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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그러운 5월과 어울리는
영화·소설 속 그곳

2020년 봄, 세상은 ‘잠시 멈춤’ 상태다. 비록 사람들은 잠시 일상을 멈췄지만 자연은 묵묵히 본연의 속도로 걸어가고 있다.
겨울을 이겨낸 봄이 찾아 왔고 여기저기 꽃은 피어오르고 있다. 전국 곳곳의 꽃축제는 취소됐어도 와글와글 봄꽃은 피어오른다.
나와 모두를 위해 올해는 먼 곳으로의 꽃구경은 삼가고 가까운 곳으로 잠시 나가 봄꽃을 바라보자.
이 봄을 빼앗긴 게 못내 억울하던 찰나, 봄꽃을 보니 조금이나마 위안이 된다.
글·사진. 김수진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주요 촬영지인 혜원의 집

잠시 쉬어가도 괜찮아, 영화 <리틀 포레스트> 촬영지

<리틀 포레스트>는 모든 일상이 잠시 멈췄던 요즈음 같은 시기에 보면 딱 좋을 영화다. 주인공 혜원은 시험도 취업도 연애도 뭐 하나 뜻대로 풀리지 않자 도시에서의 모든 일상을 잠시 멈추고 시골 고향 집으로 돌아온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작은 집. 먼지 쌓인 집을 돌아보던 혜원은 배고픔을 느낀다. 쌀독에 조금 남아 있는 쌀로 밥을 짓고 눈 덮인 텃밭에서 배추와 파를 뽑아와 된장국을 끓인다. 혜원은 그렇게 시골집에서 사계절을 지내며 소박한 제철 재료로 한 끼 한 끼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봄에는 아카시아꽃 튀김과 쑥갓 튀김을, 여름에는 오이 콩국수를, 가을에는 밤 조림을, 겨울에는 가을날 만들어 놓은 곶감을 야금야금 빼먹는다. 음식을 만들고 먹는 장면이 영화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그렇다고 단순한 ‘먹방’ 영화는 절대 아니다. 영화에서 음식은 단순히 배를 채우고 입을 즐겁게 하는 도구가 아니다. 임순례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정성을 들여서 한 끼를 먹는다는 건 단순히 요리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정성을 들인 만큼의 결과물을 얻는 것이죠.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음식은 타이밍’이라는 대사처럼 인생도 그저 최선을 다하고 좋은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음식은 삶을 살아가는 자세죠”라고 말한다.
일본만화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평범한 20대 여성이 시골집에서 자급자족하며 계절과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담아낸다. 영화의 느낌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 시골에서 올 로케이션을 진행했고 사계절의 풍광을 제대로 담기 위해 각 계절에 맞춰 꼬박 1년간 촬영했다. 임순례 감독이 혜원의 집과 마을을 고르는데 더욱 신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장소 섭외에 남다른 공을 들였고 영화 분위기와 딱 맞아떨어지는 경북 군위군 우보면 미성리를 찾아냈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집이 혜원의 집이다. 낮은 돌담이 둘러싼 한옥은 군더더기 없이 단정하다. 촬영에 앞서 한옥 내부만 조금 개량했을 뿐, 전체적으로는 기본 틀을 그대로 유지했다.
  •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주요 촬영지인 혜원의 집
  • 아름다운 간이역으로 손꼽히는 화본역
이 집은 <리틀 포레스트> 촬영지라는 이름으로 일반에 개방 중이다. 영화를 본 후 이곳을 찾으면 화면에서 봤던 모습이랑 똑같아 반갑다. 마당에 들어서면 마치 혜원이 마루에 앉아 “누구세요?” 하고 말을 건넬 것만 같다. 마루의 미닫이문과 그 뒤로 하늘거리는 커튼.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혜원이 그랬던 것처럼 마루에 걸터앉아 본다. 신발을 살포시 벗어두고 안으로 들어가면 이 집의 핵심 공간인 주방이 한눈에 보인다. 주방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곳은 마당을 향해 난 작은 창. 그 앞에 서본다. 창가에 양념통이 가지런히 놓인 모습이 어여쁘고 그 사이로 내다보이는 마당 풍경이 따스하다. 주방에만 섰을 뿐인데 보글보글 된장국을 끓이고 치지직 배추전을 지지던, 혜원이 요리하던 장면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영화의 여운을 더 이어가고 싶다면 혜원의 집에서 차로 10분 정도 거리의 화본마을로 향하자. 화본마을은 작은 시골 마을이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예쁜 간이역 중 하나로 손꼽히는 화본역 덕에 이름을 알렸다. 1930년대 문을 연 화본역은 몇 차례 개보수 과정을 거쳤으나 골격은 그대로 유지 중이다. 역 구내의 25m 높이 급수탑도 화본역의 포인트다. 증기기관차가 다니던 시절 물을 공급하던 탑인데 지금은 역사적인 기념물로 보존 중이다. 내부 출입도 가능하다. 철길을 사이에 두고 아담한 간이역과 빛바랜 급수탑이 마주 선 아날로그 풍경은 영화 속에도 그대로 등장한다. 예전에 역 앞에 하나씩 꼭 있었을 법한 ‘역전상회’도 영화에 나온다. 혜원과 친구가 군것질하며 얘기 나누던 곳이다. 역전상회 앞길을 따라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자. 작은 가게와 소담한 가옥이 옹기종기 모여 정겨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유채꽃 만발하는 5월의 선학동 마을-장흥군청 제공

5월이면 꽃물결 일렁이는 문학 마을, 소설 《선학동 나그네》와 영화 <천년학> 촬영지

전남 장흥 선학동 마을은 현대문학의 거장 이청준 작가와 한국 영화계의 거장 임권택 감독의 작품이 교차하는 의미 깊은 공간이다. 장흥이 고향인 이청준 작가는 선학동 마을을 배경으로 단편소설 《선학동 나그네》를 집필했고 임권택 감독은 이 마을에서 영화 <천년학>을 촬영했다.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로 주목받았던 <천년학>은 《선학동 나그네》가 원작이다. 소설과 영화는 선학동이라는 마을을 배경으로 소리꾼 아버지와 의붓남매의 기구한 운명을 그려낸다. “포구에 물이 차오르면 관음봉은 그래 한 마리 학으로 물 위를 떠돌았다. 선학동은 날아오르는 학의 품 안에 안긴 마을인 셈이었다. 동네 이름이 선학동이라 불리게 된 연유였다.” 이청준 작가는 《선학동 나그네》에서 이렇게 썼다. 선학동은 소설 속 지명이지만 실존하는 공간을 모티브로 했다. 장흥 남단의 산저마을이 무대였는데 임권택 감독의 <천년학> 촬영 후 선학동으로 마을 이름을 바꿨다. 마을 입구에 서면 ‘학의 품 안에 안긴 마을’이라는 이청준 작가의 표현을 단박에 이해하게 된다. 마을 뒷산의 형태가 영락없이 날아오르는 학의 형상이다. 마을 입구에는 <천년학> 세트장이 남아 있다. 바다를 마주하고 앉은 외딴 목조 건물은 영화 속 주요 공간인 주막이었다. 이렇다 할 볼거리는 없지만 바다와 어우러진 건물 자체가 아름답다.
  • 영화 ‘천년학’ 세트장
  • 단아한 분위기의 이청준 작가 생가
5월과 10월이면 선학동 마을에는 아름다운 꽃물결이 일렁인다. 5월에는 드넓은 유채꽃밭이 바다와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한다.
선학동 마을을 방문하기 좋은 시기는 5월이나 10월 무렵이다. 봄에는 유채꽃이, 가을에는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오르기 때문이다. 마을이 고령화되면서 일손이 줄어 계단밭이 황무지처럼 변하자 주민들은 봄에는 유채를, 가을에는 메밀을 심기 시작했다. 그 덕에 5월과 10월이면 선학동 마을에는 아름다운 꽃물결이 일렁인다. 5월에는 드넓은 유채꽃밭이 바다와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한다.
선학동 옆 진목 마을의 이청준 작가 생가도 함께 방문해보자. 일자형 한옥과 마당으로 이뤄진 생가는 소박하면서도 단아하다. 집에 얽힌 사연도 있다. 이청준 작가가 타지에서 고등학교에 다닐 때 집안 사정으로 이 집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이 사실을 알면 속상할까 봐 집주인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잠시 집을 빌린다. 어머니는 아무 일 없는 듯 이 집에서 아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벽녘 눈길을 걸어 아들을 배웅한다. 이청준 작가는 당시의 기억을 토대로 자전적 소설 《눈길》을 썼다. 생가 내부에는 그의 작품과 삶을 보여주는 전시가 이뤄진다. <천년학> 외에도 <서편제>, <밀양>, <축제> 등 여러 영화가 이청준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관련 소설이나 영화를 본 후 이곳을 찾는다면 의미 있는 여행의 한 장을 채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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