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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동행

우리는 한마음

시간은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그 안에 무엇을 채우느냐에 따라 삶은 서로 다른 무늬를 그리기 마련이다. 박수호 지회장(대한민국교정동우회 서울지회, 이하 서울지회)의 ‘지금’은 유난히 반짝이는 듯했다. 오랜 경험과 성찰이 쌓인 그의 시간은 ‘선명한’ 궤적을 남겼고, 이는 현재 단단한 의지와 신념으로 그 마음의 길을 환히 비춰주고 있었다.

  • 글 서선미
  • 사진 홍승진

수용자와 함께한 시간,
삶을 비추는 빛으로 박수호 대한민국재향교정동우회 서울지회 지회장

박수호 대한민국재향교정동우회 서울지회 지회장

박수호 대한민국재향교정동우회 서울지회 지회장

지금, 기품과 온기를 피우는 시간

하나의 삶은 그 사람의 ‘태도’를 흡수한다. 그리하여 청년의 때가 싱그러울 순 있어도 기품으로 빛나는 것은 그 싱그러운 젊음이 한참 지난 후에나 가능해지는 일인지 모른다.
햇살 가득한 자택 안으로 앉을 자리를 내어주는 박 지회장의 모든 시간과 경험도 어느덧 부드럽고 온화하게 그 내면으로 스며들어, 한껏 빛을 내고 있었다. 양쪽으로 열린 문을 따라 드나드는 바람처럼, 그의 인상은 자유롭고 유연했다.박 지회장은 연년생 두 딸의 성장한 가정에 든든한 ‘울타리’였다. 동시에 대한민국교정동우회 서울지회 활동을 비롯해 아파트 입주자 대표회, 노인회, 종친회 등 여러 공동체의 ‘섬김이’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그의 삶은 가족에게는 한결같이 든든한 배경이었으며, 교정동우회 및 지역사회에서는 은은한 온기를 품은 리더로 기능하고 있었다.
“결혼해서 각자 집을 꾸리며 지내다가, 작은딸과 큰딸이 차례로 이 아파트에 모여들었죠. 각각 두 아이를 두어서, 저희 부부까지 모두 10명이나 되는 대식구가 됐습니다. 손주들이 수시로 들락날락하고, 각종 모임 활동까지 주도하다 보니 퇴직 후가 더 분주한 것 같네요.”

교정人의 나날, 성실과 성찰로 일군 삶

삶은 어느 날 갑자기 선물을 안겨주지 않는다. 사람과 사물에 대한 진실한 마음을 지키며, 숱한 문제와 갈등 앞에서 일관되게 성찰하고 반성해 왔을 때 단단하고 깊어진 삶은 비로소 재미와 의미를 선사한다.
박 지회장은 현재 선물 같은 시절을 향유하고 있다. 장성해 각자의 처소를 꾸렸던 딸들이 둥지를 찾듯 다시 모여들면서, 전에 없던 즐거움을 느낀다. 평생 지켜 온 가치들이 알게 모르게 전해져 손주들에게서 자연스럽게 실현되고 있는 모습을 볼 때면, 그동안 쌓아 온 삶의 의미가 확장되고 깊어지는 듯도 하다.
박 지회장은 그 비밀을 교정직의 이력에서 찾았다. “1977년 6월 서울구치소에 임용, 2007년 6월 수원구치소에서 정년을 맞았다”는 그의 말은 단순한 회고가 아니었다. 현장에서 마주했던 수많은 사람들과의 교감, 법의 엄중함을 온전히 체감하며 쌓아 온 경험, 그리고 그 속에서 길러진 도덕적 성찰을 모두 내포하고 있었다. 즉 교정직이 그의 삶을 지탱해 온 단단한 뿌리이자 성장의 기록인 셈이다.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소박하게 살다가 교정공무원 시험을 봤어요. 죄라고 해 봐야, 잠깐 비난하고 꾸짖는 ‘잘못’의 수준만 알다가 임용 후 보안과에 발령돼 처음 ‘행형’을 접했죠. 죄지은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것이 충격이었고, ‘저들과 나는 다른 사람이다’는 생각에 낯설었어요. 할 수만 있다면 물리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습니다.”
하지만 가장의 무게 때문에 물러날 수 없었던 데다, 오히려 그때부터 시작된 교정人으로서의 이력이 삶의 주요한 동력이 됐다고 박 지회장은 고백했다. 수용자와 같은 공간에서 그들의 눈을 맞추고, 밥을 챙기고, 잠자리를 보살피며, 아프면 치료실에 데려다주고, 면회 및 재판을 위한 시간을 공유하며 긴장해야 했던 그 무수한 날들이, 사실은 개인적 삶에 좋은 재료였음을 이제는 확실히 알게 됐다고.
“죄 지은 사람들을 교정·교화함으로써 그들이 올바른 길을 가도록 돕는 것, 교도관만이 할 수 있는 일이죠. 직업이고 업무일 뿐이지만, 제게는 스스로를 관리하고 가꾸는 과정이기도 했어요. ‘수신제가(修身齊家)’라는 말도 있듯 누군가를 바로잡을 수 있으려면 나부터 반듯해야 하니까요.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았고,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나라와 천하까지는 아니어도, 저 자신과 가족만큼은 평정하게 지켜오지 않았나 싶어요.”

흔들림의 시간도 길이 된다

박 지회장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49년, 경기도 여주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8남매 중 아들로는 셋째였지만, 유난히 살가웠던 그의 아내는 맏며느리 격이었다. 말하자면 일찍부터 ‘부모를 모실’ 자격과 책임이 주어졌다는 의미다. 한편 전쟁의 여파에 따른 혼란과 유년의 가난을 꾸역꾸역 견뎌온 박 지회장은 차츰 다른 삶을 꿈꾸게 됐음을 털어놨다.
“딸을 흙강아지로 만들지 않으려면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러다가 시간을 쪼개 공부를 시작했죠. 교정공무원이 될 운명이었는지 시험 문제가 참 쉽게 느껴지더니, 나중에 성적순 발령이라는 걸 듣고 ‘상위권 합격’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했던 결단과, 자녀의 앞날을 두고 했던 낭만적인 계산은 교정의 냉혹한 현실 앞에서 무너졌다고 한다. 수용자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근무해야 하는 보안 업무, 낮과 밤의 경계가 없는 교대 근무, 수시로 벌어지는 사건과 사고들은 그가 교정직을 떠나야 할 이유가 됐다. 같은 이유로 하나둘 떠나는 동료들을 보며 이직의 정당성을 찾기도 했다. 하지만 출구가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고 박 지회장은 고백했다.
“누우면 발이 벽에 닿을 정도의 작은 방을 얻어 지내고 있었어요. 일근과 야근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고, 긴장과 피로가 몸에서 떨어질 줄 모르니 다른 준비를 할 여유가 없더라고요. 시골에 남겨 둔 아내와 딸을 하루빨리 데려와야 한다는 현실적인 고민으로 무력해지기도 했죠. 하지만 그게 또 버틸 힘 아니었나 합니다.”

기록의 시간, 마음에 ‘올곧음’ 새겨

교정 현장에서의 날들은 고단했지만, 박 지회장은 작은 일 하나도 허투루 대하지 않았다. 모든 기록이 손으로 작성되던 시절이었기에 정갈한 글씨로 중요한 문서들을 작성했는데, 매일 같이 차트지에 한 글자 한 글자 정성껏 써 내려간 보고서는 급기야 교도소를 넘어 법무부 장관에게까지 전달됐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보안과에서 총무과로 발령이 났던 일, 꼼꼼한 기록과 깔끔한 정리로 중요한 문서 작업을 도맡으며 실력을 발휘했던 기억, 그 능력을 인정받아 법무부에서 근무했던 8년 간의 시간을 박 지회장은 차례로 들려줬다.

“아버지가 한학자셨던 덕에 한자를 읽고 쓰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어요. 한글과 한자를 혼용하던 때라 문서 하나를 완전히 읽으려면 한자를 알아야 했거든요. 글자 하나 놓치지 않고 읽을 수 있다는 게 재능으로 평가되며 참 뿌듯했던 기억이 납니다.”
박 지회장은 교정직이 젊은 날의 자신을 많이 키워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죄를 지으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 법을 아는 사람으로서 법을 두려워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깊이 깨달았다고. 그리고 그 모든 시간의 경험이 평생을 쓰고도 남을 연료처럼 자신을 올곧게 지켜줬다고 믿는다. 다만 ‘합격’을 전하며 봤던 어머니의 표정이 아직도 얹혀 있는지, 그의 눈이 빨갛게 충혈됐다. “실망으로 굳어지던 어머니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고 말하는 박 지회장은 목이 메는 듯하지만, 그 기억마저 그의 존재 어디쯤에서 반짝이고 있지는 않을까.
월남 참전용사인 박 지회장은 국가보훈 대상자이기도 하다. 제70회 현충일을 앞뒀던 지난 5월, 그의 모습이 환하게 빛났던 것은 어쩌면 서울구치소 정원에서 열릴 고(故) 우학종(6·25전쟁 당시 개성형무소장) 선배의 뜻을 기리는 마음 때문이었으리라. 한참 추모행사 준비 중이었던 그의 미소에는 긴 세월 품어온 교정人의 신념과 자부심이 단단히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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