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Politeia)를 읽어보면, 제1권에 ‘올바름’ 즉 정의(正義)란 무엇인가에 대해 소크라테스와 트라시마코스 간의 논쟁이 등장한다. 언제나 자신이 무지자(無知者)임을 자처하는 소크라테스와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이 일가견을 갖고 있다고 자부하는 트라시마코스 간의 논쟁인지라, 심리학을 하는 필자에게는 특별히 더 묘한 관전의 즐거움을 맛보게 하는 장면이다.
트라시마코스는 정권을 장악한 자가 자신들에게 유익이 되는 걸 법으로 정하여 약자들인 피지배자들에게 이행하도록 하므로 올바름이란 ‘더 강한 자를 위한 편익’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맞서 소크라테스는 올바름이 ‘편익이 되는 것’이라는 점은 인정하나, 그것이 강자의 편익일 수는 없다는 반론을 편다. 의술(醫術)이나 구두 제작 기술(技術)처럼 어떤 기술이나 다스림도 그것을 지닌 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의 혜택을 입을 약자를 위한 것이듯, 치술(治術)도 그 자체는 약자인 피지배자들을 위한 것이라며 말이다. 이에 트라시마코스는 실제 현실에서는 올바르지 못함이 이득이 되고, 그런 사람들이 더 잘살고 있다며 반박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잘 사는 것’이란 ‘훌륭하게 사는 것’이겠는데, 올바르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 반면에, 올바르지 못하게 사는 것은 ‘잘못 사는 것’임을 ‘사람의 훌륭한 상태’(arete), 즉 건강하고 행복한 상태와 관련지어 주장을 편다.
이로부터 시작된 ‘잘 사는 사람’ 즉, 어떤 사람이 건강하고 행복한 ‘훌륭한 상태의 사람’인지를 두고 트라시마코스를 비롯한 소피스트들과 소크라테스 간의 대화가 시작되는데, 이때 소크라테스 특유의 산파술에 따른 논리 전개가 오늘날 행복을 탐구하는 긍정심리학의 교본으로 삼아도 될 만큼 훌륭하다. 소크라테스는 좋은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나라가 좋은 나라일 것은 자명하므로 어떤 나라가 훌륭한 상태의 잘 사는 나라(오늘날의 언어로는 ‘웰빙 국가’)인지를 먼저 설명하겠다고 한다. 그러고 나면,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을 것이라며 말이다.
지금 코로나 19로 인한 범세계적인 팬데믹 상황에서 세계의 여러 나라를 보면, 플라톤의 국가론 속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정의된 ‘잘 사는 나라’, 즉 웰빙 국가가 과연 어떤 국가인지 확연하게 구분이 되는 것 같다. 바이러스는 국경을 모르고, 약자와 강자도 모르며, 정의를 알지 못한다. 취약한 계층의 사람일수록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어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에 대처해야 하는 우리 인간은 합리적이고 공정한 절차로 뛰어난 자들을 전문가로 키워낼 수 있고, 현(現) 인류에게 가장 적합한 정치체계 안에서 개인의 생각과 자유로운 판단으로 리더를 세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가능태일 뿐 모든 나라가 훌륭한 전문가와 리더를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닌 듯 보인다.
요즘과 같은 범국가적인 비상상태에는 그 어느 때보다 훌륭한 전문가와 리더가 필요한데, 불행하게도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해서 모두가 잘 대처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나라가 과연 이러한 체계와 리더를 갖춘 나라인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다. 386세대로 대표되는 현재 우리나라의 중장년 세대들은 더 나은 국가를 만들고픈 열망이 강했다. 어찌 보면 나라에 대해서는 어떤 슬픔과 애달픔, 그리고 같은 세대면 공감하는 모종의 한(恨)이 있다. 피 끓던 마음으로 투쟁했던 그 청년들이 이제 50대, 60대가 되어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위치에 있게 된 지금, 가슴 뛰는 뿌듯함을 느끼게 되는 것은, 어느덧 우리나라가 그동안 우리 스스로가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것만큼 강자의 편익을 위해 약자들이 이용되는 ‘정의롭지 못한 나라’가 아니라는 자기 발견 때문일 것이다. 세계 그 어떤 나라들보다 제 역할을 하는 리더들이 있는, 몇 안 되는 제대로 된 나라임을 확인하게 되었고, 앞으로 우리의 젊은 세대들과 동량들은 우리의 젊은 시절과는 달리, 새로운 사회적 정체감과 자존감을 느끼게 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이것은 비단 정치체계에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문민정부 시대로 접어든 90년대 이후 공교롭게도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붕괴, 씨랜드와 대구 지하철 화재, 세월호 침몰 사건까지 대규모 인재사건들이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일어났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우리 모두를 고통스럽게 했지만, 주저앉아 울고만 있지 않았다. 정치적 이슈로 투쟁하던 그 열정으로 백성(民)이 주인(主人)이 되는 나라를 위해 조용히 투쟁해왔다. 아마도 아픔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진지한 반성이 지금의 우리를 만든 것 같다.
뜻밖에도 전 세계가 모두 같은 시련을 겪는 와중에, 이 위기 속에서 우리나라가 고유의 자질과 그동안 갈고 닦아온 능력을 바탕으로 극복해 가는 과정을 보니,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자못 뿌듯하기까지 하다. 다른 나라 사람들의 부러움과 시샘이 뒤섞인 경탄 어린 시선은 차치하고라도, 무엇보다 우리 스스로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 국민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들인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제대로 돌아가는 사회인지, 우리나라가 얼마나 웰빙 국가인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수많은 고통과 시련으로부터 배운 결과이기에, 참으로 값지다.
트라시마코스는 정권을 장악한 자가 자신들에게 유익이 되는 걸 법으로 정하여 약자들인 피지배자들에게 이행하도록 하므로 올바름이란 ‘더 강한 자를 위한 편익’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맞서 소크라테스는 올바름이 ‘편익이 되는 것’이라는 점은 인정하나, 그것이 강자의 편익일 수는 없다는 반론을 편다. 의술(醫術)이나 구두 제작 기술(技術)처럼 어떤 기술이나 다스림도 그것을 지닌 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의 혜택을 입을 약자를 위한 것이듯, 치술(治術)도 그 자체는 약자인 피지배자들을 위한 것이라며 말이다. 이에 트라시마코스는 실제 현실에서는 올바르지 못함이 이득이 되고, 그런 사람들이 더 잘살고 있다며 반박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잘 사는 것’이란 ‘훌륭하게 사는 것’이겠는데, 올바르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 반면에, 올바르지 못하게 사는 것은 ‘잘못 사는 것’임을 ‘사람의 훌륭한 상태’(arete), 즉 건강하고 행복한 상태와 관련지어 주장을 편다.
이로부터 시작된 ‘잘 사는 사람’ 즉, 어떤 사람이 건강하고 행복한 ‘훌륭한 상태의 사람’인지를 두고 트라시마코스를 비롯한 소피스트들과 소크라테스 간의 대화가 시작되는데, 이때 소크라테스 특유의 산파술에 따른 논리 전개가 오늘날 행복을 탐구하는 긍정심리학의 교본으로 삼아도 될 만큼 훌륭하다. 소크라테스는 좋은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나라가 좋은 나라일 것은 자명하므로 어떤 나라가 훌륭한 상태의 잘 사는 나라(오늘날의 언어로는 ‘웰빙 국가’)인지를 먼저 설명하겠다고 한다. 그러고 나면,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을 것이라며 말이다.
지금 코로나 19로 인한 범세계적인 팬데믹 상황에서 세계의 여러 나라를 보면, 플라톤의 국가론 속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정의된 ‘잘 사는 나라’, 즉 웰빙 국가가 과연 어떤 국가인지 확연하게 구분이 되는 것 같다. 바이러스는 국경을 모르고, 약자와 강자도 모르며, 정의를 알지 못한다. 취약한 계층의 사람일수록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어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에 대처해야 하는 우리 인간은 합리적이고 공정한 절차로 뛰어난 자들을 전문가로 키워낼 수 있고, 현(現) 인류에게 가장 적합한 정치체계 안에서 개인의 생각과 자유로운 판단으로 리더를 세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가능태일 뿐 모든 나라가 훌륭한 전문가와 리더를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닌 듯 보인다.
요즘과 같은 범국가적인 비상상태에는 그 어느 때보다 훌륭한 전문가와 리더가 필요한데, 불행하게도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해서 모두가 잘 대처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나라가 과연 이러한 체계와 리더를 갖춘 나라인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다. 386세대로 대표되는 현재 우리나라의 중장년 세대들은 더 나은 국가를 만들고픈 열망이 강했다. 어찌 보면 나라에 대해서는 어떤 슬픔과 애달픔, 그리고 같은 세대면 공감하는 모종의 한(恨)이 있다. 피 끓던 마음으로 투쟁했던 그 청년들이 이제 50대, 60대가 되어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위치에 있게 된 지금, 가슴 뛰는 뿌듯함을 느끼게 되는 것은, 어느덧 우리나라가 그동안 우리 스스로가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것만큼 강자의 편익을 위해 약자들이 이용되는 ‘정의롭지 못한 나라’가 아니라는 자기 발견 때문일 것이다. 세계 그 어떤 나라들보다 제 역할을 하는 리더들이 있는, 몇 안 되는 제대로 된 나라임을 확인하게 되었고, 앞으로 우리의 젊은 세대들과 동량들은 우리의 젊은 시절과는 달리, 새로운 사회적 정체감과 자존감을 느끼게 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이것은 비단 정치체계에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문민정부 시대로 접어든 90년대 이후 공교롭게도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붕괴, 씨랜드와 대구 지하철 화재, 세월호 침몰 사건까지 대규모 인재사건들이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일어났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우리 모두를 고통스럽게 했지만, 주저앉아 울고만 있지 않았다. 정치적 이슈로 투쟁하던 그 열정으로 백성(民)이 주인(主人)이 되는 나라를 위해 조용히 투쟁해왔다. 아마도 아픔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진지한 반성이 지금의 우리를 만든 것 같다.
뜻밖에도 전 세계가 모두 같은 시련을 겪는 와중에, 이 위기 속에서 우리나라가 고유의 자질과 그동안 갈고 닦아온 능력을 바탕으로 극복해 가는 과정을 보니,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자못 뿌듯하기까지 하다. 다른 나라 사람들의 부러움과 시샘이 뒤섞인 경탄 어린 시선은 차치하고라도, 무엇보다 우리 스스로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 국민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들인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제대로 돌아가는 사회인지, 우리나라가 얼마나 웰빙 국가인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수많은 고통과 시련으로부터 배운 결과이기에, 참으로 값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