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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동행

우리는 한마음

“은퇴란 끝이 아니라, 마음속 열정이 사라질 때 비로소 찾아온다.” 70대의 그는 여전히 배우고자 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경험으로 남을 돕고 싶어 했고, 덕분에 그가 속한 회사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벽을 세우던 사람들의 마음이 열렸으며, 회의적이던 젊은 대표의 태도 또한 어느새 ‘호의’로 바뀌었다. 영화 <인턴> 속 ‘벤’의 이야기다. 그리고 어쩌면 대한민국교정동우회 목포지회(이하 목포지회) 김성봉 회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 글 서선미
  • 사진 홍승진

멈추지 않고 성장하며
함께하는 삶을 찾아가다 김성봉 대한민국재향교정동우회 목포지회 회원

대한민국재향교정동우회 광주지회 지회장

멈춤 없는 마음, ‘성장’ 향한 걸음

‘성공’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반짝인다. 하지만 어떤 성공은 정점에서 멈추고, 어떤 성공은 실패로 돌아서기도 한다. 길 초입에서는 박수와 찬사를 듣더라도, 끝내는 덩그러니 홀로 남겨질 수 있다. 하지만 ‘성장’은 다르다. 끝이 없다. ‘나’를 갈고닦아 오늘보다 나은 내일로 나아가는 것, 그 과정에서 관계를 만들고 공존하는 것, 성장의 길에서는 언제나 ‘사람’이 함께한다.
<인턴>의 벤이 바로 그랬다. 은퇴 후에도 기꺼이 다른 삶을 배우고자 했고, 70대의 나이에도 젊은 동료들과 나란히 일하며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로 인해 바쁘기만 했던 사무실에는 자연스레 다정함과 여유가 스며들었으며, 경계하던 시선 속에도 어느새 존중과 신뢰가 피어났다. 성공은 지나갔을지언정, 깊어지고 계속되는 삶 가운데 벤의 성장은 늘 ‘현재진행형’이었다. 목포지회의 김 회원 역시 그랬다. 고희(古稀)를 훌쩍 넘긴 지금도 세상 한가운데서 배우고 나누며, 또 한 번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9 to 6’의 패턴을 소중히 여기며, 여전히 성장의 길을 걷는 그에게서는 ‘멈추지 않는 마음’이 충분히 보이는 듯 했다.
“2009년부터 12년간 고용노동부 목포고용센터에서 근무한 뒤 최근까지 고등학교에서 보안관으로 일했어요. 계약이 끝날 즈음 고용노동부에서 다시 출근할 수 있겠냐는 연락이 왔더군요. 못할 이유가 없죠. 서류 정리부터 현장 관리까지 어려운 일은 도맡아 처리하고 있습니다. 겨울이면 새벽에 나가 눈을 치우고 염화칼슘을 뿌려 출근길을 안전하게 만드는 것도 제 몫이고요. 작은 일이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인데, 교정 현장에서의 경험 덕분에 기꺼이 하게 되네요.”
육신의 건강이 받쳐줌은 물론, 삶에 대한 열정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 삶이 진작부터 ‘성장’을 향하며 ‘공존’으로 익어왔기 때문인지 모른다.

삶의 밑줄, 교정人으로서의 첫 문장

김 회원은 전남 진도의 작은 농가에서 나고 자랐다고 한다. 길이 좋지 않았고, 육지와 연결하는 다리가 없어 뭍으로 나가려면 배를 타야만 하는 시절이었다. 그렇다고 그의 어린 날이 무겁진 않았다. 초등학교 땐 드럼통을 가로로 잘라 만든 굴렁쇠의 속도에 맞춰 학교길을 달릴 만큼 유쾌했고, 중학교를 졸업하자 ‘땅을 팔아’ 목포에 있는 상업고등학교로의 진학 길을 열어줄 만큼 부모님은 미더웠다. 돌아보면 애초부터 ‘성장 지향적인’ 환경이었다는 게 그의 고백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삶도 늘 차근차근 이어져 온 듯하다.
“졸업 후 군 복무를 마치고 공무원 시험을 봤어요. 1974년 교정직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1975년 12월 1일 첫 발령을 받았죠. 처음엔 낯설고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금세 적응했습니다. 굴렁쇠를 굴리며 뛰던 것이 체력이 됐을 거예요. 그 체력을 기반 삼아 수용자 관리부터 작업과 운영, 직원 교육까지 쉼 없이 뛰어다니며 꽉 찬 현역 시절을 보냈답니다.”
김 회원은 목포교도소에서 첫 근무를 시작했다고 한다. 보안과에서 수용자 관리 업무를 맡아 교정 현장의 기본을 익힌 후에는 작업과에서 양재·목공·인쇄 분야의 직업훈련과 기능교육을 총괄했다. 특히 양재공장을 담당하면서는 낡은 재봉틀을 최신 설비로 교체하고 목포해양대학교 학생복, 버스 회사 기사와 안내양의 유니폼, 은행의 근무복 등 대규모 납품 계약을 성공적으로 따냈다. 이러한 활약은 자연히 생산성으로 이어져, 연간 3,000만 원대에 머물던 교도작업 세입이 1억 원 이상으로 껑충 뛰기도 했다.
“밤낮없이 뛰어다니며 수주 활동에 매달렸죠. 공정을 맞추려면 6개월 넘게 잔업을 이어가기도 했지만, 힘들다는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린다는 기쁨이 더 컸습니다. 그때의 열정과 헌신이 지금까지의 제 삶을 떠받치는 자양분이 된 것 같아요.”

교정 현장에 심은 나무, 삶의 현장에 지침 새겨

특별한 기억을 묻자, 김 회원은 1990년대 목포교도소 서무주임으로 근무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헌수(獻樹) 운동’을 전개, 전 직원이 각 과별로 분담해 나무를 심었다고.
“교도소 주변을 좀 더 아름답게 가꾸고 싶었어요. 언젠가 퇴임 후 다시 이곳을 찾았을 때, 우리가 손수 심은 나무들이 자라 큰 그늘을 만들고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를 상상했죠. 전 직원이 뜻을 모아 한 구좌에 5,000원씩 걷었습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벚나무, 은행나무, 단풍나무를 구입해 청사 앞 언덕과 철조망 주변에 심었어요. 지금도 봄이면 연분홍 벚꽃이 흐드러지고, 가을이면 노란 은행잎이 물드는 풍경이 눈에 선해요.”
강진의 영동 농장을 수차례 오가며 나무를 직접 실어 나르기도 했다. 당시엔 수고로웠어도, 계절마다 각각의 색으로 물드는 교정시설을 생각하면 그렇게 뿌듯할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정시설을 찾는 이들도 잠시 걸음을 멈추고 마음 쉬어갈 수 있다면, 그 자체로 그에게는 깊은 위안이라고. 이 모든 기억과 감정이, 김 회원에게는 오늘을 살아가는 데 있어 여전히 주효한 나침반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9 to 6’ 루틴 속 빛나는 교정人의 삶

목표교도소에서 경비교도대 중대장으로 근무하면서는 전 대원의 태권도 유단화를 꿈꿨다고 한다. 그래서 “모든 대원에게 태권도 단증 하나씩은 꼭 안겨 주자”는 목표 아래, 월·수·금요일마다 퇴근 후면 그는 도복을 입었다. 가르치는 입장이었지만 똑같은 시간과 강도로 훈련에 임했던 것.
“집에 돌아가면 밤 9시를 훌쩍 넘기기 일쑤였죠. 피곤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겁니다. 그래도 대원들에게 삶의 태도와 정신을 전하고 싶었어요. 태권도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예의를 배우고 용기를 기르며 적극적인 자세를 키우는 ‘수련’의 과정이거든요. 협동과 봉사, 자신감과 절제까지도 함께 배울 수 있죠. 훈련의 목적은 분명했어요.
단련된 몸과 단단한 마음을 갖추고 사회에 나가 도움 되는 사람으로 살기를 바랐습니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대원들은 체력과 정신력은 물론 자신감을 얻었으며, 단증 역시 실질적인 취업 경쟁력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이에 2개월마다 진행한 승급 심사는 어느덧 김 회원이 가장 공들이는 일과가 됐고, 시간이 갈수록 취득 단수와 명수가 높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2006년 11월 국방부 및 2군사령부 태권도 심사관들이 목포교도소를 찾아 승단 심사를 진행한 적 있어요. 그날 총 18명(1·2·3단, 각 6·2·1명)의 유단자가 탄생했죠. 경비교도대원들이 국기원 정식 단증을 취득한 것도 대한민국 경비교도대 창설 이래 최초였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어떤 일이든, 일단 맡았으면 끝까지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됐어요.”
김 회원은 현재 전남육상연맹·목포육상연맹·스포츠공정위원회 위원장 및 전라남도체육회 종합체육대회위원회 위원장으로서 폭넓은 대회 활동과 일을 병행하고 있다. 또한 교우회 활동에 꾸준히 참여함은 물론, 태권도 9단 승단을 목표로 맹훈련 중이기도 하다. 이외에도 퇴직 이후 투포환, 마라톤 등 또 다른 종목을 만나 생활체육인으로 활약하고 있다는 김 회원. 스스로를 교정동우회 회원이라 자부할 수 있기에 그는 오늘도 조금 더 바르게, 조금 더 뜨겁게 하루를 채워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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