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근대 한국행형사(2)
한양 즉 중앙의 구금기관은 전옥, 의금부옥, 포도청옥, 직수의 각 관아의 옥, 궁정의 옥 등 매우 많은 종류가 있었으며 모두 감독계통을 달리하였다. 게다가 관리는 완전히 각 소속 각 관아에 제멋대로 방임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자연히 질서나 체계가 없었으며 동시에 수많은 폐해가 발생하였다. 또한 형정(刑政)이 전반에 걸쳐 문란하였으며 그 가운데 구금에 대해서는 문자 그대로 무법(無法)을 다하고 있었다. 특히 이와 같은 상태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시작된 것이 아니라 고려시대 이전부터 유래하였지만 조선시대 이후에는 한층 그 도를 더해온 것 같다. 역대 국왕이 휼수(恤囚)1)와 그밖에 관해 내린 교지 또는 때로 중신으로부터의 상계(上啟) 등의 반면으로부터 충분히 알 수 있다. 이는 오직 중앙에서만이 아니라 지방에서 수령 이하가 권력을 휘두르고 억압을 하여 중앙 이상의 폐해가 발생하고 있었던 것은 말할 필요가 없는 바이다.
1406년(태종 6년)에 왕은 죄수가 옥내에서 유사(瘐死)2)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듣고 지신사(知申事) 황희(黃喜)에게 ‘죽어야 할 자는 즉시 죽이되, 옥에 오랫동안 갇혀있어 죽게 하는 일 없도록 하고, 당장 법관으로 하여 옥이 막히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여 법관을 경고하도록 하였다.
1425년(세종 7년)에 ‘옥(獄)이란 것은 죄가 있는 것을 징계하는 곳이고, 사람을 죽는데 이르게 하는 곳이 아니다. 옥(獄)을 맡은 관원의 마음이 수인을 살피는데 미치지 아니하여, 옥수(獄囚)가 심한 추위와 더위에 혹은 병에 걸리거나 혹은 얼고 굶주림으로 인하여 간혹 비명(非命)에 죽음에 이르는 자가 없지 아니하니 실로 불쌍하고 가엽게 여기는 바이다. 서울과 지방의 관리는 나의 지극한 뜻을 체득하여 영어(囹圄)를 깨끗하게 청소하고, 질병에 걸린 죄수에게는 약을 주어 치료하며, 가족으로 보호하는 이가 없는 자에게는 관에서 의복과 양식을 관급하여 구호하도록 하라. 마음을 쓰지 아니하고 받들어 거행하지 아니하는 자가 있다면 엄하게 죄상을 밝히어 바로잡고 다스리라.’라고 명하였다. 1427년(세종 9년)에는 ‘오늘 밤 매서운 추위가 점점 심하여 안옥(犴獄)의 죄수는 엄한(嚴寒) 때문에 얼어 죽는 폐해가 있을까 걱정되니 모든 죄수를 석방하라.’라고 하교하여 모든 죄인을 석방하였다. 1430년(세종 12년)에는 ‘영어(囹圄)에 구금되어 있는 것과 매질의 엄함은 사람들에게 모두 고통스러운 바이지만, 그중에서도 늙은이와 어린이는 특히 불쌍히 여겨야 하고 15세 이하와 70세 이상의 자는 살인, 강도를 제외하고는 가두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한다. 80세 이상 10세 이하의 자는 사죄(死罪)를 범하더라도 가두지 말고, 고신(拷訊)은 많은 사람의 증거를 듣고 죄를 정하라.’라고 명하였다. 1948년(세종 30년) 여름 왕은 ‘감옥에 있는 자는 더운 기운에 덮히기 쉽고 만약 생명이 떨어지면 실로 애석한 일이다. 더운 때는 동이에 물을 채워 이것을 옥 내에 두고 여러 차례 그 물을 다시 채워서 수인으로 하여 또는 그 물을 사용하도록 함으로써 더운 기운이 나타나지 않도록 하라.’라고 명을 내린 적이 있었다.
1) (역자주) 휼수(恤囚) 옥에 갇힌 죄수의 가련하고 딱한 처지를 돌보아 구제하는 정책
2) (역자주) 유사(瘐死) 고문 따위로 감옥에서 고생하다가 죽음
1455년(세조 원년)에 왕은 좌승지(左承旨) 한명회(韓明澮)를 파견하여 지방의 사정을 안찰(按察)하도록 한 적이 있었다. 그때의 시찰 항목 중에 형정(刑政)에 관해서는 1) 위법 남형, 2) 죄수 연체(延滯)의 두 항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때는 물론 죄수 구금의 실상도 시찰하였을 것이다. 당시 지방에서의 형정 문란, 특히 당시 폐단이 심하다는 점을 고려하여 안찰사를 파견하는 것을 도모한 것일 것이다. 같은 해 하교에 ‘옥수삼한(獄囚三限)의 법이 있어도 사증(辭證) 불명 등에 맡기고 심리를 지체하거나 혹은 정리(情理)가 애매한 것이 있으니 각도 관찰사에게 영을 내려 수령을 여러 고을에 파견하여 체수의 일을 맡아서 처리하게 하고, 그 애매하고 원왕(寃枉)3)한 자 및 태형 이하의 수인을 모두 석방하고 사(辭)를 갖추어 들으라’라고 영을 내렸으며, 1457년(세조 3년)에는 각 도의 수령에게 영을 내리고 이르기를 ‘내가 살리기를 좋아하여 한 나라를 구제하는 것을 생각하고 최근 태형(笞刑) 이하의 죄수를 석방하였으나, 오히려 장형(杖刑) 이상의 죄수 중에도 애매하고 원왕(冤枉)한 자가 있고 엄동(嚴冬)에 구속되어 비명(非命)에 죽게 된다면 천심(天心)이 반드시 불쌍하게 여기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그대들은 급히 석방할 만한 죄수를 기록하여 아뢰도록 하라.’라고 명하였다. 이것은 필시 한명회(韓明澮)가 지방을 안찰하고 복명한 것에 의한 것일 것이다. 같은 해 12월에는 날씨가 매우 추워 국왕은 술과 고기를 금부 전옥(典獄)에 구금된 죄수들에게 보내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금오 전옥의 누습(漏濕)4)의 상태를 시찰하도록 한 적도 있었다. 1466년(세조 12년) 겨울의 어느 날 밤 하교를 내려 이르기를 ‘오늘 밤의 추위가 갑절 심하여 따뜻한 방에서 두터운 겉옷을 입고도 추위를 견디지 못하겠는데, 안옥(犴獄)의 사수(死囚)가 심한 추위를 당하여 동사(凍死)하는 폐단이 있을까 염려스럽다, 먼 지방에는 미칠 수 없으나, 경옥(京獄)에 현재 죄수가 얼마인지 모두 빨리 기록하여 아뢰도록 하라.’라는 명한바, 윤필상(尹弼商)이 그 자리에서 낱낱이 헤아려서 아뢰자, 왕은 명하여 즉시 모든 죄수를 소석(疏釋)하였다. 역대 왕 중 옥사에 깊게 마음을 쓴 것은 세조왕이었다고 한다.
3) (역자주) 무실(無實)의 죄로 원통함
4) (역자주) 축축한 기운이 스며있는 방
1469년(예종 원년) 5월 왕은 각도의 관찰사에게 ‘각 도에 관찰사와 수령을 두는 것은 농상(農桑)5)에 힘쓰고 계기(戒器)를 정돈하며 도적을 근절하여 백성을 해치는 일을 스스로 없도록 하는 데에 소홀하지 않도록 하라는 데 있다. 듣건대 충청도에는 죄인이 400여 명에 달하고 있다니 몹시 불쌍하나 도둑질을 범하고 생활을 문란시키는 자는 원칙대로 다스려라. 그러나 죄가 가벼운 자는 속히 판결하라. 어찌 옥중에 구류시키는 것으로 인하여 농업을 폐하게 하겠는가? 모름지기 왕의 뜻을 명심하고 옥에 오래 머물지 않도록 하라.’고 훈계하였다. 그 무렵 충청도와 같은 한 지방에서조차 이렇게 많은 사람을 구금하고 더구나 그 때문에 농사를 폐하기에 이르렀다고 하는 것은 당시 지방에서도 구금의 남용이 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같은 해 엄동설한 때에 왕은 형관(刑官)을 재촉하여 빨리 옥수를 판결하게 하고 옥에 머무르지 않도록 한 적도 있었다. 성종왕 때는 가벼운 죄임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구금되어 결국 죽은 자가 있는 것을 근심하여, 융한시(隆寒時)6)와 극열시(極熱時)7)에는 강상(綱常)과 장죄(贓罪)·도죄(盜罪)를 범한 남자에 대해서 장(杖) 60 이상인 사람, 여자에 대해서는 장(杖) 100 이상을 제외한 자로, 장(杖) 100 이하인 사람은 모두 속전(贖錢)을 허락하고, 만약 속전할 능력이 없어서 신속하게 장형의 집행을 받고 출옥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이를 받아들이라는 길을 열었다. 1473년(성종 4년)에는 형조로부터 영어(囹圄)가 비었다는 것을 아뢰기에 왕은 기뻐하고, 당랑(堂郞)8)에게 모두 상을 내렸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것은 구금으로부터 발생하는 폐해가 매우 심각한 것을 살피고, 가능한 한 이를 방지하고자 하는 왕의 깊은 염려에서 나온 것이다.
1510년(중종 5년) 정월 왕은 사옥관(司獄官)에게 명하여 매월 1일, 11일, 21일의 3회 정기적으로 옥수의 명부를 기록하고, 고하여 알리도록 하는 것을 법식으로 하였다. 이는 물론 체옥이 오래도록 이르는 것을 감독하기 위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 틀림없다. 1519년(중종 14년)에 왕은 죄수가 사망하는 일이 매우 많음을 듣고 이는 필경 영어(囹圄)가 비좁아서 공기가 막히고 통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라고 하여, 명을 내려 옥사의 증수를 명한 적도 있었다. 1567년(명종 22년)에 왕은 교지를 내려 ‘수인에게는 겨울에 즉시 포석(蒲席)9)을 지급하고 여름에는 즉시 옥내를 깨끗하게 닦고, 가유(枷杻)를 씻고 청소하여 한동(寒凍)과 훈증(薰蒸)의 병에 걸리지 않도록 하라. 또 의관(醫官)을 두고 약물을 비치하여 죄수를 구제하고, 만약 가난하여 부양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옥에서 름료(廪料)를 관급하여 형옥을 흠휼(欽恤)하도록 하라. 남형의 관리는 체포하라.’라고 사옥관을 계칙(戒飭)하였다. 옥에 의관을 두고 약이(藥餌)10)를 급여한 것은 이미 고려시대에 그 길이 열려있었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1425년(세종 7년)에 병자에게는 시약구료를 실시하였고 또 가족이 호양(護養)하는 자가 없을 때는 의복과 양식을 관급하여 구호하라고 명한 적도 있다. 광해군 때에 이르러서는 실정이 백출하고, 강기(綱紀)11)가 완전히 땅에 떨어져 그 때문에 형정도 극도로 문란해졌으며, 그때부터 각 사(司)는 함부로 사람을 체포하여 구금하였고, 이에 의거해 점차 권세를 확장하는 폐풍(弊風)12)이 점점 더 심해지게 되었던 것 같다.
1623년(인조 원년) 10월 어느 날 추위로 건강을 해치는 자가 많았기 때문에 왕은 전옥서에 명하여 가벼운 죄수 전부를 석방하였다. 1624년(인조 2년)에는 왕은 의금(義禁) 이정귀(李廷龜)에게 이르기를 ‘형옥은 견고함이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인하여 누설(縲紲)은 원왕(寃枉)을 초래하기 쉽기 때문에 역대 정치가 바라는 임금은 옥을 중하게 하였고, 형옥을 신중하게 하지 않으면 그 무엇을 신중하게 해야 할지’라고 왕은 특히 치옥에 마음을 쓴 것이 깊은 것은 실로 이유가 있었다. 1625년(인조 3년)에 전교를 내려 ‘법전에 의한 각 사(司)의 구금은 병조(兵曹) 등 7사 외에는 모든 형조로 옮겨 수인을 가두어라. 직수(直囚)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고, 그리고 현재 죄인(명부)을 보니 각 사(司)가 천수(擅囚)13)에 관련되는 것이 매우 많으니, 앞으로 첫째로 법전에 의거하여 시행해야 하고 만약 이를 어기는 자가 있으면 무거움에 따라 추고(推考)할 것이다.’라고 엄명하였다.
5) (역자주) 농상(農桑) 농사일과 누에치는 일
6) 매년 11월 1일부터 정월 그믐날까지
7) 매년 5월 초 1일부터 7월 그믐날까지
8) (역자주) 당랑(堂郞) 같은 관아에 있는 당상관과 당하관
9) (역자주) 포석(蒲席) 부들자리
10) (역자주) 약이(藥餌) 약이되는 음식
11) (역자주) 강기(綱紀) 사람이 지켜야 할 강상과 기율
12) (역자주) 폐풍(弊風) 폐해가 되는 풍습
13) (역자주) 천수(擅囚) 마음대로 가두는 것
당시 천수의 폐해 외에 채무강제를 위해 구금하는 폐해도 있었던 것 같다. 즉 1630년(인조 8년) 12월 융한시(隆寒時)에 구금상태를 시찰하게 하기 위해 승지(承旨)를 전옥서에 파견하여 수인을 고사(考查)하도록 하였는데, 징채를 위해 옥(獄)에 가두어진 사람이 많음을 발견하고 승지는 크게 놀라 급히 돌아와서 그 취지를 왕에게 복명하자, 왕은 즉시 하교하여 ‘이후 각 아문은 전(錢)을 도민에게 빌려주고, 달로 계산하여 이자를 취할 뿐으로 사체(事體)14)의 괴손(乖損)뿐만 아니라 수징(囚徵) 시에 원차(怨嗟)15)를 깊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폐를 금하지 아니하면 즉시 빈민은 탕석(蕩析)할 우려가 있고, 또 영어(囹圄)는 빌 때가 없으니 이후로는 아문의 채대(債貸)의 폐는 일체 엄금하였다. 그 후 이 폐해는 그치게 되었다.
1649년(효종 원년) 9월에 엄한을 연유로 하여 죄가 가벼운 자를 석방하고, 같은 해 3월에는 전옥서에 명하여 여병(癘病)16)에 걸린 죄수를 구료하도록 하고 약물을 하사하였다. 또 1651년(효종 2년) 왕은 하교를 내려 ‘이런 추운 계절이 되어 동옥(凍獄)에 가두어지고, 배를 채우지 못하여 굶주림과 추위에 학대당하고 있는 것은 짐으로서는 금측(衿惻)17)하는 바이다. 형조로 하여금 유의구(襦衣具)를 만들어 주고 땔감도 주도록 하라. 또한 각 도(道)에도 알려 각 죄수에게 골고루 급여하여 동사(凍死)의 재난으로부터 면하게 하라.’라고 명하였다. 당시 오직 서울의 옥만이 아니라 지방의 옥에서도 옥수에 대해 급양이 골고루 미치지 아니하였고 그 때문에 겨울철에는 동사자가 나오는 일이 꽤 많았던 것 같다. 이와 동시에 왕은 승지에게 이르기를 ‘곤수(閫帥)18)와 수령(守令)들이 형장(刑杖)을 함부로 써서 죄가 아닌 데에 죽는 자가 빈번하게 있으니,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는 바이다. 사람의 목숨은 지극히 소중하니, 비록 중한 죄를 범하였더라도 오히려 두세 번 반복해서 논의하여 빨리 처단할 수 없는바, 더구나 한때의 노여움으로 과용하는 것은 부당한 형벌을 지나치게 적용하는 것이다. 팔도에 전유(傳諭)하여, 마음대로 형벌을 집행하지 말도록 하라.’라고 하여 당시 구금방법이 적당하지 아니하였고 그 때문에 인명을 해하는 일이 많았으며, 게다가 형장을 남용하였기 때문에 죽는 자가 속출하였고 그 무렵의 죄수는 일반적으로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1660년(현종 즉위년) 10월 왕은 특히 날이 추웠기 때문에 승지에게 명하여 죄가 가벼운 자만을 석방하고, 1664년(현종 5년)에는 특히 구수(久囚)19)의 한겨울(寒凍)의 고통을 염려하여 구량(口糧)20), 유의(襦衣)21)를 급여하였다고 한다.
14) (역자주) 사체(事體) 사리와 체면
15) (역자주) 원차(怨嗟) 원망과 탄식
16) (역자주) 여병(癘病) 나병
17) (역자주) 금측(衿惻) 가슴으로 가엽게 여김
18) (역자주) 곤수(閫帥) 병마 절도사와 수군 절도사
19) (역자주) 구수(久囚) 오래된 죄수
20) (역자주) 구량(口糧) 관아에서 식구의 수대로 내어주는 양식
21) (역자주) 유의(襦衣) 겨울옷
1674년(숙종 원년) 4월 큰 가뭄을 만나 전옥서의 죄가 가벼운 자를 석방하였다. 1680년(숙종 6년)에 왕이 형조를 시찰할 때에 옥수가 100여 명에 이르는 많은 수가 있었다. 따라서 왕은 형조에 명하여 즉시 소결(疏決)22)하도록 하고, 또 하교를 내려 ‘근래 형조에 구금되는 자는 죄가 중한 자라도 점차로 세 차례를 경과하도록 하여, 오래 지체하는 정도가 심하기 때문에 사망하는 사람이 계속 생겨나고 이미 89명을 헤아리기에 이르렀다. 이는 휼형의 도에 반하는 것으로 해당 당랑(堂郞)은 마땅히 추고(推考)해야 할 것이다.’라고 명하고 엄체의 책임을 물었다. 당시 체옥의 폐해는 외방 즉 지방이 더욱 심하였던 것 같다. 1681년(숙종 7년) 이민서(李敏敍)의 진언에 ‘체옥의 폐해는 지방이 더욱 심하고 죄명이 점차 무거워지면 관리는 즉시 처결을 하지 하여 혹은 수십 년의 장기에 이르는 경우가 있으니, 마땅히 서울과 지방에 신칙(申飭)23)하여 이 폐해을 고쳐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1697년(숙종 23년)에는 전염병이 유행하여 전옥서의 옥내에 침입하고 그 때문에 옥수 중에 사망자가 속출한 적이 있었다. 이때 구제에 관하여 의논이 분분하였으나, 형조판서 이언강(李彦鋼)은 전옥서에 구금되어 있는 자는 다수는 평민이기 때문에 일단 옥문을 나설 때에는 혹은 의외의 우려가 없지 아니하다. 따라서 중죄수 이외의 자 중에 죄명이 조금 가볍고 신병(身病)의 상태가 중한 자에 한해 사옥관(司獄官)의 문보(文報)를 기다려 잘 보아 살핀 후 보방(保放)24)을 계청(啓請)25)해야 한다는 의견을 낸데 대해 국왕은 이를 윤허하였다. 금부옥(禁府獄)에 구금하는 죄수로서 중병에 걸렸을 때는 품청(稟請)하여 보방(保放)할 수 있는 길이 이전부터 열려져 있었지만, 전옥서의 죄수에 대해서는 전혀 보방의 길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염병의 유행 때문에 그 대책으로 처음 그 예를 열었다.
또 숙종왕 시대에는 여러 차례 큰 가뭄이 있었기 때문에 그때마다 국왕은 사단(社壇)26)에 친히 기도하고, 환궁 길에 의금부에 임석하여 사면을 실시하였으며, 1697년(숙종 23년)에 왕이 금부옥의 죄수에게 사면을 시행한 때는 왕의 수레 앞에 무릎을 꿇은 옥수가 60여 명이었다. 그리고 모두 흐트러진 머리에 귀신같은 모습을 드러내면서 넘어졌고, 한 사람도 능히 걸을 수 있는 자가 없었다. 이는 오랫동안 갇혀있어서 이와 같이 귀신 형상을 하기에 이른 것으로, 왕은 측연(惻然)하였다고 한다. 또한 1701년(숙종 27년)에도 사면을 실시하였다. 이는 당시 금오옥(金吾獄)27)에 죄수가 80여 명으로 많았고 옥사가 비좁아 한데서 거처하게 하고, 많게는 1년, 2년에 이르는 자도 있었기 때문에 왕은 환궁하던 길에 금오문(金吾門) 밖을 지날 때 친히 나아가 사면을 실시하고 죄의 경중에 따라 40여 명만을 출옥시켰다고 한다. 1705년(숙종 31년)에는 교지를 내려 친상(親喪)을 당한 죄수에 대해 보방을 허락하는 길을 열고, 1706년(숙종 32년)에는 금부의 계(啓)에 따라 죄수 중 부의 상을 당하여 아직 하관(壙葬)을 끝내지 못하고 붙잡힌 자에 대해서도 여가를 주어 장례를 치루도록 한 예도 만들었다. 1707년(숙종 33년)에는 우의정 이이명(李頥命)의 계(啓)에 따라 전옥서의 옥사에 전부 깔판자를 깔도록 하였다. 종전에는 깔판자도 없이 흙바닥에 생활하도록 하였으며 홍수 때 물이 스며들어 그로 인해 병이 발생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수리를 한 것이다.
22) (역자주) 소결(疏決) 죄수를 너그럽게 처결함
23) (역자주) 신칙(申飭) 단단히 타일러 조심함
24) 보증인을 세워두고 죄인을 석방하는 제도이다.
25) (역자주) 계청(啓請) 임금에게 아뢰어 청함
26) (역자주) 사단(社壇) 토속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
27) 금부옥(禁府獄)
숙종왕 때에 체옥의 폐해가 심하였으며 특히 지방의 옥수에 대해서는 수년이 지나서도 아직 판결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지경연(知經筵) 이민서(李敏敍)가 체옥은 수십 년 동안이나 오래도록 계속되어 왔다고 과장된 말로 극언(極言)28)할 정도였다. 그와 같이 엄체(淹滯)29)를 초래한 원인은 사건의 성질상 판결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으나 주로 왕실의 제사 기진(忌辰) 등에는 개좌(開座), 즉 재판 개정이 정지되었고, 게다가 그 횟수가 너무 과도하였다고 하는 것이 원인이었다. 그래서 1710년(숙종 36년)에 비국(備局)으로부터 올라온 계문(啓文)에 ‘금부(禁府)의 집무는 한 달에 세 번 양일(兩日)에 지나지 아니하여, 정범(情犯)이 매우 무거운 자는 복초(服招)받을 기한이 없으며, 과오가 경미한 자는 누구나 열흘 동안이나 구금되기에 이르고, 크고 작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자로 영어(囹圄)가 가득 차게 되니, 이것이 비록 해당 부(府)의 태만에 이유도 있고 또한 구기(拘忌)30)하는 것이 너무 많아서 그러한 것이다. 바라건대, 이제부터 형옥(刑獄), 사송(詞訟) 그 밖에 관계 사무에 대해 각 관아의 개좌(開坐)를 상사(上祀)는 3일, 중사(中祀)는 1일, 기신(忌辰)은 원기(遠忌)에 따라 1, 2일 외에는 구기(拘忌)하지 아니하는 것을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이를 정하고, 영구히 응당 시행하는 예법으로 한다.’라고 한데 대해 왕은 윤허를 내리고 이로써 개좌를 빈번하게 실시하였다. 또 1712년(숙종 38년)에는 교지를 내려 ‘지방의 옥수에게 수년이 지나서 아직 판결하지 아니한 자 또는 의옥(疑獄)31)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이라면 감사(監司)부터 즉시 계문하여 재결처분을 하고, 만약 그렇지 아니하는 자가 있으면 속히 처결하여 오래 지체하지 않도록 각 도에 신칙(申飭)32)하라.’라고 영을 내려 지방의 엄체(淹滯)를 경계하였다.
28) (역자주) 극언(極言) 있는 힘을 다해 말함
29) (역자주) 엄체(淹滯) 오래 지체함
30) (역자주) 구기(拘忌) 어떤 일을 흉(凶)하다고 꺼림
31) (역자주) 의옥(疑獄) 의심스러운 옥사
32) (역자주) 신칙(申飭) 단단히 타일러서 조심함
각 관아의 천수(擅囚)의 폐는 이미 인종왕 때에 하교하여 엄하게 이를 계칙(戒飭)33)한 적도 있었으나 오히려 점점 왕성하게 되었고 백사백관으로 하여 사옥(私獄)을 가지지 아니한 곳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서민은 언제 붙잡혀 가두어지는 불행과 마주할지 예측하기 어려웠고, 일반적으로 불안한 마음에 몰려 전전긍긍한 형편이었기 때문에 1724년(경종 4년) 참찬관(參贊官) 류복명(柳復明)은 ‘도민의 곤췌(困瘁)34)는 많고 죄인을 잡아 가두는 일로 이를 말하면 이미 전옥이 있고, 어떤 죄와 어떤 죄수가 아니라 각 법사(法司), 오군문(五軍門) 및 각 해사(該司) 봉채처(封債處)는 각 감방을 가지고 있으며, 성내에 죄인을 잡아가두는 곳을 한정하지 아니하여 백성이 편안하지 않고 곤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략) 이에 지금 각 관아의 구류의 규범을 일체 혁파해야 합니다.’라고 상계(上啓)한 바, 왕은 이에 대해 ‘앞으로 구류 간의 혁파할 뜻을 가지고 각별히 신칙(申飭)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1725년(영조 원년)에도 신하 중에 오군문(五軍門)과 각 관아가 모두 구금시설을 가지고 있는 것에 관하여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왕은 ‘선조(先朝)가 이미 내수사의 옥을 없애고 하물며 각 법사로 만약 잡아 가두어야 할 자가 있으면 전옥서가 있고, 그런데도 별도로 사옥(私獄)을 두는 것은 온당치 아니하다.’라고 하고 이를 금하였다. 또 당시 내외 법사는 재판의 개정을 게으르게 한 결과 체옥이 점점 심해져 감에 따라 1737년(영조 13년) 하교를 내려 ‘서울과 지방의 영어(囹圄)에 막힘이 많아 마음이 항상 혐연측연(嫌然惻然)하고 추위와 더위의 부조화에 있어 계절의 순서의 부적당을 걱정하고 추위의 율열(慄烈)에 당하여 위사(衛士)의 많음과 차가움을 생각하고 하물며 영어(囹圄)의 봉두(蓬頭)35)가 백성을 서울과 지방에 신칙하여 날을 빨리 개정함으로써 엄체가 없도록 하라. 등등’이라고 하고 내외의 법사를 경계하였다.
금부옥에서는 종전부터 옥사로 서간(西間)과 남간(南間)을 두고 있었으며 구금하는 자의 구별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준이 없었으나, 1738년(영조 14년) 판의금(判義禁) 조현명(趙顯命)의 상계와 관련하여 ‘신이 생각해 보면 수십 년 전의 예는 즉 살인 죄인은 서간에 두거나 혹은 남간에 두기도 하여 원래 규정이 없었다. 앞으로는 모두 살인 죄인에 대해 미형추자(未刑推者)는 서간에 두고, 이미 완결된 형추자는 남간에 두는 것으로 영구히 정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는 의견에 대해 왕은 이를 윤허하였다. 이에 따라 이후 금부옥의 서간에는 미결자를, 남간에는 기결자를 구금하는 예가 되었다.
33) (역자주) 계칙(戒飭) 경계하여 타이름
34) (역자주) 곤췌(困瘁) 괴롭고 고달픔
35) (역자주) 봉두(蓬頭) 쑥대강이
오랜 폐단인 천수(擅囚), 사사수금(私事囚禁), 사옥(私獄) 등의 폐해는 마침내 한계에 달하기에 이르게 되었던 것 같다. 1740년(영조 16년) 우의정 유척기(兪拓基)의 소계(所啓)를 보면 ‘여러 상사(上司)와 병조, 한성부, 장례원, 사헌부, 각사 직수(直囚)의 폐단은 실로 심한 바가 많다. 전옥으로부터 죄인(명부)을 10일마다 한 번씩 우상(右相)에게 보이는 것을 예(例)로 하여, 신이 이를 보건데 즉 많은 사람이 사사로운 희로(喜怒)로써 가두어진 사람뿐이다. 따라서 영에 따라 이들을 석방하더라도 그다음 날에 다시 원래와 같이 구금의 몸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폐단은 정말 엄하게 징계하지 않으면 안 되고, 만일 이후 사사(私事)로서 구금한다면 큰 것은 잘못을 따져 꾸짖고, 작은 것은 받들어 다스려야 한다.’라고 참으로 적절한 것을 말하고 있어 왕은 이를 승인하였다. 또한, 각사 직수의 폐해는 원래 사람을 구금하는 권능을 가지지 아니함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권세를 넓히기 위해 제멋대로 권한 외의 일을 행한 것에 지나지 아니한 것이지만 그 후 이것이 남용으로 흘러 결국에는 각사(各司)는 사사(私事)로 사람을 잡아 가두는 것과 같은 폐를 만들기에 이르렀고, 뿌리가 매우 깊어 이를 빼내는 것은 하루아침에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1740년(영조 16년) 참찬관(參贊官) 유최기(兪最基)36)의 상계에 ‘구류간 혁파의 일은 특교에 의해 신칙(申飭)하는 것으로 실로 한두번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을 거행되지 않는 것은 참으로 놀랄만한 일이다. 등등’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또 1741년(영조 17년) 하교에서 ‘영어(囹圄)를 설치한 것은 공(公)을 하기 위한 이유이다. 사람을 잡아서 가두는 것을 허락한 것도 역시 공적인 일을 위한 이유이다. 그러므로 지금 들리는 바에 의하면 유신(儒臣) 진달(陳達)이 공적인 일이 아닌 것으로 구금된 폐해가 있다는 것은 매우 한심(寒心)하여 감당하기 어려운 바이다. 각별히 신칙하니 만약 공적인 일이 아니고 남수하는 자가 있으면, 사구(司寇)37)의 장은 즉시 알리라.’고 명한 것과 같은 것은 구금남용의 폐해가 전과 다름없이 개선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또 남수와 동시에 왕수(枉囚)라고 불리는 폐해도 발생하고 있었다. 1745년(영조 21년)에 형조판서 이종성(李宗城)은 상계에서 ‘죄인을 구금하는 데는 반드시 곧바로 그 죄명을 들어서 수도(囚徒)38)에 기록해야 하고, 단순히 범죄자로 범칭(泛稱)하여 죄명을 적시하지 않는 것은 형조 전옥서로 하여 일체 구금해서는 안된다. 혹은 무고하게 다른 죄로써 왕수(枉囚)하여 현로(現露)하였을 때는 관리는 직을 파하고 색리(色吏)39)는 중구(重究)에 부한 것은 이미 선조(先朝)의 수교(受敎)이다. 근래 여러 상사(上司)와 사헌부는 직수하는 데에 범죄로 칭하거나 혹은 분부(分付)로 칭하여 날로 분답해지고 있다. 이후에 수교(受敎)40)의 뜻을 명확하게 하도록 신칙(申飭)함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36) (역자주) 유최기(兪最基, 1689~1768) 조선 후기에 대사헌, 판의금부사, 우참찬 등을 역임한 문신
37) (역자주) 사구(司寇) 형조판서의 딴 이름
38) 명부
39) (역자주) 색리(色吏) 감영이나 군아의 아전
40) (역자주) 수교(受敎) 임금이 내리던 교명
그 무렵 빈번하게 행해진 구금상의 폐혜 중 체수(替囚)라고 하는 것이 있었다. 즉 죄인을 바꾸어 친족을 구금하는 것으로 처로써 남편에 대신하여 구금하는 것을 정처수금(正妻囚禁)이라 부르고, 또 아버지로써 자식을 대신하고 형으로써 아우를 대신하여 구금하는 것을 부형체수(父兄替囚)라 부르며, 인륜에 반하는 가장 큰 것이다. 숙종왕 때에 엄히 금지하고, 위반한 자는 시행함에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41)로써 하라는 하교가 있었던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으며, 결국 폐지에 이르지 아니하였으며 영조왕 때에 이르러서는 한층 심각하게 되었던 것 같다. 1757년(영조 33년) 다시 정처수금, 부형체수를 금지하는 영을 내릴 때의 한 구절에 ‘지금 해당 부와 해당 조의 수도를 열람하면 그중에 잔인한 자는 정처수금이고, 이미 큰 허물이 없는데 위협하고 붙잡아 가게 되고, 그 모양은 실로 비참한 것이었다. 특히 그 첩으로 대신하기를 원한 때는 예속(隸屬)을 징색(徵索)하는 것은 마치 여염집을 억지로 침입하는 바와 다름이 없다. 등등’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 매우 잔인하게 처리한 것 같다.
아울러 이 체수를 금한 것은 정처(正妻), 부형(父兄)을 그 지아비나 자제를 위해 대신 가두는 것만을 금지한 것으로 그 이외의 사람으로 대신 가두는 것은 인정된 것 같다. 1758년(영조 34년)에 발한 전교의 한 절에 ‘(전략) 이후 관계 인륜 외에 스스로 자제도 아니고 역시 근속도 아닌데 자제인 이유로 부형을 체수하는 것은 모두 금지한다. 등등’이라고 하고 있는 바로부터 보면 자제 본인의 부형으로 대신 가두는 것은 금지하였지만 달리 자제나 부형 이외의 근속으로 대신 가두는 것은 지장이 없었던 것같다.
1780년(정조 4년) 5월 옥(獄) 중에 전염병이 불길같이 일어나 사망자가 속출했기 때문에 왕은 명하여 중죄인은 모두 보방(保放)하고, 또 하교하여 ‘비록 사수(死囚)라 할지라도 병으로 죽는 것은 왕정이 아니다.’라고 하고, 양(兩) 의사(醫司)에 신칙하여 구료(救療)42)에 정성을 다하도록 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1784년(정조 8년)에는 옥수가 기아에 직면한 적이 있었다. 왕은 진휼청(賑恤廳)에 대해 양식으로 쓰는 쌀을 나누어 주도록 명하고, 형조에 있는 중죄수 33명과 관련 죄인 2명 합계 35명에 대해 대소미(大小米) 각 6되를 나누어 주었다. 그때 죄수는 모두 부황(浮黃)하여 죽음이 드리울 우려가 있어 흡사 흉년과 같았다고 한다. 옥중에서의 식사는 예로부터 자변한다고 정해져 있었으나 자변할 능력이 없는 자에 대해서는 관급하도록 한 것은 지금까지 한두 번이 아닌 명령이 있었지만, 사실은 관급하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기아에 빠진 자가 발생한 까닭이다. 1785년(정조 9년) 형조판서 이명식(李明植)의 소계(所啓)에 의하면, 종친부(宗親府)와 같은 곳에서 여전히 하루 그곳의 수인이 11명의 다수에 달하였다고 한다.
41) (역자주)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 왕의 명령서를 위반한 율
42) (역자주) 구료(救療) 가난한 병자를 구원하여 치료해 줌
당시 옥내의 폐두(弊竇)에 대해서는 정약용(丁若鏞)이 그의 저서 『목민심서』43) 중에서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당시 진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옥중에서의 토색(討索)44)은 상상 밖이고 또 학무(鶴舞), 원궤(猿掛), 착란(搾卵), 추뇌(推腦) 등 뜻을 알 수 없는 은어가 많이 사용되고 있다. 옥졸은 스스로 ‘신장(神將)’이라 부르고, 노수(老囚)는 스스로 ‘마왕(魔王)’이라 부르며, 옥수로부터 여러 가지 물건을 착취당하고, 노수(老囚) 중에는 ‘영좌(領座)’, ‘공원(公員)’, ‘상무(常務)’ 등의 이름이 있어 신입 옥수에 대해 오학(五虐)의 형을 사용한다. 문을 들어서면 유문(踰門)의 예(禮), 방에 들어서면 지문(知門)의 예, 가(枷)를 벗으면 환골(幻骨)의 예, 일수(日數)가 경과하면 면신(免新)의 예를 강요하였고, 밥이 운반되어 오면 밥을 빼앗고, 옷이 차입되면 옷을 빼앗는다. 석대(席代), 신유대(薪油代) 등 여러 가지 주구(誅求)가 있다.’ 또한 ‘주현(州縣)의 옥(獄)을 보면 장후(牆朽)하고 벽이 무너져 수선을 요하는 곳이 적지 아니하고, 옥리(獄吏) 중에 뇌물을 받고서는 중죄 범인의 편의를 보아주는 자가 있다. 하루 종일 갈증을 호소하여 물을 요구하고서 이를 벽에 부어 약하게 하고 파옥(破獄)을 기도하는 자도 있다. 지방 수령(牧)은 5일에 한번씩은 옥을 순회감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등등’이라고 하는 것 매우 기탄없이 적고 있다. 이 기록은 정약용이 당시 옥내의 실상이 이와 같은 것을 개탄하고, 탐리(貪吏)를 경책(警策)하는 목적에서 저술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멀리 내려와 1865년(고종 2년) 「대전회통」이 완성되었으며 그 형전 중에 구금에 관하여 아래와 같은 규정이 열거되어 있다. 다만 이는 새롭게 만들어진 규정은 아니라 종전에 시행되어 온 것과 종래 법전 중에 있었던 것을 본 법전 중에 망라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즉 아래와 같다.
43) 1821년에 저작한 것
44) (역자주) 주구(誅求) 관청에서 백성의 재물을 강제로 빼앗아 감
(1) 장형(杖刑) 이상이 아니면 구금할 수 없고, 문무관(文武官) 및 내시부(內侍府), 사족부녀(士族婦女), 승인(僧人) 등은 계문(啓聞)한 후에 구금해야 한다.
사죄(死罪)를 범한 사람이라면 먼저 구금한 후 계문한다.
(2) 직수아문(直囚衙門) 외에 비변사, 포도청은 직수를 하고, 그 외의 각 관아와 군문(軍門)에서는 마음대로 직수하는 때는 엄중히 추문(重推)한다.
(3) 각 아문에서 사람을 구류하는 폐단은 이를 금지하고 또한 중대한 공적인 일이 아닌한 형조와 한성부(京兆)에서도 구류해서는 안된다.
(4) 부모로서 자식을 대신하거나 형으로서 동생을 대신하거나 처로서 남편을 대신하여 구금하는 것을 엄금한다.
(5) 나이 70세 이상 15세 이하인 자는 강도와 살인죄 외에는 구금해서는 아니한다.
또한 1866년(고종 3년)에 제정 반포된 법전인 「육전조례(六典條例)」의 중에는 구금 및 계호에 관해 아래와 같은 규정을 새롭게 마련하였다.
(1) 부모 형제가 아니면 벽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고, 또 이례(吏隸)라 해도 출입을 허가하지 아니한다. 여옥(女獄)은 가장 근엄하게 하고 물과 불, 음식이라 해도 모두 틈문(闖門)으로 전급(傳給)하게 한다.
(2) 여름에는 가(枷)와 유(杻)를 깨끗이 씻고, 자주 감옥을 청소하고, 겨울에는 두꺼운 고석(藁席)을 급여하고 구멍 난 틈을 진흙으로 막는다.
(1) 매일 저녁 무렵(晡) 후 옥관은 이례(吏隸)로 하여금 경중수(輕重囚)의 성명을 열록(列錄)45)하고, 나란히 세워 한명 한명씩 이름을 불러 그 가(枷)와 유(杻)를 자세히 살피며, 얼굴(面目)을 상세히 본 가운데 개별적으로 당수(當囚)의 간(間)46)으로 돌려보내고, 판자문을 닫고 이어서 큰 자물쇠를 채운다. 관리에 고함에 감옥무사(監獄無事)로 하고 개금(開金)47)을 거두어 입직관원의 거처에 둔다.
(2) 점검순경군(點檢巡更軍) 5명은 각 1경(更)을 맡은 인정(人定)48)하는 시를 기다리고 요령(搖鈴)을 가지고 통야(通夜) 옥간(獄間) 밖, 장문(墻門) 안을 순요(巡徼)하면서 소우(疎虞)에 대비한다.
(3) 다음 날 아침 해뜨는 시각에 관리에게 고할 때 쇄봉(鎖封)이 무사한 것으로 하여 당직사령으로부터 개금(開金)을 받아 옥문을 열고 음식과 물과 불 등을 들이게 한다.
45) (역자주) 열록(列錄) 가지런히 기록
46) 감방(監房)
47) 약시(鑰匙) / (역자주) 열쇠
48) (역자주) 인정(人定) 밤에 통행을 금지하기 위해 종을 치는 일
(1) 모든 죄수는 취수(就囚) 초에 호패(戶牌)를 거두고 성명을 상세히 물은 후에 옥에 들어가게 하고, 나중에 수도(囚徒)49)를 해당 조(該曹) 및 해당 사(該司)에 올리고, 밤낮을 방수(防守)50)하고 순경(巡更)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2) 고립군(雇立軍)은 낮에 즉 문을 지키고, 밤에는 즉 순경한다.
(3) 구금된 죄인 중에 병독자(病篤者)가 있으면 월령(月令)은 형증(形症)을 갖추어 형조에 보고한다. 경수(輕囚)이면 곧 보방하고, 중수(重囚)이면 즉시 상당한 약물로 구료(救療)51)한다. 만약 물고(物故)52)하면 곧 문(文)을 경조(京兆)로 옮긴다. 경조 낭관(郎官)은 친히 심검험(審檢驗)한 후 당해 부(該部)에 출급(出給)한다
본 규정은 구금과 계호에 관해서는 비교적 자세하게 방법을 기록하고 있고, 순수하게 옥무에 관한 규정이다. 조선에서 옥무에 관한 입법으로는 실로 이것이 최초라고도 할 수 있다.
조선시대 말기 즉 고종왕 시대 초기의 옥수 구금 실상의 일부분을 아는 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 1866년(고종 3년)에 외교(外敎)배격의 난에 조우하여 포도청 옥사에 구금되었던 프랑스 선교사 리델(Ridel)의 『경성유수기(京城幽囚記)』53)가 있다. 그중에서 처음 포도청에 구금되었을 때의 상황을 기록한 ‘얼마 안 되어 나는 차꼬가 채워졌다. 아울러 2명의 옥졸이 와서 차꼬54)에서 발을 빼는 비법을 전수해 주었다. 밤이 되어 나는 반듯하게 누웠다.’ 또 ‘2월 20일에는 20명 정도가 잡혀왔다. 남자는 좁고 음울한 방에 난폭하게 처넣어지고 족질(足桎)이 채워졌으며, 여자는 인접한 작은 방에 수용되었다. 여자는 족질을 채우지 않는 것이 관례이다.’
또 ‘포도청에는 좌우 각 두 개의 청(廳)이 있고, 각 청에 포졸 약 50명씩을 두었으며, 외에 사형집행인을 두었으나 이는 최하급민으로 하지만 옥리(獄吏) 중에 그 장(長)을 ‘참지’라고 부르고 두건에 경옥(硬玉)을 부착하였고, 또한 ‘통지’라 불리는 자가 있고 금환(金環)을 두르고 있다. 포졸은 ‘포교(捕校)’라고 하고 그 계급을 확인하는 것은 매우 어려우며, 그들은 통상 목패를 휴대하고 있다. 그들의 권력은 절대적이고, 수인을 강제하여 금품을 갈취한다.’
49) 명부(名簿)
50) (역자주) 방수(防守) 막아서 지킴
51) (역자주) 구료(救療) 구제하여 치료함
52) (역자주) 물고(物故) 죄를 지은 사람이 죽음
53) 山口正之 譯
54) 족쇄(足桎)
그리고 우포도청으로 옮겨지고 나서의 기록 중에는 ‘수인의 종류에는 세종류가 있다. 하나는 도적, 둘은 부채수(負債囚), 셋은 천주교도였다. 그중에서 천주교도가 가장 많았다. 도적은 가장 비참하고 밤낮 구별 없이 족질(足桎)이 채워져 있고, 개선(疥癬)55)에 침해되고 장독(杖毒) 때문에 살은 썩고, 게다가 기아(飢餓)에 고통스러운 형편이며, 말하자면 뼈에 가죽을 붙인 움직이는 시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밤에도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고, 지칠 대로 지쳐 깜빡 졸기라도 하면 옥졸이 발견하고 사정없이 손이고 머리고 부서지지 않을 정도로 때려눕혔다. 마치 지옥의 가책(苛責)56)을 받고 있는 듯한 모양으로, 만약 죽는 일이 있으면 병사라는 이름 하에 시체실에 유기하고 밤에 들어와 진사장(塵捨場)에서 불사른다.’, ‘거실은 지옥과 같고, 식사는 조석으로 쌀이 정말 조금뿐이어서 20일 정도 지나면 해골이 되어버린다.’, ‘천주교도는 도적과 거의 다름이 없고 외부와의 통신 등은 당치도 아니하다. 다만, 통칙으로 족질(足桎)은 채우지 아니한다. 그들은 특히 멸시(蔑視)받아 ‘쿠왕판’이라 불리었다. 아침저녁 두 번의 식사가 지급되지만 나와 최지혁(崔智爀)에게는 따로 주식(晝食)으로 고기국물 한 그릇을 대접받았다. ‘세월이 지날 때마다 아사 또는 병사의 광경을 멀리 바라보는 일이 많아져 갔다. 도적은 병에 걸려도 아무도 치료를 해주지 않는다. 또한 아무런 특권도 없으면 보호도 받을 수 없고 족질도 풀어주지 않고 최후의 일식(一息)까지 같은 대우를 한다. 4명의 도적이 옥졸에게 짓눌려져 시체실로 옮겨졌고, 밤이 되어 인부가 그 시체를 찾아 가마니에 싸서 마을 밖 성밖에 버리고 갔다. 만사가 그것으로 끝이다. 등등’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기록이 있다. 당시 구금상태의 참담한 광경을 지금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 다만 이것은 포도청옥에서의 일이지만 전옥서에서도 틀림없이 이것과 대동소이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선시대의 구금에 대해서는 대체로 이상 기술한 것과 같고 그동안 폐해가 연속하였으며, 반옥(反獄), 월옥(越獄) 또는 탈환 등과 같은 계호상 중대한 사고는 의외로 적었다. 다만 연산군 때에 전 이조참판 성희안(成希顏) 등이 연산군을 폐위하고 진성대군(晉城大君)을 옹립하려고 군사를 일으키고 옥문을 열과 죄수를 석방하여 모두 이를 군사로 나아가도록 한 적이 한 번 있었던 것과 최근에 이르러 1822년(고종 19년)에 병제개혁으로 인해 구식 군졸은 불평을 품고 폭도화하여 선혜청(宣惠廳)과 민겸호(閔謙鎬, 1838~1882) 및 경기감사 김보현(金輔鉉)의 집을 시작으로 민(閔) 씨의 여러 집을 습격하여 낭적(狼籍)을 다하고, 동시에 감옥을 열고 포청을 무너뜨리고 죄수를 석방하는 폭행을 한 적이 있었을 뿐이다.
55) (역자주) 개선(疥癬) 옴
56) (역자주) 가책(苛責) 몹시 심하게 꾸짖음
조선에서 형이란 즉 범죄에 대한 제재로 과해지는 것이라고 하는 관념을 가지게 된 것은 형법대전 제정 이후의 일로, 그 이전까지는 범죄의 제재로서 과해지는 것 또는 범죄 사건 심리 상 필요에 따라 고신(拷訊)의 수단으로 과해지는 것의 양자를 합쳐서, 똑같이 이것을 형이라고 불러왔다. 합쳐서라고 하 더라도 양자를 완전히 구별하지 아니하고 혼동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즉 범죄의 제재로서 과하는 형에 대해서는 그것이 성문률로 존재하게 된 시대에는 물론, 오랜 옛날의 불문율 시대에도 형률상으로 형명(刑名)이 존재하였고, 또한 그 형의 질 및 양, 또 속(贖)에 관해서도 대략 일정하였으며, 무분별하게 변경하는 일은 없었다. 다만 형률 소정의 형은 변경하지 않았으나 그 형만으로는 다양한 요구를 충족할 수 없는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소위 법외의 형이라고 하는 것이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
또한, 고신의 수단으로 과하는 고문형에 이르러서는 율령 등에 아무런 근거를 가지지 아니하고, 단지 어느 시대부터인가 행해져 온 것을 관습적으로 답습하거나 또는 각 시대에 새롭게 고안된 것을 실시하고 있는 동안에 자연히 공인 관용되는데 지나지 아니하였다. 제재형 중 법외의 형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고문형과 법외의 형은 완전히 무통제였고, 그 종류도 많았으며 실행방법도 역시 다양한 형식으로 자유롭게 마음대로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집행은 자연히 준혹가학(峻酷苛虐)이 극도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러한 형의 집행은 제재형에 이르러서는 주로 행형의 직무에 종사하는 자가 그 임무를 맡은 바는 물론이고 전적으로 옥무(獄務)었지만, 고문형에 이르러서는 심리 심문을 행하는 자가 여기에 종속하는 이례(吏隷)로서 행한 것으로 집행자는 정해져 있지 않았다. 따라서 옥무는 아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제재형에 대해서만 기술하고 고문형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제재형은 고대에는 매우 단순하였고, 체형으로는 생명형만이 있었으며 그밖에는 배상 또는 징장(徵贓)과 같은 재산형과 노비로 몰입하는 인격형이 있었다. 기자(箕子)의 금팔조(禁八條)에서 보이는 제재형도 체형으로는 사형만이 있었으나 집행방법은 명확하지 아니하다. 고구려에서의 형은 체형으로 사형과 장형도 있었고 사형집행 방법은 반역죄에 대해서는 화거(火炬)를 가지고 신체를 초란(焦爛)한 후 참수할 뿐이었다. 백제에서는 참(斬), 유(流), 징장(徵贓), 종신금고57), 신라에서는 상세한 것은 알기 어렵지만 사형, 유형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와 같이 삼국시대에는 체형으로 사형, 유형, 장형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도형(徒刑)에 대해서는 당시는 아직 존재하고 있지 아니한 것 같다. 고려 시대에 이르러서는 당율(唐律)에 따라 고려형법을 제정하고 사(死)58), 유, 도, 장, 태의 5형이 존재하게 되었지만, 그 집행방법에 대해서는 아무런 규정도 없었고 또한 실제 집행상황 등에 대해서도 전해지는 것이 없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이를 알 수 없지만 당시 이미 형률 소정의 형벌 외에 소위 법외의 형이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매우 왕람(枉濫)으로 흐르고 있었던 것 같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초기부터 대명률(大明律)을 자국의 율(律)과 동일시하고 평소 이것으로 조선의 실상에 적용하는 데에는 보조법규의 설정이 필요하여 태조 갑술(甲戌)에 경국원전을 제정하였고, 이어서 세종왕 경술(庚戌)에 경제육전을 제정하였다. 성종왕 신유(辛酉)년에 이르러 다시 경국대전을, 영조왕 갑자(甲子)년에 속대전을, 정조왕 을유(乙酉)년에 대전통편을, 고종왕 을축(乙丑)년에 대전회통을 각각 제정 반포하였다. 그리고 경국대전 용율조(用律條)에 ‘대명률을 적용한다.’이라고 규정하였기 때문에 그 효력에 따라 대명률은 조선에 원용되게 되었다. 그 후 속대전에서는 ‘경국대전에 의거 대명률을 적용하되 경국대전과 속대전에 해당 율문이 있을 경우에는 두 법전에 따른다.’라고 규정하고, 대전회통에서도 ‘원전(元典)59)에 의거 대명률을 적용하되 원전과 속대전에 해당 율문(律文)이 있을 경우에는 두 법전에 따른다.’라고 규정하여 보다 더 대명률 원용의 취지를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대명률에 따른 형명 및 형벌적용 방법은 당해 율의 책 첫머리에 게재한 오형도(五刑圖)에 따라 명확하며 즉 아래와 같다.
57) 금고란 오늘날 금고형과는 의미가 달라, 거소를 한정해서 마음대로 출입을 금지한 것으로 일본 구막부시대의 폐문(閉門)의 일종이다.
58) 참(斬), 교(絞)
59) (역자주) 경국대전
대명률 오형도
가. 사형(死刑)
고대의 사형은 어떤 종류가 있는가는 명백히 밝힐 수 없지만, 고려 형법이 제정되고 나서는 참(斬)과 교(絞)의 두 종류가 있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부터도 대명률에 따라 참과 교의 2종류만 있었다. 형률상 사형은 이와 같이 참(斬)과 교(絞)의 2종류에 의해지고 있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종전부터 관습적으로 전해져 온 방법에 따른 여러 종류의 사형이 전과 다름없이 존속하였다. 즉 ‘거열형(車裂刑)’, ‘책형(磔刑)’, ‘약살(藥殺)’ 등이라 불리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각종 사형에 대해 그 변천 및 집행방법 등에 관해 약술하면 아래와 같다.
1) 참형(斬刑)
본 형은 참수형(斬首刑)이라 부르고 몸과 머리는 달리하는 형이다. 상고에 시작되어 근세에 이르기까지 존속해 온 것이지만 1894년 서정혁신 때 단행의 칙령으로 본형을 폐지하고 사법(司法)상 사형에는 교(絞)만을 그리고 군율의 사형에는 포(砲)만을 사용하는 것으로 정하였다. 이어서 1896년에 형율명례를 제정하여 사형은 교(絞)로 한다고 명확하게 규정하였으나 1900년에 이르러 참형을 부활하기에 이르렀다. 다만, 이것은 일시적인 필요로 나온 것으로 1905년 제정된 형법대전에서는 완전히 참형을 폐지하였다. 참형집행방법에 대해서는 숱한 변천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문헌의 기록도 없어 상세한 것은 알기 어렵다. 또 그 집행장소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대역 범인의 처형은 남대문 아래에서 집행한 시대가 있었다. 그리고 그때에는 국왕이 문의 누상에 왕림하고 그곳에서 친히 옳고 그름을 가리고 처형하였으며 이것을 임문정형(臨門正刑)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 언제 무렵에 있었는가는 판명하기 어렵지만 중대 범인의 사형은 군중을 경고하기 위해 종로 네거리에서 집행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역사상 시장에서 형을 집행한 것을 기록한 것은 위와 같은 경우를 말했을 것이다. 1896년에 국왕독살사건의 범인 김홍륙(金鴻陸)을 형을 집행하고 그 사체를 효시한 것도 종로에서 하였다. 고종왕 시대 초기에 있어서는 참형 집행장소 즉 사치장(仕置場)은 세남터60), 당고개61), 무교62), 서소문 밖63)의 4곳이었다. 이전에는 동대문 부근에서 집행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대시수(待時囚)에 대한 참형 집행은 새남터와 당고개에서 하였지만, 불대시수(不待時囚)에 대해서는 집행을 서둘렀기 때문에 옥에서 가까운 무교 위에서 집행하였다. 또 서소문 밖에서 집행한 것은 대시수이였지만 그때의 사정상 서두르는 경우에는 새남터까지 압송하지 아니하고 도중에 이곳에서 집행을 완료하였다.
참형 집행의 방법에 대해서는 역적을 죽이는 때는 조종(祖宗) 이래의 관례로서 먼저 죄인의 머리를 참하고 이어서 팔을 절단하고 이어서 다리를 절단하는 순서로 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방법을 하는 참형은 오살(五殺)이라 이름 붙여 사형 가운데 가장 중한 극형이라 불리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 형명을 듣는 것만으로도 전율을 금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오살이라고 하는 이름은 오늘날 여전히 세상 사람들에게 위하의 말로 사용되었고, 혹은 속담 가운데에도 남아있을 정도로 유명한 형명이었다. 인조왕이 심기원(沈器遠)을 오살의 형으로 죽였을 때는 순서를 거꾸로 하여 먼저 팔을 절단하고 이어서 다리를 절단하고 최후로 머리를 베는 순서로 집행하여 실로 잔학무도를 다하는 행형을 했다고 구전되어 오고 있다.
참형 집행에는 대시수와 불대시수의 2종이 있었다. 대시수는 춘분전 추분후 입행하고, 불대시수는 재판 확정 후 때를 기다리지 아니하고 즉시 집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죄질에 따라서 구별이 있었기 때문에 보통범죄의 참형은 대시수의 예에 따라 실시하였다.
60) 한강 연안으로 사장당현(沙場堂峴)이라고 불렀다.
61) 전기 새남터와 제방 1개를 떨어진 약간 못 미치는 지점에 있는 곳의 야원(野原)으로 지금의 용산 철도관사가 설치된 부근이다.
62) 지금의 광화문 우편국으로부터 약 1정 정도 동쪽이 태평로로 통하는 도로의 중간을 횡당하는 다리이다.
63) 의주로와 서소문을 통하는 도로의 교차점
최근 고종왕 사대의 참형 집행은 세남터에서 하는 대시수는 형목(刑木)에 의지하여 머리를 묶어 올려두고 몸과 머리를 완전히 절단하였지만, 무교 또는 서소문밖에는 형목에 묶어올리는 것을 하지 아니하고 참하기 때문에 머리는 완전히 떨어지지 아니하고 몸과 머리는 잘리고 남아있는 피부에 의해 붙어 있는 것이 예가 되어 있었던 것같다. 또 새남터 및 당고개에서 한 참형 집행의 실황에 대해서는 여러 번 이것을 목격한 적이 있었던 모 늙은 노인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 두 곳의 사치장은 예부터 많은 사형을 집행한 적이 있는 장소로 천주교의 사교 베르뇌64) 이하 세 명의 선교사를 괵수(馘首)하여 3일 동안 효시한 것도, 그 후 선교사 푸르체 및 부치니코라, 조선인 전교사 정의배(丁義培), 우세영(禹世英)을 참괵하고 효시한 것도 모두 이곳이었다. 그래서 기(氣)의 탓인지 그 장소에는 피비린내의 악취가 떠돌고 있고 또 귀신의 울음이 두런두런하는 소리도 들려 세상 사람들은 주간에 그 부근을 통과하는 것조차도 두려워하였다.
참형 집행방법은 먼저 죄인을 사치장으로 압송하는 데는 죄인을 옥사로부터 끌어내어 곧바로 수레에 싣고 소가 끌도록 하고, 그때 소달구지에 싣는 데는 죄인의 양손을 넓게 벌리고 양다리를 벌려 답대 위에 기립시킨 가운데 소달구지의 상자에 붙들어 메어두고, 처음에는 서서히 끌고 가지만 도중에 남대문을 지날 무렵에 이르면 죄인이 타서 기립하고 있는 답대를 제거하면 죄인의 신체는 하늘에 메달려 있는 것 같은 형태를 보이고, 그때 소에게 채찍을 가해 내달리게 하였다. 이 경우 죄인은 신체를 매달려 있고 소의 질주로 인한 차체의 동요 때문에 몸은 양손도 끊어질 듯이 미란(彌蘭)하고 입안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그 참상은 실로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따라서 죄인의 고통은 말할 수 없고, 형장에 도착할 무렵에는 거의 죽은 사람과 같은 상태가 되었다.
형장에는 약 50척 사방 내외의 넓이에 막을 둘러쳐서 구경꾼이 밀치고 들어오는 것을 금하였지만 막의 끝자락으로 몰래 침입하여 구경하는 자가 많았고 역인(役人)은 이것을 제지하지 아니하였으며, 결국 구경꾼이 밀고 들어오는 것을 그대로 두는 것이 예사였다. 형의 집행은 형장의 중앙에 세워져 있는 기둥65)의 상부에 설치되어 있는 고리에 긴 줄을 걸고, 죄인을 그 기둥 바로 앞에 있는 답대 위에 기립시키고, 상투를 풀어서 적승(吊繩)의 한끝과 단단하게 묶어 두고 그 후 줄의 다른 한 끝을 끌어당겨 죄인을 기둥 옆에서 매달려 올려가도록 하고, 죄인이 답대 위에 약간 설 정도가 되었을 때 줄을 멈추는 동시에 죄인이 서 있는 답대를 철거하면 죄인은 마치 액사인(縊死人)과 같은 상태로 아래로 느려뜨려 졌다. 그때 하수인은 칼을 잡고 아래로 느려뜨려 져 있는 죄인의 인후부를 집중하여 칼질하고 여러 번 칼을 가해 목과 몸뚱이를 분리시켜 끝냈다. 그리고 그 수급(首級)은 대 위에 놓고 입회한 포도대장의 면전에 제출하여 검시를 받고, 끝나면 그 장소에서 3일 동안 효시하고 그 후 몸둥이와 함께 고포로 싸서 인수인에게 교부하거나 또는 매장하였다.
64) (역자주) 시메옹프랑수아 베르뇌(Siméon-François Berneux, 1814.5.14.~1866.3.7.)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프랑스인 선교사로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한국 이름은 장경일(張敬一)이다.
65) 그 길이나 굵기도 전봇대와 비슷하다.
또한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은 도예(徒隸)라고 부르는 용인급(傭人級)의 관리 중에 행형쇄장(行刑鎖匠)이라고 하는 직명의 자가 이에 적합하였지만 사인(死人)66) 중에 자원하는 자가 있는 때는 이자로 하여 집행자로 대신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는 관리가 이를 행하지 아니하고 죄인 중 사형에 해당할 정도의 중죄수 중에서 골라내어 본인의 의견을 듣고 나서 그를 집행자로 하였다. 집행자가 된 자에 대해서는 사형에 처하지 아니하고 오랫동안 옥내에 유치하여 사형의 집행을 요하는 자가 생길 때마다 그로 하여 집행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 집행자를 구수(久囚)라고도 불렀다. 또 행형을 구수(久囚)가 하는 경우라도 관리가 이를 하는 경우라도 망니니라고 불렀다고 한다.
참형 집행 시에는 형장에서 본인이 직접 목판에 쓰여져 있는 형집행장을 읽게 하였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지만, 다른 설은 이를 부정하고 형대 위에 세워졌을 무렵에는 본인은 거의 반죽음의 상태여서 집행장 등을 낭독할 수는 없었고, 관리가 재판서와 같은 서류를 읽어 들려주고 틀림없음을 물어서 밝히는 것과 같은 일은 있다고 한다.
집형자에 관한 하나의 삽화(揷話)가 있다. 참형을 집행할 때는 가족에 대하여 집행 일시를 알려주는 예가 있는데, 결국 집행일에는 가족이 와서 집형자에 대해 뇌물을 주는 것으로, 그 경우에는 집형자는 형을 받는 죄인에 대해 가능한 한 고통을 주지 않도록 하기 위해, 칼을 치켜들고 단번에 베어져 버리지만, 뇌물을 주는 사람이 없는 경우에는 몇 번이라도 칼을 가해 참혹하게 죽이는 방법을 써서 가능한 한 오랫동안 죄인을 고통스럽게 하였다고 한다.
집행 후에는 머리는 효시하지만, 효시는 옛날에는 거리에서 한 적도 있고 최근에는 형장에서 나뭇가지를 세 개를 짜 맞추어 들개가 달려들 수 없을 정도의 높이에 묶고, 그것을 세 갈래로 교차하여 나누고 매듭에 머리카락을 묶어 머리를 매달아 늘어뜨려 두고 말리거나, 혹은 장대 끝에 목을 찔러서 말렸다. 또한, 햇볕에 말리는 곳은 형장이었지만 때로는 그 대안의 노량진에서 한 적도 있었다. 예전에 천주교도를 처형할 때 남종삼(南鐘三)과 홍봉주(洪鳳周)는 서소문 밖에서 참해졌으나 효수는 냉동(冷洞)에서 하였다고 하고, 효수 장소는 최근에 이르러서도 반드시 형장에서 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66) 사형을 선고받은 자
참형은 대체로 전술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집행하였지만 ‘역적참항(逆賊斬項)67)’이라고 불리는 참형방법은 죄인을 뒤로 결박하여 풀 위에 엎드리게 하고 후두부에서 참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전해지고 있는 바에 따르면 참형을 집행하는 경우에 망나니(행형자)는 칼을 머리 위로 쳐든 채 잠시 어지럽게 춤을 추며 스스로 흥분상태에 빠져들었을 때, 그 여세로 칼을 내려쳐서 한 칼에 베어 끝내는 방식도 있었다고 한다. 후년에 이르러 참형은 옥내에서 밀행하게 되고 나서는 감옥 구내 땅 위에 엎드리게 해 놓고 참(斬)하였다고 한다.
또한 참형에 사용했던 칼은 행형도자(行刑刀子)라고 하고 예로부터 그 실물은 동일품으로 변경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숫자까지 정해져 있었으며, 즉 육전조례 중에 행형도자는 대소 합하여 세 자루로 한다고 정해져 있었다. 그 실물은 지금도 서대문형무소에 보관되어 있으며 그 형상은 마치 큰 산도(山刀)와 같이 칼의 길이는 2척 남짓하고, 반대의 칼 두께도 쌍날이어서 상당히 무겁고, 길이는 석 자(3척) 정도의 세공하지 않은 목제손잡이가 달려있다. 전혀 잘릴 것 같지 보이지 않는 완전히 둔한 칼로, 단지 칼의 중량으로 두들겨 참해지는 것같이 생각되었다. 참형을 집행할 때에 땅 위에 엎드리게 해 놓고 참한 것은 칼이 둔하기 때문에 일본의 옛날의 참죄와 같이 앉게 한 채 목을 늘리게 해 놓고, 베어 떨어뜨린다고 하는 식으로 목을 벨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67) (역자주) 역적참항(逆賊斬項) 역적의 목을 벰
2) 거열형(車裂刑)
본형은 형전에 정해졌던 것이 아니라 즉 법외 형의 일종이다. 옛 진나라 때 상앙(商鞅)이 창안한 형으로, 그것이 조선에 전래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본 형의 집행 방법은 먼저 나란히 세워진 두 개의 소달구지에 죄인의 두 다리를 벌려서 묶어두고, 이것을 끌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달구지가 회전하는 동시에 죄인의 신체는 좌우로 당겨서 찢어 죽게 하는 참형이다. 본형은 이를 사용한 예는 그다지 많이 듣지 못했지만, 조선 철종왕 때에 반역을 도모했던 사람을 잡아 그 주모자에게 이 형을 과하였다고 전해지는 외에 대원군이 집권하였을 때, 포도대장 이경하(李景夏)로 하여, 천주교 선교사 베드로 등 신도를 한강 강언덕의 사포리68)에서 형살하도록 하였을 때, 베드로에게는 이 거열형을 과하였다 한다.
68) 세남터
3) 책형(磔刑)
본형에 대해서는 연혁이나 집행방법도 상세한 것은 알 수가 없다. 다만 조선시대 세조왕 때 류성원(柳誠源)의 시체에 대하여 본 형을 집행했다고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4) 약살(藥殺) 또는 사약(賜藥)
본형은 독약을 마시게 해서 죽이는 것으로 옛날부터 전해져 온 사형의 한 종류이지만, 본래부터 형전에서 인정되었던 것은 아니다. 이것은 왕족 또는 사대부 그밖에 특별한 사유가 있는 자에 대해 그 죄에 빠진 경우, 본인의 명예를 존중하여 극형을 시행함에 견딜 수 없을 때 국왕으로부터 독약을 내리어 죽이는 것이다. 그리고 독을 마시게 하는 것은 옥중에서 한 경우도 있지만 많게는 유배지에서 하거나 또는 유배지로 압송하는 도중에 마시게 한 것으로 그다지 옥무에 관련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상세한 것은 여기에서 생략한다.
5) 각종 학살
하나하나 형명을 붙이지는 아니하였으나 사형방법으로 시행된 것에는 여러 가지 학살이 있었다. 이것은 법전 소정의 참형 또는 교형으로는 충분히 형의 위력을 발양(發揚)할 수 없어서 달리 경계의 효력이 작은 것과 또한 범죄에 대한 보복감을 만족시킬 수도 없었기 때문에 자연히 여러 가지 법외의 형이 생겨나고 또는 참혹한 집행 방법이 생겨나게 되어, 그것이 형정의 문란에 편승하여 행해져 왔다. 그리고 이 학살적 사형은 여러 가지 종류가 있었으나 그것은 반드시 감옥의 손에 의해 행해진 것에 한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그 상세한 것은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참고를 위해 한두 가지 예를 들면 세조왕 때 단종의 복위를 꽤 하여 구금된 성삼문(成三問)을 죽일 때 작철(灼鐵)로 다리에 구멍을 내고 팔뚝을 자르게 하였으며, 또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유응부(兪應孚)에 대해서도 같은 수단을 사용하여 작철을 복부 아래에 두고 양다리의 회처(會處)에 기름을 붓고 달여서 살육하는 것과 같은 형을 시행하였다. 또 대원군 집정시의 일로 서교도(西敎徒)를 학살한 경우에도 여러 가지 죽이는 방법을 시행한 적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지금까지 그다지 예가 없었던 죽이는 방법을 한 것은 교도를 가로로 눕게 하고 이에 대해 기름종이를 물에 적시어 콧구멍에 붙여두고 호흡을 막고, 리고 여기에다 불을 붙여서 질식사에 이르게 하는 것과 같은 형을 시행하였다.
6) 교형(絞刑)
본 형은 고려형법 시대 이후 참형과 함께 있었던 사형으로 참형, 그 밖의 육형(肉刑)에 비해, 본 형이 사용된 경우가 적었던 것 같다. 또한 어느 시대에는 거의 잊힌 것같이 이를 사용하지 아니하여 유명무실하게 되었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필경 형법관이 여러 해 동안 행형의 참혹성에 길들여졌기 때문에 단조롭게 관혈형(觀血刑)에 적합하지 아니한 교형과 같은 것으로는 달리 경계성이 부족하여 형으로서 어딘가 부족한 것처럼 느끼고, 그 때문에 교형을 과해도 될 사람에게도 참형 또는 기타의 참혹한 형벌을 사용한 경향이 있었던 결과일 것이다. 1652년(효종 3년) 하교에서 ‘교형에 처하는 죄인을 추살(椎殺)해 버리는 것은 법의 의도에 반하는 것이다. 죽음은 같은 것으로 교살해야 하는 자는 목메어 죽여야 하고, 추살해서는 아니된다.’라고 경계한 적이 있었던 것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집행은 옥내에서 집행한 적도 있지만, 교외의 벌판이나 숲, 늪지 등과 같은 장소에서 집행한 적도 있다. 옥내에서의 집행은 감방에서 떨어진 건물 내의 대들보에 교승을 걸고, 바닥은 판자를 떼어내고 바닥을 깊게 파낸 후 그 위에 매달았다. 교외에서 집행하는 것은 다수에 이르거나 또는 달리 경계의 필요가 있을 때로 좌우에 두 개의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대들보를 옆으로 걸친 후 여기에 줄을 매달고, 수형자는 손을 뒤로 묶어서 답대에 세우고 목을 맨 가운데 뒤에서 답대를 차서 빼어 아래로 떨어지게 하여 죽였다. 여러 사람을 집행할 때는 긴 대들보에 나란해 매달고 일시에 집행하였다. 지방에서의 교형은 대체로 교외에서 집행하였다고 한다. 또 포도청 옥에서의 교형 집행은 감방에 인접하여 설치된 형장의 중앙에 판자벽으로 칸막이를 하고 그 벽의 상부에 구멍을 뚫어 그곳으로 교승을 통과시키고, 줄의 한쪽에 수형자의 목을 묶고, 닻을 말아올리듯이 옆방에서 줄을 당겨 목을 졸라 죽이는 것과 같은 방법을 취하였다.
7) 능지처참·육시형(戮屍刑, 일명 六支刑)·추시율(追施律)
이러한 형은 모두 죽은 자에 대해 시행한 것이다. 능지처참은 대역죄를 범한 사람에게 과하는 최대의 극형(極刑)으로 소위 인회(引廻)69)이다. 즉 범인을 단번에 벤 후, 다시 그 시체에 대해 ‘육시형(戮屍刑)’을 더하고 잔해(殘骸)는 이를 나누어 효(梟)하는 것이다. 육시형(戮屍刑)은 육지형(六支刑)이라고도 하고, 사체에 대해 먼저 그 목을 베고 이어서 좌우 팔, 좌우 다리 및 창자의 순으로 사체를 여섯 개로 나누어 자르고 그 잔해(殘骸)는 소금에 절여서 각지에 나누어 보내 능지(凌遲)하는 것이다. 본 형은 광해군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광해군 재위 중에는 여러 차례 대옥(大獄)을 일으켜서 가혹한 법령과 혹독한 형벌로 백성을 괴롭히는 등 형정문란(刑政紊亂)이 최고 꼭대기였다고 일컬어지고 있을뿐더러 참혹은 비할 바가 없는 이러한 형과 같은 것이 존재했을 것이다.
69) (역자주) 인회(引廻) 끌고 다님
그러나 본 형은 광해군 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1363년(공민왕 12년) 반역을 꽤 한 김용(金鏞)을 베고 그 신체를 지해(支解)70)하여 각 도에 돌리고 머리를 경사(京師)에 전하여 시장에 효(梟)한 사실이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광해군 때에 창시된 것은 아닌 것 같다. 어쩌면 오랫동안 폐절(廢絶)에 속해 있었던 것을 광해군 때에 부활 것을 창시한 것처럼 말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본 형은 인조왕 시대에 엄금되었지만, 실제로는 이것이 폐지되기에 이르지 않았고 영조왕 때 반역을 꾀해 죽은 윤광철(尹光哲)과 이하징(李夏徵)의 사체에 대해서도 이것을 과하였다. 즉 윤광철에 대해서는 머리와 팔다리를 각지에 전시하고, 이하징에 대해서 머리를 나주(羅州)에 매달고, 양 팔은 호남에, 양 다리는 영남에 나누어 보내 효(梟)한 적이 있었다.
그로부터 멀리 내려와 고종 때에 이르러 상해에서 암살된 김옥균(金玉均)의 주검(屍)을 조선으로 환송시키고, 대역죄로써 육시형(戮屍刑)에 처하였다. 시신의 팔다리를 각각 찢어 머리와 몸통은 한강 양화진(楊花津) 근처에 효(梟)하고, 팔과 다리는 팔도(八道)에 나누어 효(梟)하고, 몸은 한강에 던져서 어복(魚腹)에 장사지냈다고 한 사실이 있기 때문에 실제로 1894년 12월의 처참능지(處斬凌遲) 등의 형에 대한 폐지령이 내려지기까지 존속하고 있었다.
<김옥균 효시>
추시형(追施刑)71)이라고 하는 것은 범인이 아직 형에 처해지기 전, 고문(拷問)으로 죽어버리고 만 사람에 대해 형전(刑典)에 정하는 형을 과하는 것이다. 본형도 예로부터 실시되어 온 제도이지만, 1756년(영조 32년)에 제폐(除弊)72)되었다. 이상의 여러형은 모두 죄인의 사체에 대해 가해지는 것으로 집행은 감옥의 일로 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옥제상 범주에 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상세한 기술은 생략한다.
71) (역자주) 추시형(追施刑) 죽은 뒤에 실시하는 형
72) (역자주) 제폐(除弊) 폐단을 없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