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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칼럼

‘나의 육각형’을
향한 힘찬 발걸음

글 · 이준섭 문화칼럼니스트

다양한 분야에 걸쳐 완벽에 가까운 모습을 갖춘 이른바 ‘육각형 인간’이 MZ세대의 선망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이들 중 일부는 세상이 제시한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위축되기도 하지만, 진취적인 MZ세대는 자신만의 육각형 그래프를 설정하고 이를 가득 채우기 위해 하루하루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다.

선망의 대상이 된 육각형 인간

우리는 게임이나 만화 속에서 육각형 그래프와 종종 맞닥뜨린다. 각 꼭짓점에 힘·민첩성·체력·지력 등 캐릭터의 능력을 설명할 수 있는 6개 항목을 붙인 뒤 현재 능력치에 맞춰 점을 찍고 이를 하나로 연결하면 다채로운 다각형이 완성되는데, 이를 통해 캐릭터 간 능력을 한눈에 비교· 분석할 수 있다. 다각형의 모양이 가득 찬 육각형에 가까울수록 모든 능력을 두루 갖춘 소위 ‘완성형 캐릭터’로 평가 받는다. 여러 콘텐츠에서 육각형 그래프를 자주 접해 온 MZ세대는 이를 현실로 소환했다. 게임과 달리 현실 속 육각형 그래프의 각 꼭짓점에는 외모·학력·재산·직업·집안·성격·특기 등 보다 구체적이면서도 수치화할 수 있는 항목이 붙는다. 이 육각형을 가득 채웠다고 여겨지는 인물들은 선망의 대상이 된다.
MZ세대는 부모 세대에 비해 높은 경제적 수준과 좋은 성장 환경 속에서 자랐으며, 자존감 교육도 충분히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모든 면에서 완벽한 ‘육각형 인간’을 꿈꾸며,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면 심적으로 힘들어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현상이 발생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또래의 삶을 더욱 폭넓게 비교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 핵심 요인으로 꼽힌다. 예전에는 동네·학교 등에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친구들 정도가 비교 대상이었지만, 이제는 SNS를 이용하는 전 세계 또래와 나를 비교한다. 극도로 정제된 삶의 단편만을 보여주는 SNS 속에는 부족함 없음을 뽐내는 게시물이 가득하다. 이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면 자칫 자신의 삶이 남루하게 느껴질 수 있으며, 행복과 성공의 기준 또한 아득하게 멀어질 수 있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의 주장대로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라면, 전 세계에서 잘나가는 또래들의 SNS를 엿보며 욕망의 크기를 키운 사람들은 도리어 그 욕망 때문에 불행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

나만의 육각형 그래프를 그리다

그렇다고 해서 육각형 인간을 추구하는 트렌드가 부정적인 측면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부풀어 오른 꿈과 욕망을 좌절의 재료가 아닌 자기계발의 원동력으로 삼는다면, 판타지적 요소가 듬뿍 섞인 SNS 속 육각형 인간이 아닌 나만의 육각형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다. 게임 속 캐릭터의 꽉 찬 육각형 그래프는 게임 안에서만 힘을 발휘할 뿐, 현실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SNS 속 인물들의 육각형 그래프도 마찬가지다. 일상의 극히 일부분을 선별해 내보임으로써 육각형 인간으로 불리게 됐을 뿐, 이들 또한 SNS 밖에서는 수많은 현실적 문제들과 마주하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또 한 명의 인간이다. 더군다나 이들의 삶은 게임 속 캐릭터의 능력이 현실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이 우리의 생활에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이 점을 깨닫는 순간, 육각형 인간의 정의는 저마다의 삶 속에서 긍정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 집안·외모 등 어쩔 수 없는 부분들을 육각형 그래프에서 과감하게 빼고, 그 자리에 내 분야의 최고가 되기 위한 특정 지식이나 기술 등을 넣으면 그 자체로 자기계발의 동기부여가 된다. 사랑·친환경·우정 등 수치화하기 힘든 요소들도 원한다면 얼마든지 추가할 수 있다. 요컨대 우리는 누구나 각자의 인생과 세계관에 꼭 맞춘 육각형 그래프를 만들고 채워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는 발전적인 자극이 되기도 하지만, 허망한 꿈과 무력감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 둘 중 어떤 방향을 택할지는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앞으로 우리가 꿈꿔야 할 육각형 인간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새해를 맞아 한 번쯤 깊이 생각해 볼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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