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용명
교도소연구소 소장, 전 안동교도소장
1921년 3월 25일 조선총독부령 제41호의 태형폐지에 의한 감옥확장계획에 따라 김천 및 안동에 양 분감을 신설하고 김천분감은 같은 해 7월 15일, 안동분감은 같은 달 18일에 개청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지역의 유지들을 중심으로 안동에 감옥을 건축할 필요성에 대하여 청원을 하였다.1) 1923년 5월 5일 대구형무소 안동지소로 명칭을 변경하여 운영되다가 1938년 김천소년교도소 안동지소로 수용구분이 변경되어 소년수형자를 수용하여 운영을 하다가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 당일 수용인원은 소년수형자 290명, 미결수용자 32명 중 30명이 소년이었다. 30명은 모두 농림고등학교 학생으로 당시 안동지역에서 학생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의 기록과 일치한다.
1921년 건축된 건물은 한국전쟁 시 대부분 파괴되었지만 청사동과 여사, 주벽 일부가 그대로 남아있었으며, 청사동은 1986년 현재지로 이전할 때까지 사용되었다. 특히 청사동은 건축적으로 매우 아름다운 목조 건축물이었음이 1986년 현재지로 이전하면서 남긴 사진에서도 볼 수 있다.
1923년 5월 감옥의 명칭을 형무소로 개칭하고 전옥(典獄)의 관명(官名)을 두고 형무소장의 직명(職名)이 신설되었다. 개정의 취지는 감옥이라는 문자는 곧바로 구시대의 뇌옥(牢獄)을 연상시키고 어조가 생소하여 재감자는 물론 일반사회에도 친해지기 어렵기 때문에 이를 개칭하여 행형의 내용과 외관 모두를 일신하고 근대행형제도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는 것에 있었다. 통감부 및 총독부의 초기 감옥은 이전 시대의 불완전하고 통제되지 않았던 감옥제도의 뒤를 이어받아 열의로 그 개량과 확장에 노력하였으며 한일병합 직후 3·1운동 중에는 오직 구금의 적절함과 규율의 유지에 주안점을 둔 계호행형시대로 운영되었다. 그 후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근대행형사조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어 1925년경부터 작업행형시대로 들어섰고 이어서 교육행형시대로 진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시행형시대에 직면하여 행형운영은 일본의 전쟁수행을 위한 방향으로 바뀌었고 해방까지 지속되었다.
1921년 완공된 건물에 대해서는 사진과 도면 등을 통해 전체 위치, 각 사무실의 규모와 형태 등을 알 수 있다. 주벽은 건축 당시 목조였으나 1920년대 말에 벽돌주벽으로 개축되었으며 관사 등을 제외한 건물은 주벽 내에 위치하였다. 안동분감을 공사 중에 사고로 공사인부가 사망하거나 부상당하기도 하였다.2)
한국전쟁으로 건물은 대부분 파괴되었으나 청사, 여사, 감시대, 주벽 등은 남았으며 한국전쟁 후 수용동과 주벽 등의 건축물을 복구한 후 신세동 시대(해방 이후부터 1986년까지)에 그대로 사용되었다. 해방 후 형무소로 승격되면서 이 청사건물에는 소장실과 보안과를 두면서 정문밖에 건물을 지어 서무과, 작업과, 용도과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청사는 정문안쪽에 위치하였으며 한국전쟁 중에도 그대로 남아 풍산읍으로 이전 전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건물은 목조단층건물로 매우 정교하게 건축되었다. 청사에는 회의실, 사무실, 조사실, 보관물품실, 입소실, 탕비실 등의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사무실의 규모는 12.73m×5.45m(약 20.99평), 회의실의 규모는 3.63m×4.55m(약 5평)이었다.
수용동은 남자수용동과 여자수용동 그리고 구치감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모두 목조단층 기와건물이었다. 기결수용동은 3동으로 중앙간수소에서 부채꼴 형태로 위치하였으며 회랑을 통해 공장으로 연결되었다. 특히 수용동과 공장 사이에는 수용자에 대한 검신을 하는 공간이 위치하였으며 나중에 수용동 3동이 증축되었다.
남자수용동은 총 3개가 있었다. 수용동은 중앙에 복도를 두고 거실이 마주보는 중복도 형태로 한 동에 있는 거실은 한 쪽에 7개로 모두 14개가 있었다. 수용동은 12.72m×8.18m(약 62.97평)이고 한 개의 거실은 3.64m×2.72m(약 2.99평)이었다.
여자수용동은 정문 안쪽에 위치하였으며 혼거실 3개와 독거실 1개가 있었다. 규모는 12.72m×5.45m(약 20.97평)이고 혼거실은 3.64m×3.64m(약 4.01평)이며 독거실은 1.82m×3.64m(약 2평)이었다. 여공장에는 여직원 근무실, 여자수용자 목욕탕과 화장실 등의 설비가 마련되어 있었다. 1937년 4월 11일 오전 7시에 당직여간수가 취업자 4명을 계호하여 탕비용 화로에 불을 피우기 위하여 풍로로 바람을 불던 중 불씨가 날라서 뒤쪽 약 2.7m 떨어진 개소에 쌓여있던 교체용 면(약 187.5kg)에 점화하여 연소하여 피해액이 7,990원에 달하였다.
병동은 수용동과 수용동 사이에 위치하였다. 병동은 12.72m×5.45m(약 20.97평) 규모로 혼거실 3개와 독거실 1개로 구성되었다. 혼거실은 3.64m×3.64m(약 4평)이고, 독거실은 1.82m×3.64m(약 2평)이었다. 병동과 인접하여 욕실이 만들어져 있었으며 병동으로부터 수용동과 공장으로는 회랑으로 연결되었다. 이곳의 목욕탕은 환자 전용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1922년 2월에는 화장실 건물과 연결하는 형태로 소독실이 증축되었다. 소독실의 규모는 2.72m×1.82m(약 1.5평)이었다.
구치감은 한 동이 있었으며 혼거실 4개와 독거실 6개가 있었다. 구치감의 규모는 14.55m×8.18m(약 36평)이었고 구치감의 혼거실은 3.64m×2.73m(약 3.01평), 독거실은 1.82m×2.73m(약 1.5평)이었다.
중문 안쪽에 있는 목조 2층 건물이 있었으며, 1층은 판자바닥의 공간 2곳과 중앙간수소가 위치하였고, 2층은 교회당으로 사용되었으며 판자바닥이었다. 교회당에는 각 수용동으로부터 중앙간수소를 지나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는 구조였다. 규모는 12.58m×11.81m(약 44.94평)이었다. 교회당 내에는 연단과 불단이 마련되어 있었다. 1층에 위치한 판자바닥의 공간은 직원 침실로 사용되었거나 또는 수용자 교육이나 직원 교육실로 사용되었다. 중앙간수소는 3개의 수용동으로 연결되는 중앙에 위치하였고 수용동과는 각각의 회랑을 통해 연결되었다.
공장동은 2동이 서로 마주보는 형태로 건축되었으며 각 수용동과 회랑으로 연결되었다. 한 동의 규모는 30.90m×9.09m(약 84.97평)이었으며, 화장실과 세면실이 공장건물에 부속되어 있었다.
중문 내에 위치한 취사장과 목욕탕은 한 동의 건물로 건축되었다. 취사장 바로 옆에는 우물이 있어 취사, 세척, 청소 등에 사용되었으며 주식과 부식 등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다. 그리고 화재 시 필요한 소방용구를 보관하는 창고가 위치하였다.
경운지는 낙동강의 지류인 반변천을 끼고 북쪽 방향에 위치하였다. 경운지에는 숙소, 창고, 소를 키우는 우사 등의 건물이 있었으며 설계도면이 남아있다. 창고는 목조단층건물로 오른쪽 문을 통해 창고 내부로 출입하는 구조였으며 왼쪽을 통해서는 출입문이 2곳이 마련되어 있고 내부 공간이 2곳이 있는 것으로 보아 직원실로 보인다. 나중에는 수용자가 출역하여 외박작업장으로 사용되면서 수용동과 감시대 등의 건물이 만들어졌다. 창고의 규모는 18.18m×9.09m(약 50평 규모)였다. 우사는 판자바닥의 방과 흙바닥의 공간 2곳으로 구성되었으며 약 9평 규모였다. 화장실은 소변기와 대변실이 있었으며 소변기 아래쪽은 소변을 모아 거름 등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소변을 모을 수 있는 구조물을 매설하고 밖에서 소변을 풀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접견소는 청사 건물과 구치감 및 여수용동을 구분하는 내 주벽에 연결된 형태로 건축되었다. 규모는 3.64m×2.72m(약 2.99평)으로 중앙을 구분하여 접견민원인과 수용자가 서로 마주보고 접견을 하도록 하였다. 세면욕실은 2곳이 있었으면 한 곳은 취사장과 창고 사이에 있었고 나머지 한 곳은 병동과 공장 사이에 위치하였으며 회랑으로 연결되었다. 창고는 2곳이 있었으며 한 곳은 취사장과 인접한 창고는 쌀, 보리, 콩 등을 보관하는 주부식 창고로 사용되었고, 규모는 15.54m×6.36m(약 29.9평)이었다. 바닥은 판자바닥과 흙바닥이었고 판자바닥 위에 물건 등을 보관하였다. 또 하나의 창고는 18.18m×7.27m(약 40평) 규모로 흙바닥의 목조단층건물이었다. 취사장 창고에 연결된 형태의 소방창고를 증축하였다. 규모는 3.64m×3.03m(약 3.34평)이었다. 관사는 2동이 있었으며, 한 동은 2층 목조건물이었고 나머지 한 동은 단층목조건물이었다.
주벽은 1921년 건축 시에는 판자벽으로 만들어졌으나 1920년대 말에 연와조로 개축되었다. 판자벽은 비늘판벽의 형태로 만들어져 내부에서는 도주가 어려운 구조였다. 주벽의 높이는 2.72m였으며 상부를 둥글게 마감하여 도주를 방지하였다. 주벽의 길이는 총 412.49m로 도로쪽 143.71m, 산쪽 147.49m, 정문쪽 56.05m, 반대쪽 세로 51.05m, 그리고 세 곳의 주벽모서리부분 각각 4.73m이었다.
우물은 총 4곳이 있었으며 음료수, 취사, 세탁, 청소 등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취사장 옆에 위치한 우물은 취사를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으며 여수용동 구역 내에 위치한 우물은 여자수용자의 목욕, 세탁 등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청사 뒤편에 있는 우물은 직원을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나머지 한 곳은 감방과 공장 사이에 있었으며 수용자용으로 사용되었고 운동 후 목욕과 세면, 청소 등에 사용되었다. 우물이 있는 곳으로부터는 하수설비가 갖추어져 있었으며 사용한 물은 하수설비를 통해 밖으로 흘러나가도록 하였다.
안동분감은 대구감옥의 분감으로 설치되었으며, 조직구성은 분감장과 서무, 보안, 작업, 교무, 용도, 의무계로 구성되었다. 1923년 2월 21일 분감장에 이시카와(石川亥之松)가 임용되었다. 1939년 3월 1일 직원 정원표에 따르면 당시 큰 규모의 기관에는 배치되었던 감옥통역생, 보건기사, 약제사, 교사, 교무촉탁, 작업기사, 운전수, 기관수, 화부, 전화교환수, 급사 등이 안동지소에는 배치되지 아니하였다.
임시 작업기수 요시다(吉田岩男)는 응소(육군보병 상등병)하여 제80연대에 입대 중이었으며, 지물공(목공)에서 건축에 수년간 건축 및 영선 등을 담당하고 있고 당분간 현직의 지위에서 제대 시까지 지도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안동형무지소에서는 1938년도에 지물공에 작업기수 1명을 배치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당시 지물공은 일반작업으로 경영하였으며 1937년 6월 기술지도자가 와서 특별작업을 하면서 지출예산 5,798円을 배부받았고 수입 8,700円의 책임액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 수입예산액을 거두었다. 지도기술자가 있으면 취업자의 기능숙달이 지체되지 아니하여 제때에 판로를 확장할 여지가 있는 역량을 갖추게 되어 신용을 실추할 우려가 없도록 하기 위해 지도자를 배치하여 지물공의 발전확장을 기할 수 있록 법무국 행형과에 요청하였다.
조선총독부 법무국에서 발표한 1937년 4월 1일부터 전국 18개 형무소의 수용구분 및 1937년 7월 말 각 감옥 재감인원에 따르면 안동형무지소의 수용구분은 10년 미만의 남자수형자, 1년 미만의 여자수형자를 수용하였으며, 수용내역은 수형자 195명(여 2명), 미결 7명, 노역유치자 9명 등 계 211명을 수용하였다.4) 1937년 3월말 현재 안동지소 남자수용자 구금상황은 독거 32개방에 32명, 혼거 85.1평에 179명(1평당 2.1명)이다. 여자수용자의 구금상황은 1927년 10명, 1928년 8명, 1929년 9명, 1930년 13명, 1931년 15명, 1932년 10명, 1933년 8명, 1934년 7명, 1935년 5명, 1936년 4명, 1937년 4명이었다.5) 1945년 8월 15일 해방 당일 안동지소 재감인원은 수형자(소년) 290명, 피의자 소년 30명, 피의자 청년 2명이 있었다.
아래 표는 대구형무소와 안동지소의 1934년부터 5년간 식비 기타 내역 조사를 나타낸 것 이다.
1921년 개소한 안동지소에는 지물공(목공), 양재봉공, 고공(藁工), 경운 등의 작업이 실시되었다. 공장동은 2동이 있었으며 경운은 안동 용상동에 있는 위치하였다. 그 후 1937년에 안동지소에서는 지물공(목공), 양재봉공, 도사공(塗師工), 혁공(革工), 경사공(經師工), 고공(藁工), 인쇄공 등의 작업이 실시되었다. 세부적으로는 연탄공, 마공(麻工), 토공(土工), 면타부(綿打夫), 세공(細工), 이발부 등의 작업이 실시되었다. 1940년대 당시 출역인원은 경운부 80∼130명, 지물공 20∼30명, 죽세공 20∼30명, 양재봉공 10∼15명, 관용부 30∼40명, 휴역 기타 60∼80명이었다.
1934년도부터 5년간 안동지소 작업수입액조사서의 현황은 다음과 같다.
1940년 지물공 취업 연인원은 관사업에 23,907명, 위탁업에 6,020명이었다. 당시 생산된 제품은 학생책상, 장롱, 양복장, 낮은 책상, 높은 책상, 서류상자, 경대, 차탁자, 당책상, 둥근탁자, 정리장, 의자, 장책상, 벼루상자 등 22종에 달하였다. 1937년 6월 12일 지물공의 예상 수입액은 8,700円으로 그 중 순이익금은 1,716円이었고 1939년 수입액은 관사업 8,486円, 위탁업 6,040円이었다. 특히 1938년 특별작업의 수입예산액은 10,200円으로 학생책상 200조 800円, 사무책상 100개 400円, 장롱 3종류 23개 830円, 양복장롱 3종류 35개 1,080円, 좌탁 40개 220円, 높은 책상 30개 180円, 서류상자 3종 60개 613円, 식탁 2종류 50개 115円, 下馱상자 2종류 30개 175円, 차상자 6종류 125개 1,390円, 장식선반 3종 30개 280円, 당(唐)책상 3종 45개 390円, 화장대 2종 60개 90円, 둥근탁자 2종 20개 90円, 레코드 기구세트 2종 10개 50円, 정리상자 30개 75円, 재봉상자 20개 70円, 경대 5개 50円, 벼루상자 2종 55개 100円, 양팔책상 2개 50円, 한쪽팔 책상 2개 90円, 의자 20개 100円, 위탁수선료 222円이었다.
지물공은 1935년부터 숙련기공의 이감을 받아 훈련실시에 노력한 결과 기능이 숙달되어 1936년 수입은 2,279円을 거두었다. 1935년도 수입 1,539円(1934년 1,453円)으로 전년도에 비해 740円의 증가를 보였으며 1937년도 초에 3,000円의 수입(다른 건축공사 3,000円)계획을 수립하여 실현에 노력하였다. 당시 안동은 중앙철도부설이 확정된 후 인구가 증가하여 건축이 수시로 행해지는 등 시황은 순조롭고 활발하여 목공제품은 현저하게 주문이 증가하였고 인근 군 또는 시골에 판로가 있었다. 당시 건축 중인 안동농림고등학교와 안동경찰서 파출소 기타 민간에 의해 총기고 23곳의 건축신청이 있는 등 목공건축과 아울러 경영에서 본 계획의 수입예상은 확실하였고 장래 유망한 작업으로 인정되었다. 따라서 양재봉공에 취업하는 재감자 12, 13명을 지물공으로 전업하고 건축공을 12명 정도 증원하였다.
1939년 양제봉공에 취업한 연인원은 관사업 8명, 위탁업 309명이었으며 쿠루메시카쓰리짜기(久留米絣織)6) 12,491명(위탁업 2,144명, 수부업 12,491명)이었다.
양재는 일본옷 재봉공, 양재봉공, 세탁, 쿠루메시카쓰리짜기 등의 작업을 하였으나 쿠루메시카쓰리짜기는 위탁 또는 수탁작업의 형태로 운영되었다. 관사업의 양재봉공 수입액은 8,348円이었으며 위탁업에서는 일본옷 재봉공 3,190円, 양식재봉공 100,410円, 양복세탁 6,200円이었다.
1939년 경운에 취업한 연인원은 관사업에 19,871명, 위탁업에 100명이었으며 경운의 작업수지는 관사업 6,796円, 위탁업 8,970円이었다. 안동지소 경운작업장에는 축산작업이 운영되었다. 당시 전국 형무소에서 실시한 축산교육이 매우 효과가 있어 인천, 개성, 안동, 김천 등 네 곳 형무소에서 각 30마리의 면양을 길러 그 성적이 매우 좋고 털의 품질이 좋아 1938년에는 각 기관에 20두를 증가하여 시장의 수요에 대응하였다.7) 경운지는 낙동강 연안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여름철 홍수로 재해를 여러 번 입기도 하였다.8)
1939년 고공(藁工)9)작업 연인원은 1,562명이었으며 수입고는 403円이었다. 고공작업은 볏짚을 이용하여 가마니 짜기, 멍석 짜기. 새끼 등을 만드는 작업으로 해방후 1970년대 초까지 지속되었으나 나일론 등을 이용한 가마니, 노끈 등의 보급으로 사라졌다. 토공(土工)작업의 연인원은 5,901.5(관사업 3,438명, 위탁업 2,463.5명)명이 취업하였고 관사업에 연탄공 40명, 마공 20명이 취업하였다. 위탁업은 혁공 3.1명, 면타부 8.5명, 세공 70명, 이발부 52명이 취업하였다. 혁공은 가죽제품을 만드는 작업으로 1939년 작업수입액은 5,100円이었다. 마공은 삼베로 제품을 만드는 작업을 하였으며 1939년 작업수입액은 42円이었다.
안동지소에서는 매년 형무작업제품 등을 판매하는 바자회를 개최하였다. 연례행사인 안동형무지소의 바자회는 1932년 23일과 24일의 양일간 형무소내 연무장을 제1회장, 사무소를 제2회장으로 하여 개최하면서 진열품도 상당히 풍부하였고 소매물가에 비해 매우 싼 가격이기 때문에 비상한 관심을 불러모았다. 당일에는 각 50관 1인당 1관을 한도로 형무소제 무, 배추 등을 매우 싸게 봉사할 예정이었다.10)
또한 1935년 11월 23일 개최한 안동 신유박애회(출소자보호회)가 주최한 형무소 재감인 제품 바자회 겸 염가판매 상황을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 성적이 매우 양호하여 출품 총점수 1천여점, 판매금총액 6백여원, 입장인원 총수 1,500여명에 달하였다고, 안동형무소 제품판매에 호실적을 올려 판매고 6백여원을 기록하였다.11) 1936년 3월 24일 안동형무지소 내 신유박애회(辛酋博愛會)에서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형무소 앞 연무장에서 형무소제품 바자회를 개최하였다.12)
1908년 전국 감옥에 감옥의(監獄醫)와 약제사를 정원에 배치하였고, 1910년에는 정원확보에 노력하였다. 당시 감옥의 중에는 각 전공에 따라서 감옥위생에 관한 특수연구를 맡거나 설비와 급식개선에 기여하는 감옥의가 많았다. 주요한 예로는 공기의 함유소와 감옥건축, 재감 한국인의 생리적 특성, 구금병의 해결법, 약초재배법 같은 것이 있었다. 당시 민심과 재정상의 이유로 힘들게 한 연구를 쉽게 실행에 옮기기 어려웠다. 그래서 우선 치료와 청결방법의 개선을 도모하는 한편 감옥규율을 진전시키고 모든 동작의 훈련을 철저히 하면서 재감자의 보건위생 향상에 노력하였다. 1923년 이후에는 법무국 행형과에서 감옥위생에 관한 과학적 조사를 실시하고 의화학(醫化學)계의 권위자를 초빙하여 경성과 서대문의 두 형무소의 의무주임에 촉탁하고 재감자의 양식, 채소 및 약초 재배, 영양 지수조사, 의료기구 기계 및 약품의 구비통제에 관한 연구를 하였다. 1925년 감옥의를 보건기사(주임 대우) 및 보건기수(판임 대우)로 개칭하였지만 정원이 적은 형무소와 치과치료의 필요가 있다고 인정되는 재감자를 위해서는 치과의 의무촉탁을 배치하였다. 1937년 10월 현재 안동지소에는 보건기수 1명이 배치되었다. 또한 주요 형무소에는 약제사가 배치되었으며 각각 처우의 향상이 이루어졌다. 주로 많이 걸리는 질병은 감옥 내 열악한 위생 상태로 인한 피부병, 장티푸스, 발진티푸스 등과 조악한 음식 상태로 인한 치질 그리고 신경통, 정신공황 등이었다. 또한 취조과정에서 받았던 고문으로 인한 복막염, 늑막염, 골절 등과 겨울철 동상이 많았다.
아래 표는 1939년부터 1938년까지 안동형무지소 수용자 환자현황을 나타낸 것이다.
1938년 안동지소의 가을 재소자 건강진단 결과는 다음과 같다. 13) 독거수용 한국인 6명의 평균신장은 166cm, 평균체중 59kg, 영양상태 양호 5명, 보통 1명이었으며 모두 정신적으로는 정상이었다. 일본인은 1명의 독거수용자가 있었으며 신장 174cm, 체중 60kg, 영양상태는 양호하였다. 혼거수용 한국인은 모두 190명으로 평균신장은 163cm, 평균체중 56kg, 영양상태는 양호 68명, 약간 양호 52명, 보통 65명, 불량 5명이 있었으며 약간의 정신이상자는 2명이 있었다. 일본인 혼거자는 2명이 있었으며 평균신장 160cm, 평균체중 57kg, 영양상태는 약간 양호 1명, 보통 1명이었다. 소년수는 만 19세가 3명이 있었으며 평균신장 156cm, 평균체중 58.5kg이었다. 18세는 1명이 있었으며 신장은 167cm, 체중은 63.5kg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각 형무소별로 교회사와 교사 등을 배치하여 교육과 교화 등의 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안동지소에는 교회사가 1명이 배치되었다.
교육은 「조선행형교육규정」이 제정되어 수형자 교육에 관한 사항을 정하였다. 교육의 목적은 수형자에게 일상생활에서 필수적인 보통의 지식과 기능을 가르치고 국민도덕의 이해와 실천에 도움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하였다. 20세 미만 수형자 중 형기 6월 이상인 자에게는 교육을 실시하였으며, 연령이 30세 미만 형기 1년 이상 수형자로서 학력이 보통학교 4학년 수업정도에 이르는 자 및 그 밖에 형무소장이 교육의 필요에 있다고 인정되는 자에게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간이보통학과의 수업연도는 2년 4학기로 하고 수신(修身), 국어, 산술 및 조선어 등 4과목을 가르치고 일본인에게는 조선어를 가르치지 아니할 수 있도록 하였다. 보통과의 수업연한은 2년 2학기로 하였으며, 보통학교 제5학년 및 제6학년 정도로 하고 교과서에 따라 수신, 국어, 산술 및 직업의 4과목을 가르쳤다. 보습과의 수업연한은 1년 2학기로 하고 고등소학교 정도로 하여 교과서로 국어, 산술, 지리, 국사 및 직업의 5과목을 가르쳤다.
전국적으로는 1937년 10월중 1일 평균 재감인원 19,602명에 대해 총집교회, 특별집합교회, 개인교회 등의 실시 연인원이 95,112명으로 1인당 4.9회의 교회가 실시되었다. 집합교회는 일요일 또는 공휴일 교회, 식장교회, 관전(棺前) 교회, 특별집합교회, 임방(臨房)교회가 있었다. 개인교회는 입소교회, 은전교회, 가출옥교회, 출소교회, 기일교회, 조상교회, 수상(受償)교회, 징벌교회, 청원교회, 임방교회, 통신교회, 사형자교회, 서신교회, 접견교회, 이감교회 등 16종이 실시되었다.
안동지소는 원 대구형무소 분감이었지만 소년수의 급증에 따라 김천소년형무소의 분감으로 재출발하는 형태를 취하였고, 성인수는 모두 본감으로 이송하였다. 별도로 안동법원지소의 미결수도 구금하였기 때문에 종전 당일 수용인원은 소년수형자 290명, 피의자 소년 30명, 피의자 청년 2명이 있었다. 이 소년피의자는 전원 공립안동농림학교의 생도로서 종전 직전 치안유지법 위반자였다. 수형자의 죄질은 총동원법 위반, 특히 징용법위반이 증가하는 경향에 있었고 그 외에 절도범을 주축으로 폭행·상해 등이 약간 점증하는 추세였다.
구금규모는 본소에 424명, 농장 외박에 120명이었다. 직원 중에는 교회사 이외 직원 중 이미 4명의 전사자가 나왔고 또한 소집 중 6, 7명이 만주 등 전쟁터로 갔기 때문에 직원의 휴식은 제대로 보장되지 아니하였으며 상당히 곤란한 상태였다.
주식물인 곡류의 재고량은 256일분이 있어서 어려움이 없었다. 부식물 중 채소류는 자급하여 여분이 있었기 때문에 주둔하던 부대와 일반 민간에도 나누어 주어 감사를 받을 정도였지만 이에 반해 동물성 단백질이 부족하였다. 한때 신입 소년이 사망하였기 때문에 시중에 좋지 않은 소문이 전해져서 곤혹스러웠지만 일본인 위생부장이 조사한 결과 당초 의사가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시중의 한국인 의사가 라이벌 의식의 비방을 흘렸다는 것으로 판명되어 관계자들이 안도하였다. 그렇더라도 이 일은 신입자의 체질저하가 얼마나 심각하였는가를 증명하는 것으로 쿠라하라(倉原) 지소장은 해남도(海南島)에서 근무하면서 오랫동안 연구를 하였고, 농장에서 각종 동물류를 사육하기 시작하였으나 아직은 식탁에까지는 이르지 아니하여 유감이었다고 탄식하였다. 또한 약품 입수의 어려움에 대한 대책으로는 약초채취반을 편성하여 민간요법까지 시험하는 등 열의가 넘치는 응급책도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고 전해진다.
작업은 대농장(낙동강 반변 44정보)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계절에 따라 신축도 있지만 출역인원은 거의 경운부 80명에서 130명, 지물공 20명에서 30명, 죽세공 20명에서 30명, 양재봉공 10명에서 15명, 관용부 30명에서 40명, 휴역 기타 60명에서 80명이었다. 또한, 취업비와 세입예산의 안배로 세출은 특별작업비(농작, 축산 등) 17,000円, 보통작업비(목공 기타) 8,500円이었으며, 수입은 특별작업 40,000円, 보통작업 15,000円이었다. 농장에 특수한 하나의 풍경으로 명물 양수차가 있었다. 이것은 모리(森) 대구소장이 오사카(大阪)형무소 시찰시 토산품으로 가지고 온 것으로 풍차에 의한 양수탑이다. 그 당시 경상북도 지사는 ‘이것은 조선의 가난한 농민에게 주는 큰 복음이다.’라는 찬사를 보낼 정도였다. 종전시에 이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큰기계에 의한 양수설비에 착수하였다.
교회사는 응소하여 전사하였고, 후임자도 또한 소집되었다고 하는 불운이 이어졌다. 그 사이에 다카시마(高島) 교무주임은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지소장도 또한 자주 교장에 나타나서 시국해설을 하기도 하였다. 교육·교회의 효과는 가출옥자의 증가에 나타는 것이 관계가 있겠지만 우량한 소년은 보국대에 뽑혀졌기 때문에 적격자가 감소하고 있었으며 아쉬움이 많았다.
8월 15일 정오에 일왕(日王) 항복발표 시에는 재소자는 전원 그 자리에서 경청하도록 명령이 있었다. 내근직원은 지소장실에 모여 탄식하였다. 일본계 관리는 깊이 머리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는 자까지 나왔다. 그러나 한국인 사이에는 그와 같은 사람이 눈에 띄지 아니하였다. 매월 15일 저녁이 차를 마시면서 대화하는 날이었지만, 대체하여 전 직원이 무도장에 집합한 가운데 지소장은 다음과 같이 시달하고 일동에게 주의를 환기시켰다.
‘첫째, 항복선언은 내려졌다. 머지않아 한국과 일본은 옷깃을 분리해야 하지만 오늘까지의 협력을 감사한다. 둘째, 여행에 나서는 새는 흔적을 태운다고 하는 속담을 참고로 서로 웃는 얼굴로 이별하자. 언젠가 양국의 왕래가 가능하게 되는 순간에는 웃는 얼굴로 다시 만나자. 셋째, 조선인 여러분들의 앞날에는 새로운 정부의 탄생이라고 하는 희망으로 가득찬 미래가 있다. 그 추진력으로 훌륭한 성적을 올려주기를 바란다. 넷째, 소 내와 농장에 있는 모든 관용재산은 예를 들어 종이 한 장이라고 하더라도 신정부에 인계하여야 한다는 책임감과 의무가 있다는 것을 여기서 발표한다. 다섯째, 차모임이 이별의 모임이 된 것은 서로 예상하지 아니한 것이었다.“여기서 건배사로 여러분들의 건강을 기원한다.”라고 말하고 폐회하였지만 이 결과의 영광은 당시로서 시일과 함께 전 조선에서 제일로 상을 추천받을 만하다.’
다음날 16일 오전 9시, 농장외박 출역자를 교회당에 집합시키고 항복선언을 해설한 후, 모든 사람의 신상에 대해서는 가까운 시일에 어떤 지령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 때까지는 경거망동을 하지 말고 여러 선생님들의 지시에 따라서 작업에 종사하도록 훈시하였다. 재감자는 이미 소문이라도 들어서였던가, 일동은 한마디도 들으려고 하지 아니한 태도를 보였다. 해방지령은 3일째에 도착하였다. 지령은 ‘첫째 일정한 자격, 조건(이에 해당하지 아니하는 자 70명) 아래 즉시 석방하고 이에 적합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중에 다른 지령이 있을 때까지 유치하라. 둘째 사상범은 소재지의 유력자에게 인도하라. 셋째 석방 시 한꺼번에 다수를 해방하여 치안을 어지럽히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라고 하는 것이었다.
당시 해방 실황을 기술하면 석방은 오전과 오후 2회로 하고 한 번의 인원을 15명 내지 20명으로 하였다. 그리고 귀주지의 멀고 가까움, 환승 등의 관계를 감안하여 한사람 당 백미 2.3되, 동전 5円을 지급하고 한국인 직원이 안동역까지 데리고 가는 보호를 하였다. 해방된 소년은 돌아가는 마음이 화살과 같았고, 희색이 만면에 가득하였으며 명랑하였고 이별사를 남기고 떠나갔다. 잔류수감자 74명 중 30명 정도는 소 내에 머무르게 하여 취사, 청소, 농작물 손질 등에 종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 잔류수감자 중 결국 관리 살해, 도주 등의 모의를 시작하는 자가 나왔다. 차석 도도경(都道慶) 간수장은 지소장에게 이야기하고 자신이 책임을 지는 것으로 마음을 정하고 전원을 해방시켰다.
안동형무지소에서 실시된 가장 특색 있는 작업은 낙동강 지류인 반변천 북쪽에 위치한 광대한 농장작업장이 해방 이후까지 수용자의 노동력으로 운영하였다. 당시 농장에 출역한 수용자의 숫자는 100명을 넘었고, 외박작업장이 설치하고 그 곳에서 숙식을 하면서 쌀농사와 그 밖의 야채 등 재배작업에 종사하였다.
본문에서 기술되어 있는 안동형무지소 자료에서도 갑오경장 이후 일제강점기에 걸쳐 의식주, 작업, 교화, 누진처우제도, 가출옥 등 개혁적인 제도가 시행되었으며 현재 교정체계의 근간이 되는 대부분의 제도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또한, 수용자에 대한 의식주와 보건의료는 물론 규율과 질서유지, 작업과 교육 등 다양한 처우는 국가형사사법운영 체제의 구성부분으로 자리잡아갔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안동교도소는 100여년 이상 동안 안동지역에서 중요한 기관으로서 자리 잡으면서 사법체계 상뿐만 아니라 안동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여 왔다. 안동교도소의 역사는 교정의 역사임은 물론, 안동의 역사이자 문화였으며 나아가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교정은 자료를 찾아 정리하고 아카이빙 작업을 통해 우리나라의 중요한 역사이자 문화였던 각 교정기관의 이야기를 시민과 국가중요정책결정권자, 국회의원 등 정치가, 오피니언리더, 연구가들과 공유하는 노력을 지속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