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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진력에 대한 고정관념,
무데뽀와 불도저

추진력이라는 말 앞에는 불도저나 무데뽀 같은 수식어가 종종 붙곤 한다. 추진력이란 다듬어진 꽃길을
달리는 대신 없는 길을 새로 만들고 가로막힌 장벽을 만나면 돌파하며 나아가는 불도저 같은 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추진력의 의미도 달라지고 있는 듯하다.

추진력 그리고 기업가 정신

추진력을 설명하는 말에는 유난히 속되게 이르는 표현이 많다. ‘무데뽀 정신’이니 ‘맨땅에 헤딩’이니 하는 말들이 추진력을 설명할 때 양념처럼 들러붙는다. ‘불도저 같은 힘’도 추진력의 다른 말처럼 쓰인다.
데뽀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사용하는 총 이름인 철포(鐵砲)의 일본식 발음에서 유래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철포도 챙기지 않고 전쟁에 나서는 것을 일러 무데뽀라고 했으니 누군가가 ‘당신은 무데뽀 정신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면 마냥 으쓱해서는 안 될 말이다. 어떤 일을 추진할 때 계획성 없이 무작정 밀어붙이는 성향의 사람이라고 비난하는 뜻이기 때문이다. 한국어 사전에도 ‘무데뽀’는 일의 앞뒤를 잘 헤아려 깊이 생각하지 않고 덤비는 것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드라마 제목이기도 한 ‘맨땅에 헤딩’이라는 표현도 일단 들이대고 보는 정신을 비유한 용어이다.
글자 그대로만 해석해도 자해에 가까운 행동이다. 심지어 ‘불도저’는 어떤가. 눈앞에 걸리적거리는 것들을 짓밟는다는 뜻이니 이것은 자해를 넘어 타인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는 행위까지도 추진력으로 용인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쯤 되면 ‘목표를 향하여 밀고 나아가는 힘’이 과연 몹쓸 힘이란 말인가 자문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추진력은 무데뽀와는 명백하게 다른 힘이다. 국내외의 한국학자들은 “한국인의 놀라운 추진력 속에는 사안에 대한 통찰력과 더불어 엄밀한 계산이 있기 때문에 ‘무데뽀’라고 볼 수 없다”고 말한다.
어떤 일을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불도저’가 아니라 자신과 공동체의 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의지로 난관을 헤쳐 나가는 ‘할 수 있다’의 정신이 곧 ‘추진력’이라는 것이다. 추진력에 도전정신이 더해지면 기업가 정신이다.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피터 드러커는 2002년 저서 ‘넥스트 소사이어티’에서 기업가 정신이 가장 높은 나라로 한국을 꼽았다. 한국전쟁으로 산업기반이 거의 무너졌던 최빈국이 40여년 만에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건 출중한 기업가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모험과 도전’, 한번 기회를 포착하면 어떤 위험과 난관이 닥쳐도 이를 극복하고 사업화하려는 ‘불굴의 정신’. 드러커가 정리한 기업가 정신은 한국의 창업 1세대들이 공통적으로 내면화하고 있던 핵심가치들이었다. 자고로 추진력의 원류를 찾자면 이런 데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목표를 향해 독하게 정진하는 리더십, 스티브 잡스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나 버려졌고 가난한 집에 입양되어 배고프게 자랐고 대학은 중퇴했으며 창업한 회사에서 쫓겨난 남자.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담대한 결정력과 맹렬한 추진력을 소유한 CEO. 이 모두가 스티브 잡스라는 한 인물을 설명하는 말이다. 잡스는 독단적인 성격으로 인해 수시로 동료들과 갈등을 빚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스 생전의 애플에는 언제나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그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은 “수많은 결점에도 불구하고 잡스는 뭔가 해낼 것 같은 믿음을 주었다.”고 회상한다. 그에게서 추진력을 읽었다는 뜻이다.
잡스는 자신의 신념과 목표를 향해 ‘독하게’ 정진하는 스타일이었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서만큼은 한치의 양보나 타협이 없었고, 놀라울 정도로 대범했다. 목표는 반드시 이루고야 말겠다는 강한 집념으로 집요하고도 지치지 않는 추진력을 보여주었다. 확고한 신념으로 한번 내린 결정에는 단호하고 일관된 행동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가 지닌 독함은 조직 전체에 영감을 불어 넣었다. 개인의 이익보다 조직, 고객, 사회, 인류를 바라보는 한 차원 높은 시야는 오히려 그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가 보여준 열정은 조직 전체를 공명시켰고, 긍정적인 에너지로 작용했다. 잡스의 추진력이 애플을 존경받는 기업으로 키워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경제사에 있어서 현대그룹의 창업주 고 정주영 회장의 추진력도 오래 회자되고 있다. 그를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동료 기업인조차 ‘결단력과 추진력의 화신’이라고 표현했을 정도이다. 지난 1971년 현대가 조선업에 진출할 당시 정주영 회장은 배 한 척 만들어본 경험도 없이 그리스 선주를 만나 5백원권 지폐 한 장으로 수주를 따냈다.
이 일화는 그만의 두둑한 배짱은 물론, 좌절을 모르는 추진력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극동의 이름 모를 나라 기업을 어떻게 믿겠느냐며 돌아서는 선주의 말에도 주눅들지 않았다. 대신 500원짜리 지폐를 꺼내 보이며 “한국은 1500년에 이미 거북선을 만들었다”고 열정을 토해낸 끝에 돌아서는 선주의 발걸음을 돌려세웠다. 정주영 회장의 추진력에 대해 ‘무데뽀 정신’이 발휘된 추진력이라고 표현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그는 평소에 “지혜를 모아 방침을 세우고 하면 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그는 대책 없이 맨땅에 헤딩한 것이 아니었다.

세종이 보인 강철 같은 추진력

왕으로서, 정치가로서 세종의 위대함을 부인하는 한국인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훈민정음 창제를 비롯해 세종이 이룬 찬란한 민족문화의 성과들은 나열하기가 힘들 정도다. 이러한 성과를 이룬 과정을 들여다보면 세종의 추진력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말끝마다 ‘아니되옵니다’를 앵무새처럼 읊조리며 발목을 잡는 신하들의 반대를 뚫고 이룬 성과들이 팔할이기 때문이다.세종의 추진력을 보여주는 최고의 일화는 훈민정음 창제다. 신하들은 ‘상스러운 무익한 글자’라며 창제를 반대하는 상소를 끊임없이 올렸다. 하지만 세종은 꿋꿋하게 훈민정음을 완성했다. 완성하는 데만 그친 것이 아니었다. 훈민정음을 위해 정음청을 설치하고 훈민정음 관련 사업을 전담하도록 했으며 하급관리인 서리를 뽑는 시험에 훈민정음을 포함시켰고 일반 백성들이 관가에 제출하는 서류를 훈민정음으로 작성하도록 지시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훈민정음을 널리 퍼뜨리고자 했던 세종의 뚝심을 짐작할 수 있다.
인재 기용에서도 세종은 추진력의 면모를 보였다. 특히 장영실을 기용할 때다. 장영실은 동래의 관노 출신이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장영실의 아버지는 본래 원나라 소주·항주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기생이었다. 요즈음으로 보면 아버지가 중국인인 다문화가정 출신이다. 당시로서는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노비가 된 인물이었으니 신하들의 반대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세종은 장영실을 끝까지 기용했으며 덕분에 수많은 발명의 꽃을 피웠다. 세종의 추진력은 재위 중반기가 되어도 달리지 않았다. 특히 북방영토 경영에서도 4군6진을 개척하는 추진력을 발휘했다. 북쪽 끝에는 산밖에 없는데 개척해서 뭐에 쓰냐며, 모든 신하들이 반대했던 일이었다. 황희조차 여진족 때문에 인명 피해가 클 테니 하지 말자고 간언했으나 세종은 김종서에게 북방영토의 중책을 맡기고 여진족을 몰아낸 자리에 백성들을 이주시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국경선을 확정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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