뜻이다. 난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그러면 엄마도 손을 흔들었고 아빠는 가끔 뱃고동을 울려줬다. 무사히 돌아온 부모님을 보고 있으면 내 마음이 놓였다. 만선인 채로 돌아오는 날에는 잠깐 행복이라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행복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엄마가 조금씩 이상해졌다. 엄마가 매일매일 아빠한테 폭행을 당하고도 힘든 일을 이겨 낼 수 있었던 것은 술기운 때문이었다. 엄마는 소주를 숨겨두었다가 매일매일 안주도 없이 몰래 마셨다. 결국은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 늘 고생만 하다가 마흔다섯이라는 젊디젊은 나이에 눈을 감으셨다. 엄마를 잃은 나는 오랫동안 아빠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런데 나도 이제 나이를 먹었나 보다. 원망스럽기만 했던 아빠를 용서하는 마음이 생겼다. 오히려 내가 너무 어린 나머지 엄마한테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는 자책감만 커졌다.
엄마는 늘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이라는 노래를 즐겨 부르셨다. 이제는 나도 힘이 들 때면 그 노래를 자주 부르고 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꼽으라면 늘 떠올리는 유일한 순간이 있다. 행복했던 만선의 기억 속에서 엄마는 항상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손을 흔들고 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행복했던 순간. 그러나 현실로 돌아오면 엄마는 내 곁에 안계셨다. 나의 지난날들을 돌아보면 엄마의 빈자리가 너무 컸다. 내 나이 스무 살 때 엄마가 돌아가셨으니 벌써 20년이나 지났다.
어느덧 40세를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지만 종종 아이처럼 ‘엄마’라고 소리내어 불러보곤 한다. 엄마, 엄마 불러도 이제는 대답이 없으시다. 엄마한테 잘 했던 기억은 없는 것 같고 잘 못해줬던 일들만 기억난다. 엄마는 행복하실까.
4월의 꽃망울들이 터질 때쯤이면 엄마의 기일이다. 엄마는 봄나들이를 하듯 멀리 떠나셨나 보다. 내 기억 속에서 엄마는 어느 꽃들보다도 곱고 예뻤다. 그래서 너무 안타깝다. 지금은 한순간의 실수와 잘못으로 영어의 몸이 되어있다. 뼈저리게 반성하고 뉘우친다. 이곳에서 나가면 엄마의 딸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겠다고 다짐을 해본다.
엄마는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다. 그래도 부르고 싶다.
엄마, 그립습니다.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