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정 포커스
이 연구의 목적은 일본 근대 초기 감옥의 체계와 수용자 노동의 특성과 함의를 파악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메이지 유신 이후 홋카이도 개척기 집치감과 아바시리감옥의 역사와 구조, 수용자 노동의 내용과 방식을 분석했다. 이를 위해 연구는 홋카이도 개척과 수용자의 노동에 관한 문헌을 검토하고, 현지 조사를 수행하여 감옥 공간과 수용자의 처우에 관한 자료를 수집·분석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치안 유지와 자원 확보, 국방 강화를 위해 행형제도를 개혁하고 수용자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범죄를 저지른 수용자는 사회에서 격리되어 제거될 존재가 아니라, 국가를 위해 봉사할 유용한 노동력이었다. 그것의 첫 출발지는 홋카이도였다.
북방의 척박한 지역이었던 홋카이도는 수용자의 노동으로 빠르게 개발되어, 이주민이 유입되고 국방까지 안정화할 수 있었다. 이때의 노동은 현대의 그것과 많은 차이를 보였다. 노동은 수용자의 사회 복귀를 돕는다는 목적보다 국가의 전략적 목표를 위해 수행되었다. 노동 환경과 방식은 매우 가혹하여 많은 수용자가 부상하거나 사망했다. 그렇지만 그들의 희생으로 지역은 활성화되었다. 이주민이 빠르게 유입되고, 경제가 발전했으며, 감옥 관련 시설과 이야기는 관광 자원화되었다.
이 연구를 통해 다시 한 번 행형제도가 국가와 지역에 미칠 수 있는 긍정적·부정적 영향력을 모두 확인할 수 있었다. 홋카이도 개척기 일본의 경험은 행형의 발전을 모색하는데 유의미한 사례가 될 수 있다.
주제어 : 일본, 홋카이도, 아바시리, 감옥, 수용자
동아시아는 일본의 식민 지배를 경험하면서 많은 변화를 겪었다. 행형제도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일본의 행형방식이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만주, 한국, 대만에 이식되면서 이전과 다른, 새로운 형태의 제도와 기관이 생겨났다. 그중 하나가 감옥으로, 감옥은 범죄자의 신체적 자유를 박탈하는 자유형(自由刑)을 집행하고, 교정·교화를 통해 사회 복귀를 돕는 기관이다. 이전까지 동아시아에서 전 근대적 ‘감옥’은 고문을 하거나 처형을 하는 등, 신체형을 집행하기 위한 대기 장소로 활용되었을 뿐, 그 자체가 형벌 기능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의 식민지배 이래로 동아시아 각국에서 근대적 형태의 감옥이 등장했고, 일반화되었다.1) 이는 단순히 감옥의 외형뿐만 아니라 내부의 구조와 체계까지 일본의 그것과 유사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일제강점기 경성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한 외국인은 경성감옥을 일본의 감옥으로 인식했다. 왜냐하면 경성감옥에서는 일본인 간수가 일본어를 사용하며 일하고 있었으며, 식단과 생활방식까지 모두 일본식이었기 때문이다(Mullins, E. L. C., 1945). 말하자면 일본의 근대 감옥이 거의 그대로 한국에 이식되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떻게 근대적 형태의 감옥을 확립했을까? 그것의 특성은 무엇이고,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것이 이 연구의 첫 번째 문제의식이다.
일본의 근대화는 1868년 메이지(明治) 유신 이후 가속화되었는데, 행형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일본에서 근대화는 곧 서구화를 의미했는데, 메이지 유신 이후로 서구 세계의 철학과 사상, 물질적 산물이 일본으로 빠르게 흘러들어왔다. 이러한 추세에 따라 일본의 감옥 시스템은 필연적으로 서구화 패턴을 따르게 되었다(박훈, 2014; Yanagimoto, M., 1970: 209). 일본에서는 1872년 감옥칙이 고시된 이래로, ‘유기징역’을 기초로 한 징역법이 실시되었고, 근대적 형태의 감옥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일본이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일종의 실험실로 삼은 무대가 홋카이도(北海道)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홋카이도의 실험을 토대로 일본은 동아시아로 무대를 넓혔다. 메이지 유신 이후 정권을 잡은 신정부는 국방을 강화하고,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변경에 주목했다. 홋카이도는 아이누가 거주하는 춥고 척박한 북쪽의 땅이었으나, 점차 탄광 개발, 도로와 철도 건설, 새로운 농법을 통한 경지개발이 시도되는 근대화의 거대한 실험실이 되었다. 그리고 이 실험은 행형제도를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1) 일본과 한국 등에서는 교도소의 명칭이 옥(獄) 또는 감옥(監獄), 형무소(刑務所)라는 이름으로 변화해 왔다(유병철, 2012: 231). 영어로도 교정을 강조하는 correctional institution, 감금을 강조하는 jail이나 prison, 감화원으로 번역되는 penitentiary 등이 있다(최정기, 2003: 185). 다만 이 연구는 현재의 교도소가 아닌 일본 근대 초기 감옥의 사례를 다루고 있고, 인용하는 자료들 역시 ‘감옥’으로 표기되어서 ‘교도소’ 대신 ‘감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시게마츠 카즈요시(重松一義)가 “일본의 근대화에 있어서 변경 홋카이도의 존재와 그 개척에 의해서 얻은 새로운 체험과 지식의 의의는 실로 크다. 이는 행형의 역사를 말해 주는 것이다(重松一義, 2004: 22)”라고 지적한 것처럼 행형제도는 일본의 근대화와 홋카이도 개척의 중요한 토대였다. 일본의 신정부는 홋카이도에 감옥을 만들고, 범죄자를 수용하여, 이들의 노동력을 통해 변경의 척박한 토지를 개발했다. 이때 수용자는 개발의 핵심적인 자원이었다. 수많은 수용자가 개발에 동원되었고, 단시간에 목표를 달성했다. 그렇다면 수용자는 어떤 조건에서 어떤 종류의 노동을 했을까? 그리고 그것의 특성과 의미는 무엇일까? 이것이 이 연구의 두 번째 문제의식이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일본의 근대 초기 수용자 노동의 함의를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연구는 일본에서 근대 감옥이 확립된 과정과 그것의 특성을 홋카이도 개척 시기 집치감과 아바시리(網走)감옥의 사례분석을 통해 파악한다. 구체적으로 감옥의 공간적 구조와 배치, 규율과 운영방식, 수용자의 노동을 통해 일본이 행형정책에서 무엇을 가장 중시했고, 무엇을 추구하고자 했는지 그리고 수용자의 노동이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수행되었는지 분석한다. 이 연구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의 근대화와 행형제도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홋카이도 개척의 역사에서 행형제도는 어떤 역할을 했는가? 그것의 체계와 특징은 무엇인가? 둘째, 홋카이도 집치감의 역사와 구조는 어떠한가? 구체적으로 아바시리감옥의 운영 목표와 방식, 공간과 기능은 무엇인가? 셋째, 이곳에서 수용자는 어떻게 생활하고 노동했는가? 수용자 노동의 내용과 방식, 환경은 어떠한가? 그것이 주는 시사점은 무엇인가?
감옥의 발전을 근대화의 맥락에서 접근하는 연구는 드물다. 특히 동아시아의 근대화와 행형제도에 관한 연구는 많지 않다. 하지만 자본주의 국가에서 근대의 감옥이 어떻게 형성, 발전되어 왔는가를 고찰하고, 이를 토대로 근대 감옥의 사회적 작용을 사회통제론적 시각에서 분석하는 연구는 존재한다. 이 연구는 근대 감옥의 개념적 특성을 자유형의 집행시설, 노동의 강제적 부과, 교화개선의 목표, 총체적 규율과 통제의 장으로 일단 설정한 다음, 이러한 의미에서의 감옥이 근대 서구사회에서 어떻게 형성, 발전해 왔는가를 파악하고, 사회 통제적 함의를 밝힌다(한인섭, 1989).
이 연구는 감옥의 역사를 해당 국가의 경제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요구에 비추어 분석하면서 감옥이 어떤 맥락에서 설립, 발전, 변화되었는지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연구의 대상을 영국과 미국 등 서구의 사례로 한정하고, 정치·경제적 맥락 이외에 지역적·문화적 차원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한계가 있다.
한편으로 동아시아의 근대화 과정에서 감옥의 형성과 발전을 다룬 연구들이 있다. 이 연구는 공통적으로 일본, 대만, 한국, 만주의 사법체계와 행형제도를 근대화 과정에서 접근하지만, 각각의 연구는 대상과 내용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특히 일본의 근대 감옥 연구는 메이지 시대부터 19세기 초까지(1968-1912) 감옥에서 종교의 위치를 분석하고, 한국의 경성감옥을 통해 일본의 근대 감옥을 묘사하거나, 1945년부터 55년까지 스가모(巣鴨拘置所) 감옥의 수감자의 감옥 생활을 분석한다(Lyons, A. J., 2017; Mullins, E. L. C., 1945; Powell, L., & Du, C., 2015). 특히 보쓰만(Botsman)의 연구는 일본 행형제도의 역사와 변천 과정, 감옥의 설립과정과 특성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는데(Botsman, D. V., 2013), 메이지 유신 전후로 행형개혁이 새로운 사회 질서를 수립하고, 징계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추진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등, 개혁의 배경과 목표를 밝히고 있어 의미가 있다.
또한, 대만의 근대 감옥에 대한 연구는 식민지 대만의 사법제도의 형성과정과 일본의 식민지로서의 확산과정을 1898년과 1899년의 입법조치와 사업기관의 구성, 재판법규를 통해 살펴보거나, 대만의 타이호쿠(台北) 감옥을 일제의 식민지 정책(도시화, 문명화) 맥락에서 분석한다(문준영, 2004; Huang, S. M., & Lee, H. K., 2019). 한편으로 한국의 근대 감옥 연구는 조선 후기의 중세적 감옥행정과 죄수에 대한 처우가 갑오-광무개혁을 거치면서 어떻게 변했는지 파악하고, 근대 감옥이 일본과 식민지 조선에 도입되고 제도화되면서 나타난 각각의 특징을 규명하며, 식민지 조선에서 이루어진 감옥 내 통제 메커니즘을 밝히고 있다(원재연, 2019; 이종민, 1998; 1999a; 1999b; 홍문기, 2019; Kang, J. W., 2016).
이들 연구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각국 감옥의 개혁이 일본의 주도 아래 본격화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한국의 감옥에 대해서는 응보주의 사상에 기반한 원형옥(圓形獄)의 형태가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며 점차 사라지게 되었고, 행형제도를 비롯한 일본의 근대적 제도가 그대로 ‘이식’되었다고 설명한다. 시설을 칭하는 명칭 역시 ‘전옥서(典獄署)’와 ‘옥(獄)’에서 ‘형무소(刑務所)’로 변화하였다. 즉, 형의 집행을 기다리는 단순 대기 시설로서의 옥(獄)이 근대적 ‘자유형’을 집행하기 위한 장소로 변화한 것이다(김수빈, 2020: 53).
마지막으로 일본, 만주, 한국, 대만의 근대 감옥을 비교하는 연구가 있는데, 각 감옥의 위치와 자연환경, 역사적 배경, 연혁, 특성, 관리체계와 형벌을 서술하거나, 일본 제국의 모범(본보기) 감옥(도쿄, 타이베이, 경성감옥)을 서구열강과의 역학관계, 식민화 시기, 민족주의와 사회운동의 강도와 지속성 등의 변수를 통해 비교 분석하고 있다(이종민, 2016; 周愛民, 2016).
기존 연구는 일본과 식민지의 감옥을 근대화와 식민화의 맥락에서 이해하고, 감옥의 건축과 체계, 그리고 죄수의 삶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의 식민지 감옥에 관심을 두면서도 일본 감옥의 근대화 과정 자체에는 관심을 소홀히 하거나, 특히 수용자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다. 또한, 감옥의 구조와 체계를 분석하고 있지만, (이종민, Kang, J. W의 연구를 제외하고) 의미를 파악하기보다 단순히 특성을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이 연구는 일본 근대 감옥의 형성과정에서 파생된 담론과 제도적 특성, 감옥 내부의 운영체계, 수용자 노동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그것의 특성과 의미를 파악하려고 한다.
이를 위해 이 연구는 문헌 자료를 중심으로 현지 조사를 병행하여 일본 근대 감옥의 구조와 체계, 그리고 수용자의 노동에 접근했다. 문헌 자료는 주로 도서와 논문, 수용자의 수기, 감옥 관련 소책자와 홍보물이다. 특히 홋카이도 개척의 역사와 행형제도, 아바시리감옥의 역사에 관한 도서, 수용자의 수기와 홍보물 등은 현지 조사를 통해 수집되었다. 연구는 일본 감옥과 관련된 국내외 연구들을 검토함으로써 일본 근대 감옥의 형성배경을 검토하고, 수기, 사진, 영상 자료 등을 통해 감옥의 구체적인 실상을 파악했다. 예를 들어 연구자는 현지 조사를 통해 33편의 영상 자료 목록을 확보하였는데, 이 중 일부는 온라인에서 부분적으로 제공되고 있었다. 이 영상들은 일본의 근대 초기 감옥의 공간과 수용자의 삶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다음으로 이 연구는 근대 감옥의 역사를 이해하고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현지 조사를 수행했다. 일본의 근대 초기 감옥의 형태를 확인하는 방법은 거의 없다. 미야기 감옥은 1879년 벨기에의 루벤 감옥을 모델로 메이지 유신 이후 최초로 건축되었지만, 원형을 찾아볼 수 없다. 반면에 오사카의 (구) 나라감옥(호시노야감옥)은 메이지 정부가 국제적 기준에 맞게 설계한 5대 감옥(지바, 가나자와, 나라, 나가사키, 가고시마)2) 중 하나로 1908년에 완공되었고, 지금도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는 2026년 봄 개관을 목표로 특급호텔과 박물관으로 개조하기 위한 공사가 진행 중이다. 다행히, 아바시리감옥이 박물관 형태로 원형을 보존하고 있어 근대 초기 감옥의 공간과 홋카이도 개척기 수용자 노동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지 조사는 2023년 2월 홋카이도대학 연구자의 도움을 받아 수행하였고, 아바시리감옥 박물관을 직접 방문하여 시설을 견학하고 사진 자료와 문헌자료를 수집하였다.
2) https://former-nara-prison.com/kr/architecture/(검색일: 2024.11.04.).
특히, 아바시리감옥 박물관은 “재단법인 아바시리감옥 보존 재단의 운영에 따라, 아바시리감옥의 옛 건축물을 이전·복원하고, 아바시리감옥의 행형 자료를 수집·전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쇼와 58년(1983년) 7월 6일에 개관”하였다(重松一義, 2002: 155). 박물관은 구 아바시리 감옥의 25개 건물을 그대로 이전하여 원형을 보존하고 있어 이를 통해 감옥의 공간과 구조, 실태를 파악하였다. 또한, 전시관에서 제공하고 있는 역사적 기록, 사진 자료 등을 통해 수용자의 노동을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서양의 모델을 따라 서구화의 길로 들어섰다. 사쓰마번(薩摩藩)과 조슈번(長州藩)은 1868년 동맹을 통해 막부(幕府)를 무너뜨리고 신정부를 세웠다. 신정부는 판적봉환(版籍奉還)을 통해 영주의 토지와 주민을 신정부로 인입시켰고, 폐번치현(廃藩置県)을 통해 번을 폐지하고, 현을 설치하여 지방의 행정을 신정부의 통제 아래 두었다. 사실상 국가체제가 다이묘(영주)들이 지배했던 봉건제에서 중앙집권적인 국민국가의 형태로 전환된 것이다. 이때 261개의 번이 1개의 개척사, 3개의 부, 302개의 현으로 개편되었는데, 여기에서 1개 개척사가 오늘날의 홋카이도이다. 홋카이도에는 1869년(메이지 2년) 7월 개척사가 처음 파견되면서 일본의 지방 행정에 본격적으로 편입되었다.3) 홋카이도가 부나 현이 아니라 개척사로 지정된 것은 이 지역이 18세기 말까지 막부의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역사적으로 오늘날의 간사이(교토중심)와 간토(도쿄중심) 지방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는데, 북쪽으로 갈수록 지리와 기후가 척박하여 사람들이 정착하기 어려웠다. 다만 홋카이도의 최남단 하코다테 지역을 중심으로 마쓰마에 가문이 1604년부터 도쿠가와 막부로부터 번의 주인으로 인정받아 일부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들어선 신정부는 러시아의 위협에 대비하면서도 부국강병을 꾀할 수 있는 방책을 찾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는 부동항을 확보하여 교역을 활성화하기 위해 남하 정책을 취하고 있었고, 자주 일본의 해안에 출몰하여 위협을 가했다. 신정부는 러시아의 남하·흑선 출몰에 대해 북쪽 출입문을 닫고, 자물쇠를 채워 홋카이도를 지킨다는 ‘북문쇄쟁론(北門鎖鎗論)’을 제기하고, 홋카이도 개척을 시작했다(重松一義, 2002: 14). 이러한 목적으로 1881년에 감옥칙을 개정하여 홋카이도에 도형류형징역형(徒刑流刑懲役刑) 12년 이상인 자를 구금하는 집치감(集治監)을 설치하고 수용자의 노동력을 통해 홋카이도를 개척하고 방어하는 정책을 취했다(문명재, 2022: 488).
3) 당시 홋카이도 개척사는 다른 형부성·병부성 등과 동격인 성으로 개척사 청사는 민부성 내에 있었고, 홋카이도는 1869년 가을부터 하코다테출장소에서 사무를 취급했다(重松一義, 2004: 7).
행형개혁의 추진은 단순히 국방경비와 자원 확보 때문에 시작된 것만은 아니었다. 사실 메이지 지도자들은 정권을 잡자마자 행형제도를 개혁하기 시작했다. 치안을 유지하고 국가를 통치해야 했기 때문이다. “제국 통치의 회복”을 발표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그들은 직접 통제하는 지역에서 사용할 새로운 임시 형벌 규정(kari keiritsu)을 편찬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1868년 12월, 그들의 권위에 대한 마지막 대규모 군사 저항이 진압된 후, 새로운 정권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 궁정 귀족 이와쿠라 토모미(岩倉具視, 1825-83)는 형벌 개혁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왕위에 제출했다. 그것은 “제국 통치의 회복과 관련하여 시행될 수백 가지 개혁 중에서 형벌 법률은 대중의 생사에 관한 문제이므로 시급히 시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십자가형이나 화형은 완전히 폐지되었고, 모든 형태의 추방은 ‘형벌 노역(totei)’로 대체되었으며, 유배형을 선고받은 범죄자는 북쪽의 섬인 에조치(나중에 홋카이도로 개명)로 보내졌다(Botsman, D. V, 2013: 141).
구체적으로 신정부는 1868년(메이지 원년) 가형률(仮刑律), 1870년 12월 신율강령(新律綱領)을 반포했다. 가형률과 신율강령은 명청률(明清律)을 기초로 마련된 것으로서, 가형률에서는 태(笞)·도(徒)·유(流)·사(死)의 총 4종, 그리고 신율강령에서는 태(笞)·장(杖)·도(徒)·유(流)·사(死)의 5종의 형을 두었다. 이를 크게 나누면 신체형(태형·장형), 자유형(도형·유형), 사형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도형과 유형 중에서는 도형이 징역형에 해당하는 것이다(배미란, 2023: 21). 또한, 1872년 4월의 「징역법(懲役法)」, 동년 11월 29일의 「감옥칙병도식(監獄則並図式)」의 반포를 통해, 영국의 동양 식민지인 홍콩·싱가포르 감옥에서 시행 중인 서양식 처우 형태를 도입했다. 「감옥칙병도식」은 서문에서 “감옥은 잔혹성의 장소가 아니라 자비의 장소이고, 고통 받는 곳이 아니라 처벌 받는 곳이다”라고 천명하면서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입장을 보여줬다(監獄則並図式, 감옥칙도식).4)
4) 「감옥칙병도식(監獄則並図式)」은 감옥 규칙 및 규정(일본 최초의 감옥법)을 의미한다. 태정관 포고령(太政官達第378号)으로 공포되었다. 감옥칙병도식은 서문에서 “감옥은 범죄자를 감금하고 징계하는 수단이다. 감옥은 잔인함이 아닌 자비를 보여주고, 사람들을 징계하는 수단이지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다. 형벌을 사용하는 것은 국가의 이익을 위해 해를 제거하는 불가피한 방법이며, 감옥의 장은 범죄자를 대하는 방식에서 이 의도를 구현해야 한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본문은 건설, 투옥, 형무소, 질병, 처형, 공무원 및 기타 조항의 7개 주요 부분으로 나뉘며, 1~17절의 그림을 포함하여 감옥을 형무소, 여성 감옥, 병자 감옥, 징계 감옥 및 관용 감옥으로 구분한다. 또한, 형무소에 복역하는 일반 수감자에게는 승진 제도를 도입하여 5개 계급으로 나누어 토목, 황무지 개간, 목공, 단조, 가죽 가공 등 다양한 직종에서 일하게 했으며, 형기는 8시간으로 정했다(監獄則並図式, 감옥칙도식). 그러나, 쇼와 43년 범죄 백서에 따르면, 감옥칙도식은 비용 문제로 전면적으로 이행하기 어려웠다.
출처: https://hakusyo1.moj.go.jp/jp/9/nfm/n_9_2_3_1_3_0.html(검색일: 2024.12.19.).
나아가 신정부는 다음 해인 1873년 6월 「개정율례」를 반포했는데, ‘개정율례’는 태형, 장형, 도형, 유형을 10일부터 10년의 징역형으로 단일화하고, 징역 10년 위에 종신형, 교수형, 참형, 효수형을 두었다(重松一義, 2004: 6).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징역형이 지배적인 형벌로 등장한 것이다. 이에 따라 1879년 미야기(宮城)에서 서구의 영향을 받은 첫 감옥이 설립되었다. 영국의 건축가가 설계한 이 감옥은 벨기에의 루벤감옥과 매우 비슷하게 여섯 개의 방사형 형태로 구성되었다. 또한, 범죄자 처우와 인사 관리 방법에 관한 새로운 감옥법, 규칙 및 규정이 빠르게 도입되었고, 수정을 거듭했다.5) 이런 과정을 거쳐 일본 감옥은 독일식 형법 아래, 미국의 펜실베니아식 방사형 구조가 혼합된 방식을 띠게 된다(Yanagimoto, M., 1970: 209-210).
홋카이도에서 수용자 노동에 관한 법·제도적 기반은 1877년, 「전국의 죄수를 특정의 도서에 보내 총징치감으로 한다」는 원로원 결의와 1879년 내무경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제안으로 추진되었다. 이토 히로부미에 따르면, 홋카이도 수용자 노동의 목적은 “북변 미개발 땅에 장기 유도형수를 보내 자경 자식(自耕自食)하고 정부에 저항하는 위험 분자를 격리 배제하여, 내지(内地) 감옥의 부담을 경감하며 사회의 치안 유지를 기획”하는 것이다.6) 또한 “유도형수(流徒刑囚)의 확실하고 저렴한 노동력을 활용해 홋카이도를 개척하고, 유도형수의 개과천선을 촉구하며 인구가 희박한 홋카이도에 정착하는 기회를 주어 자립 갱생”시키는 것이었다. 이는 일석이조·일석삼조의 책략으로, 홋카이도 개척 행형이 여러 의도로 추진되었음을 보여준다(重松一義, 2004: 24).
그리하여 마침내 1882년 구형법이 시행되어 노동의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다.7) 구형법은 중대한 범죄, 경범죄, 경찰(명령) 위반의 세 가지 주요 범주로 범죄를 특정했는데, 제7조에 규정된 도형(徒刑)과 유형(流刑)은 섬으로 보내져 처벌받을 수 있었다.
5) 그 후, 1881년 9월에 감옥칙이 제정되어, 감옥을 유치장, 감창(미결자를 구금하는 곳), 징치장(소년, 귀머거리, 비행으로 부모의 청원에 의해 수용하는 곳), 구류장(구류형에 처한 자를 구금하는 곳), 징역장 및 집치감(도형, 유형, 징역형)의 6종으로 나누었다. 1889년 7월에 공포된 개정 감옥칙은, 감옥을 집치감, 구류장, 지방감옥, 구치감, 유치장 및 징치장으로 재분류했고, 동시에 감옥칙 시행 세칙이 정해져, 형기, 공전(工銭, 물건(物件)을 만들거나 어떤 일을 하는 데 드는 품삯), 급여, 위생 및 사망, 서신 및 접견, 차입품, 상여, 징벌 등에 대해 규정했다.
출처: https://hakusyo1.moj.go.jp/jp/21/nfm/n_21_2_4_1_1_1.html(검색일: 2024.12.19.).
6) 1885년 카네코 켄타로(金子堅太郎)는 ‘홋카이도 3현 복명서(復命書)’에서 감옥 운영비용 이외에도 개발의 경비부담을 줄이는 문제도 지적한다. “홋카이도에서 일반 노동자의 하루 임금은 약 40전 이상이지만, 죄수는 하루 18전 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죄수를 일하게 하면 도로 공사 비용 가운데 임금 부문에서 절반 이상을 삭감할 수 있다. 이는 정말로 일거양득의 방책이다”(小池喜孝, 2018: 123).
7) 1880년(메이지13년) 7월 17일 태정관(太政官)포고(布告) 제36호로 최초의 근대적인 형법전(刑法典) 인형법(刑法) (통상 ‘구형법(舊刑法)’이라고 칭함)을 제정하게 되었다(1882년 1월 1일 시행). 당시 메이지정부는 프랑스 파리대학의 조교수였던 브아소나드(Gustave Emile Boissonade, 1825∼1910)를 법률고문으로 1873년 일본에 초빙하여 형법전 편찬작업을 추진했으며, 동 교수가 기초한 초안(1877년 완성)을 바탕으로 구형법을 제정하게 되었다(이동희, 2020: 63).
또한, 1882년 구형법의 부칙 시행에 맞춰 도형·유배·징역 10년 이상의 사람을 홋카이도 집치감에 집금할 수 있었다(重松一義, 2004: 24; 26; 27; 55). 이것은 이토 히로부미의 제안에서 보듯이, 내지 치안 부담을 경감시킬 필요가 있었고, 홋카이도의 인구가 점차 증가해 자체의 치안을 위해서라도 집치감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수용자들은 도쿄(東京)와 센다이(仙台), 효고(兵庫)의 가류감에 집결하여 홋카이도로 호송되었다. 홋카이도에서 수용자들은 집치감과 분감, 외역소에서 숙식하며 일했다. 그리고 이러한 제도는 엄격한 중앙집중제도를 통해 관리되었다. 프랑스의 유형 제도처럼, 형법의 시행 뒤에 설립된 중앙감옥은 각 지역 감옥을 관리했다.
메이지 유신과 행형제도 개혁, 그리고 홋카이도 개척은 당시 근대국가로 도약하려는 신정부의 의지와 노력을 보여준다. 특히 행형제도의 영향은 지대했다. 둔전병과 집치감, 수용자 노동을 통해 홋카이도라는 일종의 식민지가 개척되었고, 정치, 경제, 군사, 치안과 행형 등의 제도가 확립되었다. 이를 통해 신정부는 내지의 정치적, 경제적 부담을 완화할 수 있는 안전판과 같은 지역을 확보할 수 있었고,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얻을 수 있었으며, 이를 아시아의 식민지에 적용할 수 있었다.
홋카이도 집치감은 근대국가를 향한 일본의 의지와 행형제도가 국가와 지역에 미친 영향력을 보여준다. 집치감은 메이지 유신 이후 만들어진 감옥의 일종으로 도쿄(東京), 미야기(宮城), 후쿠오카(福岡), 홋카이도(北海道)에 있었는데, 초창기에는 내무성 소관이었다. 주로 도형(徒刑), 유형(流刑), 징역형(懲役刑)을 선고받은 수용자 중 중죄인, 12년 이상 형을 받은 수용자를 수용했다(三吉明, 1966: 149).8) 홋카이도에는 삿포로와 하코다테 감옥서 외에 여러 집치감과 분감, 외역소가 있었다. 내지(內地, 홋카이도 이외의 혼슈・시코쿠・큐슈)에서 집결된 중죄수들은 주로 집치감으로 이송되어 도로 개착9) 등의 노동에 투입되었다.
8) 최초의 아바시리 외역소(網走外役所)는 1890년에 설치되었다.
9) 개착(開鑿, 산을 뚫거나 땅을 파서 도로 등을 냄)
1881년(메이지 14년)에 중죄수에 의한 홋카이도 개척의 거점으로, 이시카리(石狩) 강 강변의 가바토군(樺戸郡) 츠키가타무라(月形村)에 가바토집치감(사실상의 본감)이 설치되고, 1882년에는 멀지 않은 이와미자와(岩見沢)에 소라치집치감이, 1885년에는 구시로집치감이 설치되고, 수용자에 의한 개척이 조직화되고, 분담되었다. 가바토(樺戸)는 1886년 삿포로 북서부의 ‘신천굴(新川堀)’ 13km의 개착이나, 가바토(樺戸), 소라치(空知) 사이의 직선도로 ‘미네노부도로(峰延道路)’와 ‘가미카와 가설 도로(上川仮道路)’ (미네노부(峰延)-추베츠부토(忠別太) 간)의 개착에 착수하고, 주변 산림의 벌채와 농지 개척을 진행했다. 소라치집치감은 호로나이(幌内) 탄광의 채탄(採炭)에, 구시로집치감은 야스다 젠지로(安田善次郎) 경영의 유황 채굴의 하청과 관련하여, 도로호(塘路湖北岸) 북쪽가에 치부카루우시(チブカルウシ) 벌판에 외역소를 설치하고, 구시로, 시베차 간의 도로 개착에 착수했다. 가바토 집치감을 본감으로 여러 집치감이 도로 개착과 탄광채탄, 유황채굴 등 지역개발과 자원개발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홋카이도가 개척되기 시작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홋카이도 집치감의 역사와 체계를 살펴보면 <표 1>과 같다.
<표 1> 홋카이도 집치감의 개편 역사
* 출처: 重松一義. (2004). 史料北海道監獄の歴史. 信山社. 21p, 일부 수정
<표 1>에 따르면, 홋카이도에서 가장 먼저 개소된 집치감은 가바토집치감(樺戸集治監)으로 1881년에 개소했고, 뒤이어 소라치(空知, 1882), 구시로(釧路, 1885),
아바시리 분감(網走分監, 1891)이 설치되었다. 집치감의 체계를 살펴보면, 집치감은 1885년까지 내무성 소관이었으나, 1886년부터 1894년까지 홋카이도청, 1895년부터 1900년까지 내무성, 그리고 1901년부터는 사법부 관할로 운영되었다. 집치감 아래 분감, 분감 아래 다시 외역소가 있었고, 인원은 집치감 전옥, 의사, 교회사, 감옥서기(촉탁, 기술자, 고용인), 간수장(간수부장, 간수)으로 구성되었다. 이때 집치감 전옥은 내무성출신 관료로서 단순히 죄수를 관리하고 개척에 참여한다는 수준이 아니라, 러시아에 대한 공포에 대한 국방의식, 둔전병 수준의 선병(選兵)적 지휘관이라는 의식이 있었고, 그런 책무와 위상이 있었다. 따라서 그의 권한도 광범위했는데, 심지어 구금에서 풀려나거나 가석방된 사람에게 토지를 임대할 권리와 결혼을 허가할 권리까지 있었다(重松一義, 2004: 21-22).
집치감 전옥이 이와 같은 광범위한 권한, 즉 감옥의 장, 군대의 지휘관, 지방정부의 장과 같은 위상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기관의 목적이 개척과 국방, (이주)정착까지 포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집치감의 주변에는 둔전병(屯田兵)이 거주하면서 죄수의 폭동·도주에 대비하고, 외부의 적을 방어했다. 이와 같은 인식은 메이지 유신 이후 몰락한 무사계급(사무라이)들을 활용하여, 치안과 국방을 유지하고 홋카이도를 개발하자는 제안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집치감 주변에는 일종의 군사마을이 조성되어, 둔전병들이 주민으로서 지역을 개발하고 방어하는 역할을 했다(Mason, M. M., 2012). 행형제도가 단순히 수용자의 교정·교화에 머무르지 않고 지역개발과 국방 강화라는 국가의 전략에 복무한 것이다. 여기에서 수용자들은 형을 선고받은 범죄자이자, 북방개척의 노동자였고, 예비군이었으며, 미래의 지역 정착민으로 다루어졌다. 따라서 집치감의 통제체계와 규율은 상당히 강할 수밖에 없었다.
<표 2> 홋카이도 집치감의 규칙과 처우
* 출처: 重松一義. (2004). 史料北海道監獄の歴史. 信山社. 37p
집치감에서 수용자들은 엄격한 규율 아래 생활하고 노동했다. <표 2>에 따르면, 집치감은 수용자에게 의복을 지급했다. 의복은 수용자에게 자신의 신분과 처지를 각인시키고, 관리자에게는 통제를 편리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의복의 색깔은 감색이었는데, 이는 감시와 통제, 도주 방지에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수용자가 도주하더라도 눈에 잘 보이는 의복 색 때문에 쉽게 체포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수용자는 한 달에 한 번 이발할 수 있으며 담배는 피울 수 없었다. 경례는 묵례로 하고, 모든 서신(편지)은 직원이나 교회사가 열람하며, 서신(편지)을 발송할 수 있지만, 행형 성적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이때부터 이미 분류제도가 시행된 것이다. 분류제도는 죄수 간 상호접촉을 막아 범죄의 전염과 감옥에 끼치는 악영향을 차단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특히 집치감에서는 육체적·정신적으로 건강한 죄수를 구분하고 이들을 활용하여 노동생산성을 증진하였다.
마지막으로 수용자는 싸움이나 도주를 시도하는 등 감옥 규칙을 위반하면 독거실에 수용될 수 있었다. 징벌은 감옥을 운영하고, 수용자를 통제하는데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수용자가 감옥 규칙을 잘 따르지 않는다면 감옥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개척을 위한 노동에 동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독거실은 작은 독채 형태로 사동과 별개로 떨어져 있었는데, 감옥의 규칙을 위반한 수용자는 일정 기간 독거실에 수용되어 죄를 반성해야 했다. 독거실은 창문이 없어 빛이 완전히 차단되어 있었기 때문에 항상 어두웠고, 식사량을 줄였기 때문에 수용자는 배고픔에 시달렸다. “징역은 근성을 가져라!”는 낙서가 손톱으로 새겨져 있을 정도였다. 이 독거실은 사당(祠堂)처럼 생겼다고 해서 죄수끼리는 이나리(곡식의 신(神))방이라고 자조적으로 불렸다.
의복의 일괄지급, 흡연금지, 성적에 따른 차등처우, 서신검열, 징벌 등은 감옥이 근대적 형태의 기능과 규율을 갖춘 기관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근대 이전의 감옥은 신체형이나 범죄의 조사를 위한 대기 장소였다. 대부분의 수용자는 참형이나 교수형 등 신체형으로 다스려졌고, 이를 통해 권력자는 자신의 위엄을 보이고, 질서를 유지했다. 그러나 범죄자에 대한 신체형의 폐지 이후, 처벌은 신체에 위해를 가하거나 목숨을 끊어내는 방식이 아니라, 신체의 능력을 유지하고 활용하는 방법으로 진화했다. 따라서 수용자는 기관에서 관리되고 보존되어야 했고, 쓸모 있는 존재로 거듭나야 했다. 이때의 쓸모는 수용자 자신의 삶을 위해서라기 보다, 국가나 지역 차원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필요한 유용성이다. 따라서 엄격한 규율과 차등 처우가 필요했다. 이를 통해 거칠고 예측 불가능했던 수용자는 통제할 수 있고, 유용한 존재로 거듭난다. 일본 역시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수용자들의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었다.
홋카이도 집치감의 시설과 공간은 집치감의 목적과 운영체계가 집약적으로 구현된 곳이다. 감옥 내에서 어떤 공간과 어떤 장치가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배치되어 있는지를 분석함으로써 메이지 유신 이후 신정부가 추진했던 행형개혁이 어떤 방식으로 실행되었는지 파악하고자 한다. 이 절에서는 홋카이도의 최북동쪽 아바시리에 위치했던 아바시리감옥의 사례를 통해 홋카이도 집치감의 공간과 기능에 접근한다.
아바시리감옥은 소라치와 가바토 두 집치감으로부터 중앙도로 개착을 위해 기관이 필요하다는 요구에 따라 설치되었다. 이에 따라 전옥 오이노우에 테루치카가 1890년(메이지 23년) 3월, 아바시리 주변을 시찰하고, 아바시리 호숫가에서 아바시리 강쪽으로 구릉을 등지고 있으면서, 크게 굽은 평지를 도로 개착의 기점으로 판단하고, 장소를 정했다. 이렇게 해서 아바시리외역소가 문을 열었다(重松一義, 2002: 17). 아바시리감옥은 1890년 외역소로 설치된 이래, 1891년 분감이 되었고, 1898년 대사면으로 수용자가 대규모로 감소해, 일시 폐쇄되었다가 1903년 독립감으로 승격했다.
<그림 1> 창설 당시의 아바시리 감옥 배치도(1890)
※ 출처: 촬영, 2023년 2월 9일
<그림 1>에서 보듯이 오른쪽 상단의 4개의 긴 건물이 수용사동이고 왼쪽 상단의 가장 구석에 있는 건물이 교회당이다. 사동 앞에는 식당이, 식당을 기준으로 오른쪽에는 사무소 및 창고, 왼쪽에 환자를 위한 건물과 공장이 있다. 감옥은 검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고, 외부에 관사가 있다. 이때만 해도 서양의 감옥 건축 양식이 도입되지 않았다. 각각의 사동은 분리되었고, 일망 감시의 형태도 보이지 않았으며, 관리동 역시 사동과 분리되었고, 공장과 창고도 별도로 위치했다.
<그림 2> 창설 당시의 아바시리 감옥 배치도(1890)
※ 출처: 重松一義. (2002). 博物館 網走監獄. 網走監獄保存財団. 26p
하지만 감옥은 1909년 화재로 거의 모든 건물이 불에 탔다. <그림 2>에서 검은색으로 표시된 건물은 화재로 소실된 부분이고, 하얀색으로 표시된 건물은 소실되지 않은 건물이다.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아바시리감옥은 1909년 대화재로 청사, 수용 사동, 교회당, 공장, 창고 등 관사를 제외한 거의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다.
한편으로 화재는 집단 탈옥의 기회였으나, 탈주자는 없었고, 수용자 23명과 직원 10명이 가벼운 타박상과 화상을 입었을 뿐이었다. 수용자 86명은 후타미가오카(二見ヶ岡)로 이송되었고, 나머지 수인들은 야외 독거실과 창고에 임시 수용되었다.
따라서 감옥은 새롭게 건축될 수밖에 없었는데, 1909년부터 약 3년에 걸쳐 총인원 269,512명의 수용자를 동원하여 복구했다. 1912년에 복구된 감옥은 그 이전과 비교해서 많은 부분에서 변화가 있었다.
<그림 3>은 1912년 복원공사 후의 배치도와 1985년 박물관 자리로 옮겨 지은 후의 배치도를 보여준다. 가장 큰 변화는 수용사동에서 나타났다. 복원된 아바시리 감옥은 서구식 형태의 방사형 구조로 건축되었다. 메이지 시대 초, 일본은 감옥 건축에 파놉티콘(Panopticon) 제도를 도입하기 시작했는데, 아바라시감옥도 당시 영국을 중심으로 정착하고 있었던 방사형 구조를 도입했다. 특히 벨기에의 루벤 감옥을 모방하여 건축했다. 이는 방사상의 5동이 중앙의 육각형의 중앙 감시소로 연결된 구조였다.
<그림 3> 복원공사 후 배치도(1912)와 이축 및 박물관 개관 후 배치도(1985)
※ 출처: 촬영, 2023년 2월 9일
파놉티콘은 제러미 벤담이 제안한 감옥의 한 형태로, 중앙의 관리자를 중심으로 반원의 수용거실이 배치된 것이다. 흔히 일망 감시체제로 불리는데, 왜냐하면 이 공간에서 관리자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다수의 수용자를 효율적으로 감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관리자는 수용자를 볼 수 있지만, 수용자는 관리자를 볼 수 없다. 수용자는 관리자를 볼 수 없기 때문에, 그가 중앙에서 감시하고 있는지 혹은 부재한지 알 수 없다. 따라서 수용자는 관리자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항상 말과 행동을 조심하고, 규칙을 따를 수밖에 없다. 관리자가 부재할 때에도 관리자가 있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이다. 아바시리감옥에서도 관리자는 5개의 사동이 만나는 복도의 중앙 감시소에서 수용자를 관리했다. 감시소는 감옥의 요충지로, 중심에 위치해서, 이곳에서 다섯 번의 점검, 출역환방(出役環房) 등의 명령을 내려 일제동작(一齊動作)을 감시하고 단속했다.
중앙감시소를 중심으로 5개의 방사형 복도를 따라 좌우로 수용 거실이 배열되어 있고, 복도의 위쪽은 불빛이 통하는(明かり採り-투명한 플라스틱 판을 통해 내부의 불빛을 밖으로 내보냄으로써 수용자의 재실 여부를 외부에서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부품) 천장이 있었다. 사동은 혼거실과 독거실을 포함하여 226개였고, 최대 7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목조 행형 건축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최대 규모였으며, 1912년부터 1984년까지 사용되었다.
<그림 4> 수용거실 문과 비스듬한 창살
※ 출처: 좌_https://m.blog.naver.com/hsydream1/221525119893?view=img_23(검색일: 2024.12.19.), 우_촬영, 2023년 2월 9일
<그림 4>는 수용거실 문과 창살을 보여주는데, 수용 거실의 문은 단단한 들메나무가 사용되었고, 복도 쪽으로 벽면은 격자형 목재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비스듬히 세워졌다. 예를 들어 관리자는 복도에서 감시와 보안을 이유로 감시용 구멍을 열거나, 비스듬한 창문을 통해 감옥 내부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수용자는 직원이 언제 어디서 나타나서 감시구멍을 열고, 자신을 감시할지 모르기 때문에 평소 생활을 조심할 수밖에 없다. 또한, 창문의 목재 창살이 비스듬하게 배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건너편의 죄수와 눈을 맞출 수도,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다.
감시 시설은 사동 외부에도 있었다. 아바시리 감옥에는 고견장(高見張)이라 불리는 높이 8m의 망루 형태 감시대가 뒷산과 정문 앞 경교(鏡橋; 거울다리) 부근 등에 설치되어 있었다. 직원들이 2시간씩 교대로 탈옥과 침입을 대비하고, 내외를 감시했다. 그리고 독립형 독거실을 통해 규칙을 위반한 수용자를 징계하고, 교회당을 설치하여 수용자들에게 정신적, 윤리적, 종교적 지도를 제공했다. 이 공간과 시설들 이외에도 아바시리감옥에는 청사, 목욕탕, 식당, 직원 관사, 초소, 정문과 통용문(후문), 담장 등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아바시리감옥은 방사형 형태와 밝은 천장, 관리자 중심의 수용거실 문과 창살, 고견장과 독거실, 교회당이라는 공간과 장치를 통해 수용자들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음모와 반란을 억누르고, 탈옥을 방지하며 노동을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었다.
메이지 19년(1886년) 홋카이도청이 설치되면서 홋카이도의 개척과 신민정책이 본격화되었다. 이 개착의 첨병(先兵), 돌파구, 불도저로서 역할을 내지(內地)의 장기의 중범죄자가 짊어졌다. 그 발상은 후쿠오카 번사(藩士)로 하버드 대학에 유학하여 법률을 공부해온 약관(弱冠) 32살의 태전관대서기관(太政官大書記官) 카네코 켄타로(金子堅太郎)가 메이지 18년(1885년) 여름, 홋카이도를 시찰하고, ‘홋카이도 3현 복명서(復命書)’라는 보고서를 정부에 제출한 것에서 확인된다. 그에 따르면 “원래 그들은 폭려(暴戻)의 악도(悪徒)이며, 평범한 형벌로는 부족하고, 고역(苦役)을 당해야 하고, 이것에 의해 쓰러져 죽더라도, 감옥비의 지출이 줄어들기 때문에 만부득이한 정략(政略)이다.” 이것은 곧바로 채택되어, 내무경(内務卿)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県有朋)의 ‘고역본분론(苦役本分論)’(징계주의론(懲戒主義論))이라는 유명한 훈시가 되었다(重松一義, 2002: 12). 이른바 수용자는 쓰고 버려져도 마땅한 존재라는 것으로 수용자에게는 죽음이나 다름없는 훈시가 발표된 것이다. 이에 따라 내지에서 수많은 수용자가 홋카이도로 호송되었고, 탄광개발과 도로 개착에 투입되었다.
<그림 5>에 따르면, 홋카이도에서 수용자는 메이지 14년(1882년)부터 27년(1894년)까지 가바토, 소라치, 구시로집치감과 아바시리분감의 관리 아래 농지개간, 산림벌채, 탄광채석, 도로 개착 임무를 수행했다. 특히 여러 갈래의 주요한 도로를 개착했는데, 수용자들이 개착한 구간과 길이는 가바토-도베쓰(樺戸~当別) 약 21km(가도로, 仮道路), 이치키-타다베츠(市来知~忠別太) 약 56km(가신도, 仮新道), 가바토-오소키나이(樺戸~オソキナイ) 약 12km, 시베차-앗케시(標茶~厚岸) 약 38km, 가바토-이치키(樺戸~市来知) 약 18km(미네노부 도로 중 가바토 가도, 街道), 이치키-타다베츠 (市来知~忠別太) 약 88km(개수도로, 改修道路), 이치키-이쿠순베쓰(市来知~幾春別) 약 43km, 가바토-도베쓰(樺戸~当別) 약 21km(개수도로), 가바토-마시케(樺戸~増毛) 약 101km, 시베차-구시로(標茶~釧路) 약 34km, 이와미자와-이치키(岩見沢~市来知) 약 37km, 이치키-유바리(岩見沢~夕張) 약 23km, 데시카가-아바시리(跡佐登~網走) 약 38km, 타다베츠-기타미고개(忠別太~北見峠) 약 60km, 아바시리-기타미고개(網走~北見峠) 약 163km, 오쓰-메무로(大津~芽室) 약 46km였다(重松一義, 2004: 45).
<그림 5> 홋카이도 수용자 노동의 발자취
※ 출처: 古松丈周, & コマツタケノリ. (2021). 北海道の 「集治監」 をめぐる歴史認識の諸相―ダーク・ツーリズムと近代の他者―. 旭川大学経済学部紀要, (79-80), 30쪽
아바리시감옥의 경우 북쪽의 방비를 위한 중앙도로의 필요성 때문에 설치되었는데, 먼저 선발대 50명이 2개월에 걸쳐 임시감(假監)과 임시(假)사무소를 건설했다. 다음에 메이지 23년(1890년) 4월 아바시리외역소가 개설되어 구시로 집치감에서 죄수 1,200명과 간수(着守) 173명이 불과 631명의 인구만 거주하는 아바시리 마을로 이동해 아바시리외역소가 탄생하게 되었다(重松一義, 2002: 16-18). 그곳에서 수용자들은 혹독한 자연조건 아래서 중노동에 시달려야만 했다. 아바시리 초대 분감장 아리마 시로스케(有馬四郎助)는 중앙 도로(아바시리-기타미고개(網走~北見峠)) 개착 예정 노선을 답사하여, 노선을 종점까지 13구로 나누고, 한 구간에 간수장 한 명, 감독 보조(간수부장) 두 명, 간수 12명과 200명의 수용자를 배치하고, 각 분담 구역은 양 끝 단에서부터 쌍방 협공하는 것처럼 경쟁시켰다. 그래서 한 구간의 작업이 중앙부에서 만나면 끝이 나고, 다시 다음 구역으로 이동해 가(仮, 임시)숙박소(혹은 휴박소)를 설치하는 등 이동 감옥 방식을 채택하여 공사를 진두지휘했다.
아리마는 교통이 불편한 산중에서 의료부족과 곤란한 식량보급, 수종(水腫)병이 속출하는 가혹한 조건 속에서, 많은 희생을 내면서도 지상명령(至上命令)의 기한대로 1891년 4월부터 11월까지 단기간에 중앙도로를 관통시켰다(重松一義, 2002: 18). 이로써 홋카이도 제일의 동맥인 국도 39호선이 개통되었다. 수용자들은 163km를 건설했고, 도로 폭은 5.45m였고, 교량은 23곳에 설치되었다. 수용자들의 노동으로 건설된 간선도로에는 국도 39호선(아사히카와-키타미)과 국도 12호선(삿포로-아사히카와)이 포함되었으며, 연결된 노선 전체를 합하면 길이는 724km로, 이로써 삿포로 북쪽의 홋카이도 주요 간선도로가 연결되었다.
<그림 6> 휴박소와 사슬 노동
※ 출처: 촬영, 2023년 2월 9일
<그림 6>은 수용자가 중앙도로 개통공사를 위해 외역작업을 할 때 이용했던 휴박소을 보여준다. 일종의 가건축으로 간단하게 건설 해체가 가능한 오두막집이었는데,
이것을 ‘휴박소가감’ 혹은 ‘움직이는 감옥’이라고 불렀다. 이때 수용자는 이불 한 장에 통나무 한 개를 길게 늘어놓은 베개에서 한꺼번에 잤다. 수용자들이 하나의 통나무 베개에서 집단적으로 잠을 자야만 했던 이유는 통나무 베개가 수용자들을 깨우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수용자들의 평균 수면시간은 4-5시간으로 매우 부족하여 아침에 쉽게 깨지 못했는데, 관리자는 통나무 가장자리를 두드려 수용자들을 한꺼번에 깨울 수 있었다. 이러한 노동형태가 이후 다코베야(タコ部屋, 노동자 합숙소) 노동으로 이어졌다.
오른쪽의 사진은 탈주를 방지하기 위한 사슬을 보여준다. 수용자들은 서로 연결된 탈주 방지 목적의 사슬을 차고, 하루 종일 노동을 해야만 했다. 사슬의 길이는 약 1장이었고, 무게는 450목, 철의 무게는 70목이었다. 수용자들은 이 사슬을 차고 가파른 절벽과 산악 지역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계절과 날씨와 상관없이 일했다. 이 기간에 약 1,115명이 출역했고, 병을 얻거나 부상한 사람이 914명, 사망자는 186명이나 되었다. 1902년 아바시리 감옥은 당시 상황을 설명하면서 “탈출한 사람은 죽고, 병든 수감자는 죽고, 그들의 시체는 바람과 비에 버려졌습니다”라고 적었다(重松一義, 1970: 247). 사망한 수용자들은 쇠사슬과 함께 묻혔고, 이것이 나중에 발견되어 ‘쇠사슬 무덤(鎖塚)’으로 불리었다. 현재는 이들의 혼을 위로하는 위령비가 도로 곳곳에 건립되었다.
수용자들의 희생으로 도로가 개통되었고, 이를 통해 이주민들이 홋카이도의 북쪽과 동쪽으로 빠르게 정착할 수 있었으며, 이 지역이 개발될 수 있는 돌파구가 마련되었다. 도로가 개통된 후에는 경제적, 행정적 효과가 크게 나타났고, 도로는 동부 홋카이도 발전의 대동맥이 되었다. 도로 개착 공사는 끝났지만, 아바시리감옥은 농업 감옥으로 성장했다. 또한, 수용자들의 노동 전문성이 인정되어 태평양전쟁 중에는 비행장 건설에 투입되기도 하였다.
이 연구의 목적은 일본 근대 초기 감옥의 체계와 수용자 노동의 특성과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메이지 유신 후 홋카이도 개척기 집치감과 아바시리감옥의 사례를 통해 그것에 접근하였다. 이를 통해 홋카이도 개척사와 행형의 역사, 감옥의 공간과 구조, 규율과 처우, 수용자의 노동 환경과 작업 방식 등을 파악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추구했는데, 행형개혁을 통해 국가의 치안을 확보하고 국방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것을 위해 가장 먼저 선택한 곳이 홋카이도였다. 홋카이도는 러시아의 남하 정책, 그리고 일본의 근대화 정책으로 인해 국방경비와 자원 확보가 필요한 지역으로 급부상했다. 메이지 신정부는 홋카이도 개발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실험하고 경험을 축적하고자 했는데, 이때 수용자들의 노동력이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각 지역의 중범죄자들은 홋카이도로 보내져, 집치감에서 분감으로 다시 외역소로, 그리고 다시 휴박소를 전전하며 도로 개착에 투입되었다. 수용자들은 혹독한 환경에서 엄격한 규율과 열악한 처우를 받으며 생활했다. 이러한 가혹한 조건 아래서 많은 수의 수용자들이 죽거나 병들었지만, 그들의 희생으로 홋카이도 발전의 초석이 다져졌다. 또한, 메이지 신정부는 홋카이도 개척의 경험을 동아시아의 식민지에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기 감옥 체계와 수용자 노동은 목적과 내용, 형태에서 현대의 그것과 많은 차이를 보인다. 첫째, 수용자 노동은 철저히 국가의 전략적 이해를 달성하는 데로 초점이 맞춰졌다. 물론 그것은 응보적 차원에서 추진되었지만, 수용자가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가와 상관없이, 혹은 수용자의 사회 복귀와 무관하게 오로지 국가의 정치적, 경제적 목적에 따라 수행되었다. 당시 신정부는 봉건제와 결별하고 국민국가로의 도약을 꿈꾸고 있었다. 메이지 유신 초기에는 영주와 무사들의 저항이 끊이지 않았고, 사회적 혼란도 지속되었다. 또한, 서구의 열강들은 끊임없이 연안에 출몰해 정치 권력을 위협했다. 따라서 신정부는 행형개혁을 통해 치안을 확보하고, 중죄인의 노동력을 활용해 지역을 개발하고자 했다.
둘째, 수용자의 노동은 근대와 현대 사이의 과도기적 형태를 띠고 있었다. 수용자에 대한 처우와 노동은 도형과 유형, 징역형이 결합된, 모호한 형태를 보였다. 과거에 중죄인은 태형이나 장형, 교수형이나 참형으로 다스려졌다. 그리고 신분이 하락하여 노비로 전락하거나, 절해고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이후 중죄인은 징역형을 선고받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도형과 유형에 의해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수용 생활을 했다. 홋카이도에서 수용 생활은 사실상 ‘완만한 사형’이나 마찬가지였다.
셋째, 수용자의 노동이 지역과 국가에 미친 영향이 지대했다. 현대의 노동은 수용자의 사회복귀를 돕고, 재범을 예방하기 위해 수행되는 측면이 강하다. 따라서 노동의 결과 역시 수용자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귀속된다. 물론 장기적 측면에서 수용자의 재범을 줄여 사회에 도움을 주겠지만, 홋카이도의 죄수 노동이 지역사회에 미친 영향력에 비하면 부족하다고 볼 수 있다. 도로건설로 이주민의 유입이 활발해졌고, 지역이 개발되었으며, 행정의 권한이 풀뿌리까지 미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홋카이도 개척기에 수용자의 노동이 국가의 전략적 차원에서 실행되었고, 여러 형벌이 결합한 형태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은, 수용자 노동의 목적과 내용, 방식이 국가의 정책이나 시대의 변화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일본은 2022년 6월 17일 개정형법을 공포했는데, 이 개정형법에 따르면 현행형법에서 정하고 있던 ‘징역’과 ‘금고’를 삭제하고 하나의 ‘구금형’으로 통합했다(배미란, 2023: 27). 다시 말해 노역이 수반되는 ‘징역형’과 그렇지 않은 ‘금고형’을 통합한 것인데, 왜냐하면 노역하기 어려운 고령 수용자는 증가하는 반면에, 젊은 수용자는 재범방지에 필요한 지도를 받을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은 형벌에 형벌을 더하는 것에 불과한 의무로서의 노역은 폐지하되, 사회 복귀를 돕는 작업 혹은 지도를 강화했다. 이는 노역을 위한 노역, 열악한 조건에서의 중노동이라는 형벌로서의 노역이 아니라면, 수용자의 개선갱생 도모를 위해, 수용자의 의사와 배치되더라도, ‘작업 또는 지도’를 부과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행형제도는 수용자의 미래와 사회를 위해 정책을 수정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수용자는 자신의 미래 혹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작업을 수행하며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다.
또한, 아바시리감옥의 사례는 감옥의 설립이 지역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당시에 감옥 자체는 신문물의 산물이기도 했고, 신기술이 가장 먼저 도입되는 장소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아바시리감옥의 경우 정부의 시설이 작은 마을에 들어선 것 자체로 주민들의 관심을 받았고, 수용자 노동을 통해 지역 농업과 산업이 부흥하였다. 또한, 1912년 복구공사가 완료 후, 보일러를 통한 자가발전으로 사동과 관사에 전등이 들어왔을 때, 주민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
아바시리 지역에서는 최초의 전등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감옥은 낙후된 지역에 신기술을 도입하고 발전을 도모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한다. 한편으로 아바시리 감옥 수용자들의 고난과 희생은 전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켜, 수십 편의 영화와 드라마, 만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이로 인해 관광객이 늘어나는 등 감옥의 역사가 자원화되었다. 또한, 과거의 감옥 건물은 박물관으로 관광 자원화되어 지역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우리는 이 연구를 통해 근대 초기 국가적 변화를 꾀했던 일본의 신정부에게 있어서 행형이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또한, 감옥의 체계와 운영, 수용자의 노동이 시대와 국가적 요구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도 파악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일본의 근대 행형제도가 중노동의 부과와 수용자의 희생이 있었지만, 지역과 국가의 변화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수용자의 인권과 노동권에 대한 심각한 침해라는 부정적 유산에 대해서도 성찰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일본의 경험은 과거의 부정적 유산을 최소화하면서 긍정적 성과를 계승하고 행형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유의미한 사례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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