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대에 이곳에 들어와서 지금은 40대가 되었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제발 이 모든 것이 꿈이길’ 이라고 생각했다. 이 못난 생각들을 정리하고 마음을 고쳐먹은 것은 최근의 일이다. 사람은 어느 순간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서 ‘한바탕 꿈을 꾼 것 같다’는 말을 하곤 한다. 그것은 누군가에겐 행복했던 어느 한 시절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죽음을 앞두고 돌아보는 일생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에겐 감옥에서 보낸 지난 시간이 그렇다. 마치 12년간 한바탕 긴 꿈을 꾼 것 같다. 이곳 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는 매일 밤 잠들기 전 눈을 감고 이대로 잠에서 깨지 않게 해달라고 누군가에게 빌곤 했다. 내가 받은 형벌의 무게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나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억울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아침에 눈을 뜨면 다시 현실이 되는 생활이 반복되었다. 거짓말같이 무의미한 삶이 그렇게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을 보다가 우연히 발견한 어느 일본 할머니의 시를 마주하고 난 뒤 나는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분이 쓰신 시와 많이 비슷해서였다. 그분은 바로 나의 할머니다. 할머니는 내가 구속되던 해 추석에 돌아가셨다. 문맹이셨던 할머니는 살아계실 때 또래 어르신들이 모여 한글을 배우는 일명 ‘회관’이라는 곳에 매일 다니셨다. 어느날 시를 쓰는 것을 배웠다며 삐뚤삐뚤한 글씨로 눌러쓴 시를 내게 보여주셨다. 할머니는 나에게 한글을 가르쳐달라며 어린아이처럼 조르곤 하셨는데 철없던 나는 귀찮은 마음에 늘 그 자리를 피했다. 그때 할머니께서 내게 보여준 시를 완벽하게 기억하진 못하지만 정확히 기억하는 한 구절이 있다.
“살아 있어서 그래도 좋았네”.
신문에서 본 시바타 도요라는 시인의 시에도 “살아있어 좋았어”라는 구절이 있었다.
책이라곤 읽어본 적 없는 할머니께서 시를 표절한 건 아니실 테고, 우연으로 비슷한 구절 몇 개가 겹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제와 생각난 내 할머니의 그 문장은 왜 이리도 가슴에 각인이 되는 것인가. 어쩌면 하늘나라에 계신 할머니께서 우연을 가장해 내게 그 말씀을 하고 싶으셨던 것일까?
이유야 어찌 되었든 나는 이 시로 인해 거짓말처럼 삶에 대한 태도가 바뀌었다. 시간을 두고 지난 삶을 돌아보며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시간을 보내왔는지 깨닫게 되었다. 때론 한 권의 책이나 한 줄의 문장이 사람의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는데 그 일이 나에게도 일어난 것이다. 내가 악몽이라 생각했던 지난 시간 동안 어쩌면 나로 인해 피해를 입은 분과 그 가족들 또한 악몽처럼 느껴지지 않았을까?
억울해했고, 현실 도피를 위해 이것이 꿈이길 기도했다. 죽어 마땅한 죄를 저지르고도 살아 있음에 감사함을 몰랐고, 내 시간이 그리고 인생이 억울하고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진정한 성찰과 반성이 없었으니 악몽이었을 수밖에…. 진짜 억울한 사람들은 피해자들일 텐데….
내 생각이 바뀌었다고 해서 당장 내 지난 과오가 씻겨나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제라도 남은 시간을 반성과 희망으로 묵묵히 살아가려고 한다. 또한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보고 싶다. 그것이 피해자들에게도, 돌아가신 할머니께도, 그리고 나에게도 최선의 도리가 아닐까 감히 생각해본다. 그리하여 먼 훗날 내 지나온 생을 돌아봤을 때 ‘너무나 끔찍한 악몽이었어’가 아닌 ‘한바탕 아름다운 한여름 밤의 꿈을 꾼 것 같아’라고 말하고 싶다. 끝으로, 나를 악몽에서 깨워준 시바타 도요의 시 ‘약해지지 마’를 다시 한 번 읊어본다.
나에겐 감옥에서 보낸 지난 시간이 그렇다. 마치 12년간 한바탕 긴 꿈을 꾼 것 같다. 이곳 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는 매일 밤 잠들기 전 눈을 감고 이대로 잠에서 깨지 않게 해달라고 누군가에게 빌곤 했다. 내가 받은 형벌의 무게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나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억울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아침에 눈을 뜨면 다시 현실이 되는 생활이 반복되었다. 거짓말같이 무의미한 삶이 그렇게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을 보다가 우연히 발견한 어느 일본 할머니의 시를 마주하고 난 뒤 나는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분이 쓰신 시와 많이 비슷해서였다. 그분은 바로 나의 할머니다. 할머니는 내가 구속되던 해 추석에 돌아가셨다. 문맹이셨던 할머니는 살아계실 때 또래 어르신들이 모여 한글을 배우는 일명 ‘회관’이라는 곳에 매일 다니셨다. 어느날 시를 쓰는 것을 배웠다며 삐뚤삐뚤한 글씨로 눌러쓴 시를 내게 보여주셨다. 할머니는 나에게 한글을 가르쳐달라며 어린아이처럼 조르곤 하셨는데 철없던 나는 귀찮은 마음에 늘 그 자리를 피했다. 그때 할머니께서 내게 보여준 시를 완벽하게 기억하진 못하지만 정확히 기억하는 한 구절이 있다.
“살아 있어서 그래도 좋았네”.
신문에서 본 시바타 도요라는 시인의 시에도 “살아있어 좋았어”라는 구절이 있었다.
책이라곤 읽어본 적 없는 할머니께서 시를 표절한 건 아니실 테고, 우연으로 비슷한 구절 몇 개가 겹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제와 생각난 내 할머니의 그 문장은 왜 이리도 가슴에 각인이 되는 것인가. 어쩌면 하늘나라에 계신 할머니께서 우연을 가장해 내게 그 말씀을 하고 싶으셨던 것일까?
이유야 어찌 되었든 나는 이 시로 인해 거짓말처럼 삶에 대한 태도가 바뀌었다. 시간을 두고 지난 삶을 돌아보며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시간을 보내왔는지 깨닫게 되었다. 때론 한 권의 책이나 한 줄의 문장이 사람의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는데 그 일이 나에게도 일어난 것이다. 내가 악몽이라 생각했던 지난 시간 동안 어쩌면 나로 인해 피해를 입은 분과 그 가족들 또한 악몽처럼 느껴지지 않았을까?
억울해했고, 현실 도피를 위해 이것이 꿈이길 기도했다. 죽어 마땅한 죄를 저지르고도 살아 있음에 감사함을 몰랐고, 내 시간이 그리고 인생이 억울하고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진정한 성찰과 반성이 없었으니 악몽이었을 수밖에…. 진짜 억울한 사람들은 피해자들일 텐데….
내 생각이 바뀌었다고 해서 당장 내 지난 과오가 씻겨나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제라도 남은 시간을 반성과 희망으로 묵묵히 살아가려고 한다. 또한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보고 싶다. 그것이 피해자들에게도, 돌아가신 할머니께도, 그리고 나에게도 최선의 도리가 아닐까 감히 생각해본다. 그리하여 먼 훗날 내 지나온 생을 돌아봤을 때 ‘너무나 끔찍한 악몽이었어’가 아닌 ‘한바탕 아름다운 한여름 밤의 꿈을 꾼 것 같아’라고 말하고 싶다. 끝으로, 나를 악몽에서 깨워준 시바타 도요의 시 ‘약해지지 마’를 다시 한 번 읊어본다.
있잖아, 불행하다고 한숨짓지 마. 햇살과 산들바람은 한쪽 편만 들지 않아. 꿈은 평등하게 줄 수 있는 거야.
나도 괴로운 일 많았지만 살아 있어 좋았어. 너도 약해지지 마.
나도 괴로운 일 많았지만 살아 있어 좋았어. 너도 약해지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