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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 포커스

전근대 한국행형사(3)

글 · 금용명 전 안동교도소장, 교도소연구소 소장

목차
  1. 제1편 상고사(상고시대부터 삼국통일시대까지)
  2. 제2편 중고사(고려시대)
  3. 제3편 근세사(조선시대)
  4. 제4편 근대전기(구한국정부시대)

나. 체형(體刑)
체형이란 범죄인의 신체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자극(刺戟) 또는 상해를 가하거나 또는 그 기능에 장애를 입혀 건강을 해하고, 정신적 및 육체적으로 고통을 느끼도록 하는 보복적 제재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러한 종류에 속하는 형벌에도 형전(刑典)에 정해진 것과 또는 법외의 것이 있는 것은 사형과 마찬가지다. 체형에 대해 형전에 근거를 가지는 것은 자자형(刺字刑), 장형(杖刑) 및 태형(笞刑)이 있다. 그밖의 것은 모두 법외의 형으로 인정되는 것으로 의형(劓刑) 및 월형(刖刑), 단근율(斷筋律) 등의 종류가 있었다. 그 각 형에 대해 상세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자자형(刺字刑)
본 형은 「순전(舜典)」의 소위 묵형(墨刑)으로, 중국으로부터 전해져 오래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형(刑)이다. 「고려형법」에서 ‘도둑질을 범한 자가 유배지로부터 도망한 자는 형결(刑決)로 삽면(鈒面)1)하고, 먼 육지의 주현(州縣)에 유배한다.’라고 한 이후의 일이지만, 독립된 형으로서 명확하게 규정되게 된 것은 「경국원전(經國原典)」 상에 실려진 후이다. 본 형은 일명 ‘묵자지법(墨刺之法)’이라고도 부르고, 범죄에 대한 제재에 해당하는 동시에 장도죄(贓盜罪)의 전과자인 것을 표식하는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
「경국원전(經國原典)」에는 ‘강도로 죽지 않은 자는 율문에 따라 논죄한 뒤에 ‘강도’라는 두 글자를 새기고, 두 번째 죄를 범하면 교형(絞刑)에 처한다. 도둑의 우두머리는 율문에 따라 논죄한 뒤 ‘강도’라는 두 글자를 새기고 국경지방으로 전사사변(全家徙邊)2)하며, 세 번째 죄를 범하면 교형(絞刑)에 처한다.‘라 규정하여 강도와 도둑의 우두머리에 대해서만 적용하였고 절도범에 대해서는 적용이 없었다. 그렇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대명률」에 따라 감수관리(監守官吏) 또는 상인(常人)으로서 관(官)의 창고에서 돈과 곡식을 훔친 자, 남의 것을 억지로 빼앗는 자와 절도를 한 자에게도 적용했다. 즉 감수관리(監守官吏) 또는 상인(常人)으로서 관의 창고에서 돈과 곡식을 훔친 자에게는 우소비박(右小臂膊)3) 상에 ‘도관(盜官) 앙(糧), 전(錢), 물(物)’의 세 글자를 자(刺)하고, 한낮에 남의 것을 억지로 빼앗는 자에게는 초범은 우소비박 상에, 재범은 좌소비박 상에 ‘절도’ 두 글자를 새겼다. 그리고 「대명률」에는 자자(刺字)의 촌법(寸法)으로 ‘글자마다 각각 사방이 1치 5푼이고, 획마다 각각 너비가 1푼 5리이며, 위로는 팔꿈치를 지나지 않고 아래로는 팔뚝을 지나지 않는다.’라는 제한을 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에서도 이에 따르고 있었다. 또한 조선에서는 본형을 하나의 형으로서 보고 있었지만, 모법(母法)인 「대명률」에서는 ‘소정의 형을 과하는 외에 자자(刺字)를 실시한다.’라고 규정하여 이것을 형(刑)으로 인정하지 아니하고, 단지 절도를 범한 자를 표식할 목적에서 부가하는데 지나지 아니한 것 같다. 이 형은 1740년(영조 16년) 5월 신하들로부터 ‘경자(黥刺)의 법은 팔에는 새겨도 그 얼굴에 새기지 아니하고,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제껏 이를 사용하지 아니하고 게다가 형구(刑具)는 법조(法曹)에 있고 등등.’이라고 진언(進言)하고 있어 얼굴에 새긴 사실은 없는 것처럼 말하였지만 고려시대 이후 ‘삽면(鈒面)’이라 하고 얼굴에 새긴 예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진언(進言)을 하고 있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왕은 이 진언에 대해 ‘신체발부(身體髮膚)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으로 그것을 훼손하는 것은 얼굴이나 팔이나 하나하나마다 똑같고 다치게 한 후 개과천선(自新)한다면 선량한 평민(平民)이 되지 못한다.’라고 말한 후 지체 없이 승지(承旨)로 하여금 추조(秋曹)4)에 가서 그 형구를 남김없이 가져오게 하여 불사르고, 또한 각 도(道)에 있는 것은 관찰사(道臣)로 하여금 거두어 모아 불사르도록 하였다고 한다. 1) (역자주) 삽면(鈒面) 얼굴의 살을 따고 홈을 내어 먹물로 죄명을 찍어 넣던 벌.
2) (역자주) 전사사변(全家徙邊) 죄 지은 사람을 가족과 함께 변방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형벌.
3) (역자주) 우소비박(右小臂膊) 오른쪽 작은 팔과 어깨.
4) 형조를 말함.

2) 장형(杖刑) 및 태형(笞刑)
장형(杖刑)과 태형(笞刑)이 처음으로 사용된 것이 언제부터였는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서기 28년(고구려 대무신왕 11년)에 왕은 ‘십악(十惡) 중 율(律)에 비추어 처형해야 할 자 외, 다른 죄를 범하여 중장(重杖)5)에 해당하는 자에 대해서는 일체 속(贖)6)을 거두어 들이라’고 명한 것에 의해, 그 무렵 이미 장형(杖刑)이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고려 시대에 들어와서 「당률(唐律)」에 의하기 이전에도 장형(杖刑)이 존재하였던 것이 『송사(宋史)』 상에도 있으며, 송사에는 ‘고려는 형(刑)에 참혹한 부과가 없고, 다만 악역(惡逆) 및 부모를 욕하는 자를 참(斬)하고 그 나머지는 장벌(杖罰)에 처할 뿐’이라고 기록하고 있었다고 한다.
태형(笞刑)은 그 무렵에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다. 장형(杖刑)과 태형(笞刑)이 형률 상 명확하게 실리게 된 것은 고려의 국운이 왕성할 때 모든 것을 당제(唐制)를 모방하여 만들고, 법률과 제도를 크게 정리한 때부터의 일이다. 「고려형법」에 태형(笞刑)은 10, 20, 30, 40, 50의 다섯 등급으로 장형(杖刑)은 60, 70, 80, 90, 100의 다섯 등급으로 나누었으며, 또한 그 속죄(贖罪)의 방법은 태형(笞刑)에 대해서는 장 6 내지 10 및 속동(贖銅) 한 근 내지 5근으로 한다. 장형은 장 13 내지 20 및 속동(贖銅) 6근 내지 10근의 범위내에서 각 절산(折算)하는 것으로 정하였다. 5) (역자주) 중장(重杖) 몹시 치던 장형.
6) (역자주) 속(贖) 죄에 대한 벌을 과하는 대신 재물이나 노력을 바치는 것.

장형(杖刑) I 사진 출처: 한국학 중앙연구원

그리고 장형(杖刑)과 태형(笞刑)의 구별은 태(笞)는 죄가 가벼운 자에게, 장(杖)은 죄가 무거운 자에게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그 제식과 집행방법을 달리하고 또한 수형자가 받는 고통의 정도에도 차이가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즉 제식은 촌법(寸法)에 크고 작음이 있고, 집행방법은 그 횟수에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장(杖)의 종류에서 척장(脊杖)이 있는 것에서 생각하면 장(杖)을 신체에 가하는 것은 반드시 엉덩이나 다리뿐만 아니라 배부(背部)에도 시행되었고, 그리고 받는 고통도 동일하지 아니하였다. 그로부터 내려와 조선시대에 「대명률」에 의거하게 되고나서부터는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즉 장형(杖刑)만 부과하는 경우도 있지만, 도(徒)·유형(流刑)에 대해서는 반드시 병과하는 주의를 취하고, 척장(脊杖)을 삭제한 점이 달라졌다. 이와 같이 형률의 변천이 있었지만 형정(刑政)의 문란으로 인한 태와 장을 남용하는 폐단은 조금도 개선되지 아니하였고 오히려 점점 더 그 정도를 더해갔다고 한다. 태장형의 폐해에 관해 효종왕 때에 장령(掌令)7) 송시열(宋時烈)이 상소를 하였다. 거기에는 ‘수령이 과실이 있는 때는 결장(決杖)8)하고 본래의 직책으로 다시 임명한 예가 있는데 이것은 사대부에 대해 지나치게 예를 잃은 것입니다. 처음 이 형을 가할 때는 수령(守令)은 마땅히 치욕을 느끼고 돌아왔지만, 지금은 편안하게 부끄러움을 깨닫지 못하게 되었고, 오직 관직을 잃지아니한 것만을 다행으로 기뻐합니다. 무릇 수령에 해당하는 자는 한 고을의 풍속과 교화를 주재하는 자입니다. 그 주재자(主宰者)인 수령의 무치(無恥)9)가 이와 같이 되기에 이른 것은 백성을 인도하는데 욕(汚)되는 것과 거의 다르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이 폐제(幣制)를 혁파(革罷)한다는 것은 시대의 폐습이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데에 급한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1673년(현종 14년)에 광주(廣州) 부윤(府尹) 이세화(李世華)가 검전(檢田)에 잘못이 있었던 것에 대해 결장(決杖)의 명이 있었을 때, 판의금(判義禁)의 김수항(金壽恒)이 왕에게 ‘장형(杖刑)을 사대부에게 가하는 것은 한낱 노예로서 대우하는 것으로 택하는 바가 아닙니다. 원래 선비는 마땅히 죽여야 할지언정 치욕을 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이세화의 죄는 용서하기 어려운 것이 있더라도 태장(笞杖)을 몸에 가한는 것은 그만두고, 다른 형으로 대신하도록 해 주시옵소서.’라고 상소한 바, 왕은 크게 이를 살펴 따랐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일는 더 있었지만 사대부에 대해서만 태형(笞刑)과 장형(杖刑)을 폐지하는 데에 이르지는 않았다. 아울러 그 후 관리 즉 양반에 대해 태형(笞刑)과 장형(杖刑)을 가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 때에는 그 명예를 중히 여겨 서민에 대한 것처럼 엉덩이에 향해 시행하지 아니하고 초달(楚撻)10)이라 하여 나무의 작은 가지로 양다리의 앞 정강이를 때리고 그것으로 끝내는 것으로 하였다. 그것이 나중에는 대리인(代人)으로 집노비를 보내 태형(笞刑)을 받도록 하게 되었고 결국 이것에 예가 되어 나중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사대부에 대해서는 이와 같이 관대하게 하게 되었지만 일반인에 대해서는 남용의 폐해가 점차 심해졌고, 그결과는 형구의 형태와 모양 및 사용방법에도 법식에서 멀어진 것이 생겨나 족장(足杖) 또는 원장(圓杖)이라고 불리는 법외의 형구도 공공연히 행해졌다. 또한 군율로 처단하는 자에게만 한정되어 있는 곤봉을 보통 범인에게 남용하는 등의 사실도 있었기 때문에 숙종왕은 하교하여 ‘조종(祖宗)이 정한 법에는 형장(刑杖), 신장(訊杖), 태장의 제(制)는 각 대소경중(大小輕重)의 구별이 없는 것이 없다. 그런데 여러 차례 병란(兵亂)을 겪어 법제가 추락하여 문란하고, 구차하게도 관위(官威)가 있는 자는 제멋대로 남용하며 형장으로 노여움을 푸는 도구로 하기 위해 애써 그 장(杖)을 크게 하게 되었다. (중략) 따라서 이후 태장(笞杖)을 사용하는 데는 각 법식을 준수하고 남(濫)으로 흘러서는 안 된다. 또한 군율로 처단하는 이외에 자에게 곤(棍)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어서는 안 된다.’라고 엄명하였다. 이와 같이 형구가 통일되지 않았기 때문에 영조왕은 장혈(杖穴)을 주(鑄)11)하여 각 도(道)에 반포하여 형구의 통일을 도모하고, 또한 제사(諸司)에 명하여 법외 형구의 사용을 엄금하였다. 또 이어서 정조는 『흠휼전칙(欽恤典則)』을 제정하고 태형과 장형을 바로잡았지만 남형의 폐단은 여전히 고쳐지지 아니하였다. 순조왕 때 정약용이 당시의 탐관오리(貪官汚吏)를 경책(警策)하기 위해 저술한 『목민심서(牧民心書)』 중에서 장형(杖刑)의 집행에 관한 한마디에 ‘기질이 거친 지방관은 수인(囚人)을 장곤(杖棍)할 때마다 어찌하여 힘을 주어 치지 아니하는가라고 하고, 뒤쪽에서 집장(執杖)하는 졸을 때려 집장하던 졸이 졸도하여 죽은 사람까지 있었다고 한다.…’라고 쓰여있는 것을 보더라도 당시 행형의 상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또 고종왕 때 제정된 『대전회통』 중에서 ‘‘군무(軍務) 외에 곤장을 사용한 자, 수령으로서 둥근 곤장을 사용한 자, 개인 집에서 형벌을 시행한 자는 남형율(濫刑律)로 논한다.’, ‘하루에 곤장은 100대를 넘지 않게 한다.’ 등의 규정을 마련한 것과 같은 것도 역시 당시 행형의 반면(反面)을 말한다. 7) (역자주) 장령(掌令) 사헌부의 정사품 벼슬.
8) (역자주) 결장(決杖) 죄인에게 곤장을 치는 형벌을 집행하던 일.
9) (역자주) 무치(無恥) 부끄러움이 없음.
10) (역자주) 초달(楚撻)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림.
11) (역자주) 주(鑄) 쇠를 부어 만듦.

3) 의형(劓刑) 및 월형(刖刑)
본 형은 범인의 코를 베고, 발을 자르는 형이다. 본 형도 중국으로부터 수입된 형으로 고대부터 행해져 왔던 것이지만, 형전(刑典)에는 실려있지 아니하는 법외 형의 일종이다. 실제로는 본 형을 사용한 적이 있었는지 여부는 전혀 불명확하고, 집행방법도 알 수 없다. 세조왕 때 본 형은 참혹(慘酷)하기 비할 데 없는 악형(惡刑)이라고 하여 1444년에 이를 엄금했다고 하는 것만이 역사상에 전해지고 있다.

4) 단근율(斷筋律)
본 형은 범인 손의 힘줄을 자르는 형이다. 본 형도 법외의 형으로 한때 도범(盜犯)이 떼지어 나왔을 때, 이를 방지하는 목적으로 생각해 낸 것이었지만, 1510년(중종 5년)에 왕은 가까운 신하에게 단근(斷筋)의 율(律)의 가부에 대해 묻자, 김수동(金壽童)이 이에 대해 말하기를 ‘단근(斷筋)은 곧 육형(肉刑)으로 이전에 도적이 흥행하였기 때문에 이를 사용한 것은 일시의 폐단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따라서 오래 법으로 두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하자 이에 왕은 조속히 명하여 이를 폐했다고 한다.

5) 그 밖의 남형
법외의 형으로 언제부터라고 할 것 없이 행해져 온 형에는 아래 기록과 같은 잔혹한 형이 있었다. 즉, (1) 곤장의 모서리로 사람의 정강이 뼈, 혹은 발꿈치를 치거나 또는 사람을 형판(刑板)에 묶고 곤장의 양 끝으로 엉덩이 피부를 마찰하는 벗기는 형, (2) 화약심지로 발가락에 끼우고 불을 태우는 형, (3) 결박하여 거꾸로 매달고 잿물을 콧구멍에 붓는 형, (4) 사람의 정강이를 거핵기(去核機)에 넣고 미는 데에 보라목(甫羅木)으로 하거나 또는 줄(繩)로 양발의 엄지발가락을 꼼짝 못하게 바싹 얽어매고, 이에 좁게 삼릉목(三稜木)으로 하여 거꾸로 매달고 그 줄을 때리는 형 등이다. 이러한 형은 어느 것이나 참독(慘毒)이 심하였기 때문에 1740년(영조 16년)에 엄명하여 시행을 금지하였다.

다. 유형(流刑)
유형제도 기원에 대해서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백제 형률 중에 도둑은 유형에 처하는 법문(法文)이 있었던 것과 또 신라 504년(지증왕 5년)과 520년(법흥왕 7년)에 율령(律令)을 반포한 적이 있었으며, 그 무렵 이미 구족(九族)을 옮기거나 혹은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는 형이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이 역사상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 신라 668년(문무왕 8년) 고구려의 천남건(泉男建)을 잡아 검주(黔州)로 유배한 사실, 그보다 멀리 내려와서이지만 신라 828년(흥덕왕 3년)에 막산주(漠山州) 표현(瓢縣)의 도리를 어지럽히는 요사한 사람이 많은 사람들을 유혹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자를 먼 섬에 거처하게 했던 사실이 있었던 일 등에 의해 보면 삼국시대에는 이미 유형(流刑)이 시행되고 있었던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모든 일을 당제(唐制)를 모방하게 되고나서는 「고려형법」에도 오형제(五刑制)를 채용하여 유형(流刑)을 그 하나로 정하고 2,000리, 2,500리, 3,000리의 세 등급을 두었으며, 역시 다른 형과 마찬가지로 수속(收贖)을 허용하는 제도를 정하였다. 즉 유(流) 2,000리는 장(杖) 17, 배역(配役) 1년, 속(贖) 동(銅) 80근(斤), 유(流) 2,500리는 장杖) 18, 배역(配役) 1년, 속(贖) 동(銅) 90근, 유(流) 3,000리는 장(杖) 20 배역(配役) 1년, 동(銅) 100근으로 각각 대신할 수 있는 것으로 하였다.
그리고 유형(流刑)은 따로 죄질을 한정하지 아니하고 모든 범죄에 대해서 적용되었다. 다만, 도형(徒刑)을 과하는 것이 너무 가볍고 또한 사형으로 하는 것은 무거움이 지나치기 때문에 중간형을 필요로 하는 죄상(罪狀)의 자에 대해서만 이를 과하였다. 그리고 적용하는 개개의 경우에 대해서는 모두 형률에 명확하게 정해져 있었다. 예를 들면 고려형법 중 대악조(大惡條) 제5에 ‘형의 아내 및 남편의 동생을 때린 것이 손과 발인 때는 장(杖) 70, 사지(四肢)와 머리털 이상인 때는 장(杖) 90, 다른 물건을 상하게 한 때는 도(徒) 1년, 치아 1개가 부러졌을 때는 도(徒) 1년 반, 2개 이상인 때는 도(徒) 2년, 손근(損筋) 이상인 때는 도(徒) 2년 반, 절지(折枝) 이상인 때는 유(流) 2,000리, 2개 사건 이상인 때는 유(流) 3,000리, 죽음에 이르렀을 때는 교(絞)한다. 등등’과 같은 규정이 있었다. 또한 그 금령조(禁令條) 제4에 ‘사사로이 저울을 만들어 시중에서 사용하여 증감이 있을 경우 1척(尺)이면 장(杖) 60, 1필(匹)이면 장(杖) 70, 2필(匹)이면 장(杖) 80, 3필(匹)이면 장(杖) 90, 4필(匹)이면 장(杖) 100, 5필(匹)이면 도(徒) 1년, 10필(匹)이면 도(徒) 1년 반, 15필(匹)이면 도(徒) 2년, 20필(匹)이면 도(徒) 2년 반, 25필(匹)이면 도(徒) 3년, 30필(匹)이면 유(流) 2,000리, 35필(匹)이면 유(流) 2,500리, 40필(匹)이면 유(流) 3,000리’로 규정하고 있는 것처럼, 죄질 여하를 불문하고 일반적인 범죄에 대해 그 피해 정도에 의한 무겁과 가벼움에 따라 과하였다.
또한 유배하는 장소에 대해서는 미리 정해진 장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왕도(王都)를 기점으로 하여 거리를 계산하고 그 멀고 가까움, 춥고 더움, 교통의 편함과 불편함 등을 고려하고 이를 죄상(罪狀), 그 밖의 관계를 고려하여 유배지를 지정하였다.
유형(流刑)의 기원은 기원전 중국에서 형벌의 유면(宥免)12)으로 사용된 것으로, 즉 사형을 집행(刑殺)해야 하나 용서하고 이를 멀리 보내는 경우가 있었다. 요컨대 왕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으로 옮기는 것을 유(流)라고 일컬었다. 북제(北齊)시대 이후 유(流)를 오형의 일종으로 하고 나서도, 유(流)에 대한 관념은 옛날과 변함이 없었다. 조선에서도 역시 이와 같았고, 고려형법상 형벌로 정해지기고 나서도 유(流)는 왕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으로 추방하는 뜻 이외에는 없었다. 따라서 유배지에 해당하는 장소는 반드시 섬지방에 한정하지 않고, 유지도 편비(偏鄙)의 지방은 모두 유배지로 하였던 것 같다. 고려형법 도적조(盜賊條) 제5에 ‘도둑질 한 자가 귀양지에서 도망하는 자는 형결(刑決)로 삽면(鈒面)하여 먼 육지 주현(州縣)으로 유배한다’. 라 하고, 또한 제6에는 ‘모든 투화인(投化人)13)의 도둑질 한자는 남쪽의 수로(水路)에 유배하고 주현(州縣)으로 오가지 못한다’. 라는 규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면, 유(流)에는 바다와 육지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섬에 유배하는 경우에는 무인도(無人島)에 유배하는 것과, 유인도(有人島)에 유배하는 구별이 있었다. 이것은 1034년(고려 덕종 3년) 하교 중에 ‘집주인을 때리거나 모살인(謀殺人), 강도한 자는 장(杖)과 유(流) 무인도로 한다. 종범인 강도상인(强盜傷人)은 장(杖)으로 하고 유(流) 유인도로 한다. 이하 죄를 숨기는 자는 유인도로 한다’. 라고 한 것에 따른 것으로 죄가 중한 자를 무인도에 유배한 취지에서 나온 것이다.
유형제도는 조선시대에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명나라 제도에 의한 것으로 개정되었지만, 고려형법에 정해진 것과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그 후 여러 번 형전(刑典)이 개정되었으나 「대명률」이 규정하는 바, 즉 유(流)는 2,000리 장(杖) 100, 2,500리 장(杖) 100, 3,000리 장(杖) 100의 세 종류로 ‘유(流)는 사람이 중죄를 지었으나 차마 형살(刑殺)할 수 없어서 먼 지방으로 떠나보내 한평생을 마칠 때까지 돌아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으로 2,000리부터 3,000리까지 모두 3등급이며, 500리마다 1등급을 더한다.’를 원칙으로 한 점에서는 어떠한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다. 또한 정조왕 때 오형도(五刑圖)를 반포하고 오형의 내용을 명확하게 했을 때에도 변화는 없었지만, 1894년에 이르러 유형(流刑)의 등급을 나눔과 가감(加減)의 예를 제정한 결과, 비로소 유형제도의 큰 변화를 가져왔다.
즉 유형은 유배지까지 거리의 원근에 따라 그 경중을 나누었던 바, 오래전부터의 법식을 형기제(刑期制)로 개정하여, 유배기간의 길고 짧음에 따라 경중을 나누었다. 즉 유형을 1등 유(流) 종신, 2등 유(流) 15년, 3등 유(流) 10년의 세 종류로 하고, 종래 유형수에 대해서는 유(流) 3,000리인 자는 유(流) 종신, 2,500리인 자는 유(流) 15년, 2,000리인 자는 유(流) 10년으로 각각 이를 변경하였다.
유형의 이정제(里程制)를 기간제로 변경한 것은 원래 이정제는 무기한이었고, 은사(恩赦)나 양이(量移)라도 시행하지 않는 한은 영구히 귀환의 기약도 없이, 결국 유배지에서 죽어야 하는 것을 불쌍히 여기게 된 것도 있었지만, 주로 이정제는 거리 계산에 불편이 있어 사실상 유명무실하였기 때문이었다. 예로부터 유형(流刑)을 언도한 경우에 ‘유 몇 천리’로 지정한 적은 한번도 없었고, ‘모 지방에 유배한다.’라고 하는 것같이 직접 유배할 지명을 정하였다. 율령(律令) 상 유(流)를 2,000리 내지 3,000리로 정한 것은, 중국 제도를 그대로 조선으로 옮겨 온 것으로, 영역이 좁은 조선에서는 실행하기 어려움은 알고 있었다. 더욱이 조선의 1,000리는 일본의 약 100리 정도에 해당하는 것으로, 원래 3,000리라 일컫는 것도 300리이기 때문에 국경(國境)에 유배하는 경우 절대로 실행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실행 상 불편과 곤란이 있었음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만약 이정(里程) 대로 집행해야 하는 경우에는 각 지방을 크게 우회(迂回)하고 경유한 각 지방 사이의 거리를 합하여 이를 정하였다. 즉 왕도에서 순로(順路)를 거쳐 유배지에까지 쭉 곧은 거리가 아니라, 구불구불 우회하여 보행한 것을 모아서 산정한 거리이다. 이와 같은 불합리를 고치게 한 것도 개정의 한 이유였다.
그리고 또 유형은 예로부터 죄질(罪質)에 관계하지 않았지만, 유형의 등급 나눔과 가감례와 동시에 제정된 「징역처단례」에서는 유형은 국사(國事)에 관한 범죄에 대해서만 적용되는 것으로 하고, 국사범(國事犯)14) 이외의 범죄에 대해서는 징역형에 처하는 것으로 개정하였다.
그 후 1896년에 이르러 제정된 「형률명례」에 의해 다시 형명(刑名)이 아주 달라졌지만 유형(流刑)에 대해서는 변경이 없었다. 다만, 형의 범위를 현저하게 확장하여 종신, 15년, 10년, 7년, 5년, 3년, 2년 반, 2년, 1년 반, 1년의 10등급으로 나누었다.
유형(流刑)을 일컬음에 옛날부터 역사상의 공문서에 ‘배(配)’, ‘적(謫)’, ‘찬(竄)’, ‘방(放)’, ‘천(遷)’, ‘사(徙)’ 등의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각 문자에는 특별한 의의(意義)를 가지고 있고, 또한 가려 씀에 따라 어떠한 구별이 있는 것처럼도 생각된다. 예를 들면, 조선 태조 즉위 때의 교문(敎文)에 ‘우현보(禹玄寶), 이색(李穡), 설장수(偰長壽) 등은 직첩(職貼)을 거두어 폐하고 서인(庶人)으로 하여 해상에 사(徙)하여 종신 멀리하도록 하고, 우홍수(禹洪壽), 강준백(姜俊佰), 이종인(李宗仁), 이종학(李鍾學) 등은 직첩(職貼)을 거두고 결장(決杖) 100,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유(流)하며, 이종선(李鍾善), 유향(柳珦), 이첨(李詹) 등은 직첩(職貼)을 거두고 결장(決杖) 70, 하방으로 유(流)하고, 모모 등은 직첩(職貼)을 거두고 하방에 방치(放置)하며, 성석린(成石璘) 등은 각자의 본향에 안치(安置)하라.’라고 하였다.
또한 근년(近年)의 예이지만 고종 당시의 『일성록(日省錄)』 중에 ‘죄인 김윤식(金允植)의 탕서(蕩敍) 안치(安置)를 명한다. 죄인 이용원(李容元)은 배(配)한다. 죄인 권봉희(權鳳熙), 안효(安孝), 여규형(呂圭亨) 등은 방(放)한다.’라고 한 것처럼 어떤 자에 대해서는 사(徙)라고 하고 어떤 자에게는 유(流)라 하며, 또 어떤 자에게는 배(配)라 하거나 또는 방(放)이라고 하여 가려 씀을 하고 있는 바로부터 보면 혹은 신분에 따라, 혹은 장소에 따라, 혹은 형벌에 해당하는 경우와 행정상의 처분에 해당하는 경우와의 구별에 따라, 이러한 가려 씀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라고도 생각된다. 그렇지만 형률 상에는 유(流)라고 일컬었을 뿐으로 어떠한 구별을 인정하고 있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어느 것이나 넓은 의미의 유(流)로 이해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유형 처분의 근거가 되는 원인과 이유에 대해 형사제재로 처분되는 자에게는 형률(刑律)에 의거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형률에 의하지 않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예를 들면, 행정처분으로 나온 경우, 국왕의 기휘(忌諱)15)에 부딪쳐 배척되거나 또는 당시 권세자(權勢者)의 전제(專制)에 희생이 되거나, 혹은 정쟁(政爭)에 패하여 순응한 경우 등과 같은 것으로 범죄에 대한 제재로서 과해진 것이 아니지만, 이들을 총칭하여 똑같이 유배자 또는 유형인이라고 하였다.
유형집행 방법에 대해서는 앞에서 기술한 것과 같이 육지에 유배하는 경우와 섬지방에 유배하는 경우가 있고, 또한 섬지방에 대해서도 유인도에 유배하는 경우와 무인도에 유배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 밖에 안치(安置), 위리안치(圍籬安置), 충군(充軍)이라 일컫는 방법이 있다.
보통은 유배지에 보내진 채 그곳에 방치되었으며 특별히 일정한 장소에 구속하도록 하는 일은 없었지만, ‘안치(安置)’라 불리는 것은 유배지에서 다시 장소를 지정하고 그곳에 유거(幽居)하도록 하는 것으로 소위 폐문(閉門)이다. 그리고 이 안치(安置)에 처해진 자는 왕족 또는 고위 고관인 자에 한정되었으므로 서인(庶人)은 물론 지위가 높지 않은 관리에게는 시행되지 않았다. 안치 처분은 많은 경우는 유배지에서 하지만 죄가 무거운 자는 ‘절도안치(絶島安置)’에 처하고, 가벼운 자는 ‘본향안치(本鄕安置)’에 처하였다. ‘절도안치’는 새도 다니지 않는 절해(絶海)의 외로운 섬으로 하고, 독사독충 등이 서식하는 장소에 안치하는 것이다. 「속대전」 중에 ‘절도(絶島)로 하고 간수 없는 곳 및 강화부(江華府)에는 죄인을 유배해서는 안되거나 또는 흑산도(黑山島) 등 극악의 지방에는 왕의 특교가 있는 경우 외에는 정배(定配)해서는 아니된다.’라고 하는 제한이 있는 것은 최악의 절도(絶島)라 일컬어지고 있는 흑산도와 같은 장소에는 함부로 유배시키지 않도록 한다는 왕의 뜻에서 이러한 제한을 마련한 것일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마음대로 절도(絶島)에 유배 처분을 시행한 경우도 어느 정도는 있었던 것같다. 1676년(숙종 2년) 하교에 ‘지난번에 대신(大臣) 이선행(李善行)은 좋은 땅에 골라 보낸다고 말하기에 내가 그 말을 좋게 여겨 그에 따른 것이다. 무릇 죄인을 귀양보내는 것은 바로 살리려는 뜻이다. 그런데 근래에 의금부에서 유배지를 좋아함과 미워함에 전적으로 맡기니 매우 한심하다. 이제부터 이후로는 특별한 전교 외에 만약 나쁜 곳을 골라 보내면 의금부 당상관은 반좌율(反坐律)16)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임금의 뜻을 받들어 시행하라.’라고 하는 것에 의해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또한 ‘본향안치(本鄕安置)’라 일컫는 것은 본인이 거주하는 고향에 가두어 두는 것으로 두 종류가 있었다. 처음부터 본향안치(本鄕安置)에 처하는 경우와 일차 섬 지방에 유배시켰다가 탕척(蕩滌)17)에 따라 유배를 풀고 본향으로 귀환시켜 그 곳에서 안치에 처하게 하는 경우이다. 즉 순수한 ‘유(流)’는 아니지만, 유(流)에 준하는 경우이다.
전기의 조선 태조의 교문 중에는 ‘성석린(成石璘)은 본향에 안치하도록 하라.’라고 한 것은 즉 전자에 해당하고 1894년(고종 갑오년) 김윤식(金允植)에게 명한 탕서안치(湯敍安置)는 후자에 해당하는 경우이다. 또한 본향안치와 비슷하여 그러한 결과가 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구한말 참정대신(參政大臣)인 한규설(韓圭卨)이 을미정변(乙未政變) 때문에 관이 해직되어 3년의 유(流)에 처해졌지만, 특별히 왕명에 의해 먼 섬으로 배적(配謫)하지 않고 자신의 집에 있도록 하였다.
그래서 자택에서 유형(流刑)으로 복역하고 그 동안 근신유거(勤愼幽居)하고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 일컬었던 적이 있었다. ‘위리안치(圍籬安置)’는 안치 중에서 가장 무거운 것으로 즉 유배지에서 일정한 위장(圍障)을 설치하고 그 안에 유폐하였다. 위리안치는 일명 ‘가극안치(加棘安置)’라고도 일컬었다. 그것은 가시가 있는 탱자나무를 주위에 심어서 울타리로 하고, 그 안에 유폐하였기 때문이다. 탱자나무는 전라도에서 생산되기 때문에 ‘위리안치(圍籬安置)’는 전라도 섬 지방에서 많이 시행되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조선 경종왕 때 소위 임인(壬寅)의 화(禍)18)로 인해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을 거제도로, 영부사(領府事) 이이명(李頤命)을 남해로, 판부사(判府事) 조태주(趙泰朱)를 진도로 각 유배하고, 다시 삼사(三司)에서 절도에 안치시킬 것을 청하자 왕은 이에 따라 거듭 명하여 위리(圍籬)하도록 하였다.
또한 ‘충군(充軍)’이라 일컫는 것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국경지방에 유배하고 그 변방을 수비하는 군(軍)으로 보내는 것이다. 그 밖에 유형의 일종으로 ‘천사(遷徙)’라 일컫는 것이 있다. 「대명률」에 정해진 바에 의한 것으로 고향마을을 떠나 천리 밖으로 옮기는 자로 소위 나라를 바꾸는 것이다. 즉 유형은 2,000리 이상이지만, ‘천사(遷徙)’는 1,000리 밖에 두는 것이다. 또한 법제 상에는 없는 형벌이지만, 유형과 비슷한 처분이 있다. 그것은 ‘이향(移鄕)’19) 또는 ‘방축전리(放逐田里)’20)라 일컫는 것으로, 즉 거주를 전리(田里)로 옮기게 하고 거주지 또는 왕도로 들어가는 것을 금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1545년(인종 원년) 청주인(淸州人)으로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살인을 한 자가 있었는데, 이 자에 대해 사리(事理)에 용서해야 할 점이 있어서 섬으로 유배하는 것을 제외하고, 다만 ‘이향(移鄕)’에 처하라고 명한 적이 있었다. 또한 1565년(명종 20년) 윤원형(尹元衡)의 벼슬(爵)을 빼앗고 고향마을로 쫓아낸 일이 있었다. 이것이 곧 ‘이향(移鄕)’ 또는 ‘방축전리(放逐田里)’이다.
그 밖에 범인인 당사자에게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범인 가족에 대한 형으로 유형(流刑)과 비슷한 형이 있다. 전가사변율(全家徙邊律)이라고 일컫는 것이 그것으로 즉 범죄인의 전 가족을 변방으로 옮기는 것이다. 본 율은 1744년(영조 20년) 하교에서 ‘한 사람의 죄로 인하여 전 가족에게 미치는 것은 결코 삼대법(三代法)을 세운 본뜻이 아니기 때문에 마땅히 혁파해야 한다.’라고 명하여 폐지하였기 때문에 그 이후에는 본 율에 의한 처분은 없어졌다고 한다.
원래는 유형(流刑)의 경중(輕重)은 거리의 멀고 가까움에 의해서만 정해진 것으로 기간에는 제한이 없었다. 말하자면 완전히 무기한이었다. 그러므로 은전의 혜택을 입든지 또는 ‘양이(量移)’21)에 의해 감형되어 귀환하는 것 외에는 영구히 유배지에 있고 그곳에서 일생을 마쳐야 했지만, 옛날에는 빈번하게 사유(赦宥)22)를 시행하거나 그 밖에 오히려 ‘양이(量移)’를 시행한 적도 있었기 때문에 대체로 귀환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양이(量移)’라고 하는 것은 유배인이 다수가 된 경우에 이를 정리하는 의미에서 감형(減刑)을 실시하여 귀환하도록 한 것이다. 양이(量移)를 실시했던 것은 역사상에는 그다지 보이지 않으며, 다만 1207년(고려 희종 3년) 최충헌(崔忠獻)의 상소에 따라 각 도 유배인을 양이(量移)하였고 그로 인해 방면된 자가 거의 300명에 달하였다고 하는 것이 보여지고 있을 뿐이지만 실제로는 가끔 시행된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유배자 중 사면도 되지 않고 또한 양이(量移)에도 맡길 수 없는 불행한 사람들은 유배지에서 일생을 마치고 자손은 결국 섬 주민이 되어버려 유형자의 자손이 매우 많이 있었던 것 같다. 어떤 섬과 같은 곳은 그곳 섬사람 거의 전부가 유형수의 자손이라고도 일컬어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미 고려시대에 성종왕 때 최승로(崔承老)가 기록한 「시무28조(時務28條)」 중에도 ‘여러 섬의 거주민은 선대의 죄로 인해 바다 가운데에서 나서 자라고 생계가 매우 어렵다. 등등’이라고 유형자 자손이 섬 지방에서 어렵게 살고 있는 것에 대해 동정을 기울이는 문언이 있다. 이와 같은 사정과 상태(情態)는 어느 시대에서도 항상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유형수는 각 유배지로 보내 도착한 후에는 어떻게 하였을까라고 하는 데, 때로는 나라를 위해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한 적도 있었다. 즉 1284년(고려 충렬왕 10년) 왜구를 막기 위해, 여러 도(道)에 대해 유형수로 하여 배를 타고 왜구를 사로잡아오는 사람에게는 죄를 사하여 준다는 취지를 발령한 적이 있었다. 이는원종왕 때, 일본 정벌에서 원(元)나라 군(軍)이 패하였기 때문에 원나라 세조는 고려에 명하여 전함을 수리하도록 하거나 또는 죄인으로 하여 해전을 익히게 하였으며, 고려왕으로 하여 이를 살피도록 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에 만들어 낸 것이지만 좋은 방법으로 유형수의 이용에 대해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 후에는 유배지에 내버려진 채, 마음대로 보내놓고 그 보살핌은 섬 주민 또는 유배지 백성들이 이를 하도록 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예로부터의 인습이었기 때문에 섬 주민에게 거의 의무로서 과하여져 있었고, 특별한 뜻도 들어있지 않았다. 유형수 중에는 하는 일 없이 거저 놀고먹으며, 한가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자도 있었으며, 농업이나 어업에 종사하여 자활하는 사람도 있고, 또 섬사람의 자제에게 교육을 실시하여 섬주민의 존경과 믿음을 받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또한 귀양살이(謫居) 중에 수양(修養)과 학문에 힘써, 한층 인물을 가꾸어 위대함을 더한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면 명종왕 때 윤원형(尹元衡)의 옥에 당하여 바른말을 하여 관직을 박탈당하고 사(死)에서 1등급을 감하여 진도에 유배된 노소재(盧蘇齋)와 같은 사람은 귀양 중에 있었던 것은 실제로 앞뒤 19년, 그동안 책을 저술하고 불교이론을 연구하였으며, 이로 인해 유명해지기에 이르렀다. 또한 최근의 예로는 구한말 진도에 유배된 정만조(鄭萬朝)는 유배지에서 송오(松塢)라고 하는 유학자를 따라서 배웠고, 사면으로 다시 귀환하고 나서는 조선의 이름난 유학자로서 최고봉에 선 인물이 되었다. 이러한 것은 그 한 예이다.
유형(流刑)은 은전을 받지 않는 한은, 언젠가 되면 자기 집이 있는 고향으로 귀환할 수 있을지는 예측도 하기 어려워 장래에 대한 희망도 없고, 또 일상의 의식주에 대한 극단의 부자유가 견딜 수 없었으며 작은 위안도 없이 날이 저무는 것은 대단한 고통이었다. 그래서 유형(流刑)에 대해서는 특별히 동정을 기울여 여러가지 특례를 마련하였다.
944년(고려 혜종 원년)에 유배자 중 70세 이상의 부모가 있는 자가 있는 경우에는 일시 섬지방으로 유배보내는 것을 중지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효양(孝養)을 다하도록 하기 위해 남아서 머무는 것을 허락하는 제도를 만들었다.23) 또한 유배자에 대해서는 가족이 따라가는 것을 허락하는 길도 열었지만, 1376년(신우 2년)에는 ‘각 주(州)의 유배인은 처자와 남북 거실을 달리하여 어찌 원망이 없을 수 없을까, 마땅히 경중을 가려 용서해야 할 자는 석방하고, 용서할 수 없는 자는 편의에 따라 양이(量移)하거나 보내어 처자와 동거하도록 하라.’라고 하교하였고, 또한 1790년(조선 정조 14년)에도 거듭 ‘유인(流人)의 아내 또는 첩이 따라가기를 원하는 때는 이를 허락하라.’라는 영을 내렸다. 그 밖에도 사대부로서 변방에 귀양 가 있는 자에게는 규정으로 의복과 식사를 지급한 적도 있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유형자의 사정을 살피고 동정(同情)을 한 결과로 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유형자에 대하여 노친을 부양하기 위해 잔류를 허락하는 제도에 대하여 「대전회통」은 다시 유형의 독신 부모가 70을 채워서 유배된 경우와 유배 후 70세에 이르렀을 때는 교지를 내려 1일 1양(兩) 4전의 비율로 속전(贖錢)을 거두고 귀환하는 것을 허락하는 제도도 만들었다.
죄수를 유배지로 보내는 때는 정이품(正二品) 이상인 자일 때는 도사(都事), 그 밖의 자에 대해서는 당상서리(堂上書吏), 당하나장(堂下羅將), 본조(本曹) 죄인으로서 도배(徒配) 이상은 경역자(京驛子)가 각 이를 압거(押去)하여, 차례로 유배지에 인계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귀양살이하는 곳으로 보냈지만 사대부 등의 신분을 가지고 정변(政變) 때문에 유배되는 자 가운데 생존시켜 두어서는 뒷날에 있을 재난을 빚을 우려가 있다고 생각되는 자 또는 죄상이 무거운 자와 같은 경우는 교지를 받은 호송관리가 유배지에 도착 전 도중에 독물을 주거나 또는 물에 빠뜨리는 방법으로 죽이고 말았다. 이러한 방법은 옛날부터 오랫동안 시행되어 온 관례이고, 이로 인해 중요하고 능력이 있어 쓸모가 있는 인물이 얼마나 잃어버렸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유형(流刑)에 처해진 자의 이름은 모두 형조(刑曹) 장부에 등기해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고, 「속대전」 중에 ‘무릇 유(流)로서 안치(安置)에 붙여진 자는 형조(刑曹)의 장부에 등록하고 다른 사(司) 및 지방관에 의해 유배된 죄인에 대해서는 이를 형조에 보고하게 하여 장부에 등록하며, 빙고(憑考)24), 검거(檢擧)에 갖추어 경성(京城)의 죄인으로 유배지에 도착한 자가 있는 때는 해당 도의 관찰사는 인명(人名)과 유배지 도착 일시를 형조에 보고해야 한다.’라는 규정이 만들어졌고 형조는 이에 따라 각지의 유배인을 정리하였다.
옛날부터 유배를 시행하여 온 장소는 오랫 동안의 일로 육지라고 이르지 않고, 장차 섬지방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며 대부분 전국 각지에 미치어 있었던 것 같다. 그중 가장 많았던 지방은 변방에 유배된 경우 온성(穩城), 종성(種城), 삼수(三水), 갑산(甲山), 강계(江界) 등과 같은 함경남북도와 평안북도의 국경선이 많았고, 섬지방에 유배한 경우는 간간이 황해의 백령도에 보내진 적도 있었지만 조선의 남쪽 연안 섬지방이 가장 많았다. 또 육지라 하더라도 남쪽이 가장 많았고 이에 이어서는 경기및 강원이였다. 충청남북도, 황해도, 평안남도는 매우 드물었던 것 같다. 이와 같이 유배장소는 예로부터 육지와 바다 어느 곳으로 정하여도 마음대로였다. 12) (역자주) 잘못을 용서하고 풀어줌.
13) (역자주) 덕화를 사모하여 투항한 사람.
14) (역자주) 국사범(國事犯) 정치범.
15) (역자주) 기휘(忌諱) 꺼리어 싫어함.
16) (역자주) 반좌율(反坐律):무고(誣告) 또는 위증(僞證)으로 타인을 죄에 빠지게 한 자에게 그 빠진 자와 동일한 형(刑)에 처하도록 규정한 형률(刑律).
17) (역자주) 죄명을 깨끗하게 씻어 줌.
18) (역자주) 1721년(경종 1)에서 1722년(경종 2)사이에 일어난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의 대립으로, 신축(辛丑) 임인(壬寅) 양년에 결쳐 일어났다 하여 신임사화라 하며 임인옥(壬寅獄)이라고도 한다.
19) (역자주) 이향(移鄕) 거주를 시골로 옮기는 형벌.
20) (역자주) 방축전리(放逐田里) 죄인을 서울에서 추방하여 시골로 돌려보내는 형벌.
21) (역자주) 양이(量移) 멀리 유배된 사람의 죄를 감등하여 가까운 곳으로 옮기던 일.
22) (역자주) 죄를 용서해 줌.
23) 이 제도에 대해서는 1048년(고려 문종왕 2년)에 노친을 모시고 봉양을 위해 남아서 머물게는 것을 허락한 적도 있고,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에는 유배지로 돌아가야 한다는 령을 발하였다.
24) (역자주) 빙고(憑考) 여러 가지를 비추어 상세히 검토함.

라. 도형(徒刑)
중국에서는 「순전(舜典)」에 ‘유(流)’는 있고 ‘도(徒)’는 없었으며, 수(隋)나라에 이르러서 유(流)에 대한 제도를 정하였으며, 이것이 즉 유(流)에 ‘도(徒)’가 추가된 것으로 ‘도(徒)’는 수(隋)나라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일컬어지는 이유이다. 그러나 ‘도(徒)’가 오형의 하나가 되어 법전 상에 명확하게 규정된 것은 「당률(唐律)」 이후의 일이다. 따라서 조선에서도 도형의 제도가 존재하게 된 기원은 「당률(唐律)」을 모방하여 만들어진 「고려형법」이다. 고려형법에 도형(徒刑)은 1년, 1년 반, 2년, 2년 반, 3년의 다섯 등급으로 정하였고, 또한 그 속죄(贖罪)에 대해서도 절산법(折算法)을 정하였지만 도형(徒刑)의 집행방법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이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한가지 설에는 도(徒)는 곧 노비이고, 그래서 도형(徒刑)에 처해진 자는 이를 노비에 포함시킨 것이다. 그 무렵 관노비라고 불리는 자가 있었다. 그것은 도형수(徒刑囚)를 관아의 노비로 사역하고 있는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도(徒)는 노비라는 것을 증명하는 하나의 예라고 하고, 또한 1375년(신우 원년)의 하교에 ‘(전략) 도역(徒役)에는 정해진 햇수가 있다. 이미 만기된 자는 방면해야 하는 데에 금고(禁錮)하여 천(賤)하게 만든 일이 있으면, 이를 근구(根究)하여 보고하라.’라고 한 것에 비추어 보면, 도(徒)의 만기 후에는 노비에 편입하고 있었던 것과 같이 인정되었기 때문에 이것도 역시 도(徒)는 노비로 사역하는 자가 된다고 해석된 하나의 증거라고 하고 있다. 또 다른 설에는 도(徒)는 형기 동안 먼 지방으로 보내어 두는 것으로, 실질적으로는 유형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도형(徒刑)에 처하는 것을 ‘도배(徒配)’라고도 한다. 「대명률」에는 도형을 설명하여 ‘도(徒)는 사람이 조금 무거운 죄를 범하였을 때 관아에 잡아 두고 소금을 굽거나 쇠를 불리는 등 온갖 힘들고 괴로운 일을 시키는 것을 이른다.’라고 하였고, 오히려 ‘도역(徒役)은 각각 도형(徒刑)의 연한에 따라 모두 도배(徒配) 죄인이 유배지에 도착한 날부터 계산한다. 염장(鹽場)으로 보내지면 매일 소금 3근을 굽고, 야철장(冶鐵場)으로 보내지면 매일 철 3근을 불린다. 별도의 항목을 설정하여 계산한다.’로 정하여, 먼 지방에 있는 일정한 노역장으로 보내어 형기 동안 제염(製鹽), 제광(製鑛)의 일에 취업하게 한 것 같지만, 조선에서는 「대명률」이 규정하는 것 같은 사실이 있었던 것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생각건대 고려시대에는 노비로 하여 사역(使役)하였으나 유형과 같이 먼곳으로 유배한 적도 있었고 또 옥내에 수금하여 두고 필요한 때는 옥의 용무에 사역시키거나 하였으며 일정한 행형방식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 실제였던 것 같다.

3. 형구(刑具)

사형과 신체형의 집행에는 형구를 필요로 하였지만 종류, 형질 등에 관해서는 옛날부터 정해진 것은 없었다. 고려형법 시대에 이르러 형장(刑杖)에 대해서만 종류와 제식이 정해졌으며 이것이 형구 제정의 시초이다. 장(杖)은 척장(脊杖), 둔장(臀杖), 태장(笞杖)의 세 종류로 하고, 그 제식에 각 크고 작음의 차이가 있었다. 조선시대에 대명률에 의거하고 나서는 태(笞)와 형장(刑杖) 외에 신장(訊杖), 추국장(推鞫杖), 삼성장(三省杖)의 세 종류의 고문용 장(杖)과 가(枷), 유(杻), 삭(索), 쇄항(鎖項), 쇄족(鎖足)이라고 일컫는 각종의 형구를 정하고 또한 군용형구로 곤(棍)을 두었다. 이 곤(棍)에는 대(大), 중(中), 소(小)의 곤(棍), 중곤(重棍), 치도곤(治盜棍)의 다섯 종류가 있었다.
이와 같이 형구의 제식을 정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부터 줄곧 이어져 온 남형의 폐는 형구가 여러 가지 격식에 어긋나거나 또는 법외의 여러 가지 형구가 생겨나고, 게다가 점차 남용되는 한편 형구의 제식이 완전히 무시되고 있었다. 그래서 영조왕은 여러 차례 법외의 형의 제폐를 시행하는 동시에 행형 쇄신을 시행하는 데는 문란한 형구를 정리하는 일이 가장 긴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1738년(영조 14년)에 하교하여 ‘근래에 지방에서 형벌의 사용이 지나치게 혹독하니 실로 고질적인 폐단이다.

형구(刑具) I 사진 출처: 한국학 중앙연구원

허물이 없는 한 사람을 죽여서 천하를 취하는 것도 맹자(孟子)는 이를 아니라고 하였으니 임금도 이와 같은데, 하물며 방백(方伯)과 수령(守令)이겠는가. 형벌을 받는 자 역시 죽어서는 안되고,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날 수 없다. 그런데도 관장(官長)이 혈기(血氣)의 노여움으로 인명의 소중함을 생각하지 아니하고서 위엄을 세우려고 하여 함부로 죽이니, 형벌을 신중하게 하는 뜻이 어찌 이와 같지 않겠는가? 장(杖)의 크고 작음에는 스스로 정한 한도가 있으니, 일체 장혈(杖穴)에 의하고 감히 어기지 못하게 하라.’라고 명하고, 장혈(杖穴)을 다시 쇳물을 부어 만들어 이를 팔도(八道)에 반포하게 하였다. 이에 의해 일부 형구의 통일을 도모하였고, 또한 1740년(영조 16년)에는 자자형을 폐하는 동시에 경자구(黥刺具)를 몰수하여 이를 소각하는 등 형구에 의한 행형 개선을 도모하였다.
이어서 즉위한 정조왕 역시 즉위 다음해 조속히 「흠휼전칙(欽恤典則)」을 제정하여 형구(刑具)의 바로잡음을 도모하였다. 그때의 하교에는 ‘장(杖)에 대소가 있고 가(枷)에 두꺼움과 얇음이 있는 것은 그 죄의 경중에 따른 것이다. 근래 옛날부터 전해오는 법칙을 점차 늦추어 죄의 경중을 논하지 아니하고 경사(京司)와 지방이 함께 큰 장(杖)과 두꺼운 가(枷)를 사용하고 (중략) 이것이 어찌 옛 선왕의 흠휼(欽恤)의 뜻이겠는가? 군문(軍門)의 곤장(棍杖)은 제(制)의 뚜꺼움과 크기가 극한에 이르러 곤(棍)을 사용할 때 상해가 발생하기 쉬우므로, 정리하여 바로잡아야 한다. 등등’이라고 한 것과 같이, 당시 형구는 규정에 위반되어 매우 과대(過大)하게 흐르고 있었다. 1708년(숙종 34년) 하교에서도 ‘(전략) 실제로 관위(官威)를 가진 자는 마음대로 남용하여 감히 형장(刑杖)으로 노여움을 푸는 도구로 삼아 그 장을 크게 하고 다시 돌아보고 꺼리는 바가 없으며, 먼 변방의 궁벽하고 외딴 곳에는 이 풍습이 더욱 심하여 억울함을 품고 고할 데가 없어 목숨이 떨어지는 자가 얼마나 많겠는가? 이전에 여러 번 타일러 훈계하였는데도 옛 습관이 그대로 남아있으니 참으로 한심스럽게 여길만하다. 각 읍, 각 진(鎭)에 만일 조정에서 내리는 명령을 어기고 범하여 받들어 행하기를 부지런히 하지 아니하는 자는 계문(啓聞)하여 죄를 과(科)하라.’고 엄명한 적도 있었다. 또한 정조왕의 말씀 중에 ‘관장(官長)의 노여움을 합리화하는 도구가 되니 한심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라고 큰소리로 꾸짖는 등으로부터 보더라도 이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왕은 형구의 제(制)를 정하고 ‘화(化)는 가까이에서 나오고, 정(政)은 안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먼저 서울의 옥(獄)에 대하여 형구를 단속하라.’고 명하여 형방(刑房) 승지(承旨)를 법부(法部) 법조(法曹)에 달려가게 하여 제식에 어긋나는 것은 모두 거두어 모으고, 또한 외읍(外邑)에 대해서는 순차로 어사(御史)를 보내어 이를 단속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흠휼전칙(欽恤典則)」에서 정한 형구의 제식는 아래와 같으며, 대체로 「대명률」에서 정하는 제도를 본받거나 「경국대전」이 정하는 제식을 참작하였다.

1. 「대명률」 태(笞)와 장(杖)
길이 3자 5치, 대두경(大頭俓)25) 2푼 7리, 소두경(小頭俓)26) 1푼 7리로 하여, 작은 싸릿대로 만든다. 반드시 마디나 옹이를 깎아 내고, 관에서 내려 준 교판(較板)27)을 사용하여 법에 따라 대조하여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는다. 여러 가지 물건을 덧붙여 장식하지 못하게 한다. 지름이 가는 부분을 써서 볼기를 친다. 장은 (생략) 길이 3자 5치, 대두경(大頭俓) 3푼 2리, 소두경 2푼 2리로 하여, 큰 싸릿대로 만든다. 소두경(小頭俓,)을 써서 볼기를 친다.

2. 신장(訊杖)
길이 3자 5치, 대두경(大頭俓) 4푼 5리, 소두경(小頭俓) 3푼 5리로 한다. 「경국대전」에 수록된 신장은 길이 3자 3치, 윗부분 1자 3치는 지름 7푼, 아랫부분 2자는 너비 8푼, 두께 2푼이다. 하단(下端)으로 무릎 아래를 때리고 허리에는 이르지 않도록 해야 하며, 1차례에 30도(度)를28) 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경외에서 행용할 때 이를 기준으로 하고 감히 어기지 못하게 한다. 장(杖)은 「대명률」에 따라 3자 5치를 사용한다. 「속대전」 : 추국(推鞫) 신장은 너비 9푼, 두께 4푼이고, 삼성(三省)29) 신장은 너비 6푼, 두께 3푼이다. 금오(金吾)에서 이를 기준으로 삼는데, 길이는 「대명률」에 따라 3자 5치를 사용하고, 삼성장(三省杖)은 비록 외방(外方)이라도 이에 따라 시행한다.

3. 칼(枷)
길이 5자 5치, 두활(頭闊) 1자 5치이다. 마른 나무로 만든다. 사죄(死罪)에는 무게가 25근이고, 도죄(徒罪)와 유죄(流罪)에는 무게가 20근이며, 장죄(杖罪)에는 무게가 15근이다. 길이와 무게를 그 위에 새겨 넣는다.

4. 「대명률」 수갑(杻)
길이 1자 6치, 두께 1치이다. 마른 나무로 만든다. 남자가 사죄(死罪)를 범하면 수갑을 채운다. 유죄 이하 및 부녀자가 사죄(死罪)를 범하면 채우지 않는다.

5. 「대명률」 쇠줄(鐵索)
길이 1자이다. 쇠로 만든다. 가벼운 죄를 범한 사람에게 사용한다.

6. 우리나라에는 쇠줄(鐵索)이나 쇠사슬(索鐵)을 사용하지 않는다. 「경국대전」에 항쇄(項鎖)와 족쇄(足鎖)라는 조문이 있지만 길이와 모양은 말하지 않았다. 법사(法司, 형조·한성부)에서 행용하는 것에 따라 아래에 그 제도를 수록하면 아래와 같다.
쇄항(鎖項) 철삭(鐵索)은 길이 4자
쇄족(鎖足) 철삭은 길이 5치 25) (역자주) 대두경(大頭俓) 굵은 부분의 지름.
26) (역자주) 소두경(小頭俓) 가는 부분의 지름.
27) (역자 주) 교판(較板) 중앙이나 지방의 관청에서 태·장·신장(訊杖) 등 형구를 만들 때 대소의 차이가 없도록 규격을 맞추어 보는 표준 틀이다.
28) 영조척(營造尺)을 사용함.
29) (역자 주) 삼성(三省) 강상 죄인(綱常罪人)에 있어 삼성 곧 의정부·사헌부·의금부가 합좌하여 추국(推鞫)하는 것.

경국대전에는 ‘사죄(死罪)를 지은 자는 수금(囚禁)하여 칼(枷)과 수갑(杻)과 족쇄(足鎖)를 채운다. 유죄(流罪) 이하는 칼과 수갑을 채운다. 장죄(杖罪)는 칼을 채운다. 무릇 의친공신(議親功臣)30) 및 당상관과 사족 부녀가 사죄(死罪)를 범하면 목에 쇠사슬을 채운다. 당하관과 서인 부녀는 목과 발에 쇠사슬을 채운다. 장죄(杖罪)는 목에 쇠사슬을 채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대명률의 쇠줄 및 쇠사슬31)은 조선에서는 이를 사용하지 아니하였으나 경국대전 소정의 항쇄와 족쇄가 사용되고 있었다. 고종왕 때에 이르러 제정된 「육전조례」에서는 형구를 다시 아래와 같이 정하였다.

1. 가(枷), 유(杻), 쇄항(鎖項), 철삭(鐵索), 족쇄(足鎖), 신장(訊杖) 이상은 죄가 무거운 수인에게만 사용한다.
2. 태(笞), 장(杖)은 죄가 가벼운 죄수에게 사용한다.
3. 철착고(鐵着庫)32), 목착고(木着庫), 소쇄유(小鎖鑐)33) 이상은 흉악하고 사나운 죄인에게 사용한다.
4. 행형도자(行刑刀子)는 대소(大小) 합하여 3자루이다.


앞에 기술한 각 형구는 육전조례의 제정에 따라 새롭게 정한 것이 아니라, 재래의 형구에 대해 용도를 정한 것이 지나지 아니하지만 다만, 참형 용구에 해당하는 도자(刀子)를 법문에 규정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30) (역자주) 의친 공신(議親功臣) : 팔의(八議)의 하나. 곧 임금의 단문 이상친(袒免以上親), 왕대비(王大妃)·대왕 대비(大王大妃)의 시마 이상친(緦麻以上親), 왕비(王妃)의 소공 이상친(小功以上親), 세자빈(世子嬪)의 대공 이상친(大功以上親)의 범죄자를 처벌할 때에 형의 감면(減免)을 의정(議定)하던 일.
31) 연환(連環)이라고도 한다.
32) (역자주) 철착고(鐵着庫) 쇠로 만든 차꼬.
33) (역자주) 소쇄유(小鎖鑐) 작은 자물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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