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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 아카이브

교정 포커스

  • 글 금용명 교도소연구소 소장(前 안동교도소장)

우리나라
현대 행형의 성립(하)

목차
  1. Ⅰ. 서
  2. Ⅱ. 해방, 그리고 미군정의 억압적 통치와 행형운영의 한계(1945년 8월∼1948년 8월)
  3. Ⅲ.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정치화된 형무소 (1948년 8월∼1950년 6월)
  4. Ⅳ. 6·25전쟁과 형무소 피난, 희생과 야만적인 학살(1950년 6월∼1953년 7월)
  5. Ⅴ. 전후 재건과 행형개혁을 위한 도전 (1953년 7월∼1961년)
  6. Ⅵ. 결어 : 행형에서 교정으로

Ⅴ. ‌전후 재건과 행형개혁을 위한 도전(1953년 7월∼1961년)

가. 서

국가는 1955년 형무소부흥대책위원회를 설치하고 6·25전쟁 이후 형무시설 복구와 개선 및 행형시스템의 개선 사업에 나서 치열한 노력을 통해 1961년 행형에서 교정으로의 전환의 단초를 마련하였다. 행형개혁가들은 6·25전쟁 이후 주요 목표가 ‘민주행형’의 시대를 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부패한 정권을 위해 일하든 반대하든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민주화는 민의를 반영하기 위해 제도를 개혁하려는 진지한 시도이거나 자유화, 근대화, 미국화라는 보다 모호한 의미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모순적으로 보이거나 최소한 공허한 선전으로 보이지만, 행형의 민주화라는 목표는 형무소를 보다 효율적인 갱생과 냉전적 주체 형성의 장으로 재건하고 변화시키려는 진지한 요구였다.
6·25전쟁으로 인해 19개 형무소 중 3개(마산, 부산, 대구)를 제외한 모든 형무소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형무소 인프라 피해 외에도 형무소 직원들도 전투 첫 해 동안 전선이 급격하게 바뀌는 비참한 전쟁으로 인해 희생되거나 근무지에서 사망했다. 공개적인 보복 행위가 진정되고 법무부와 형정국이 정상적인 운영을 재개한 후, 피해를 평가하고 전쟁 전 초기 정권의 최소한의 개혁 진전을 넘어 앞으로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전쟁 전 형무소 시스템은 일반 범죄의 가해자를 유죄 판결하고 재판하고 처벌해야 하는 국가의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하여야 했으나, 형무소를 좌파 반대파를 감시하는 장소로 변모시키는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형무소와 한국 사회의 현대화라는 더 높은 목표에 도달하기 전에 시스템을 전쟁 전의 불만족스러운 상태로 재건해야 했다.
6·25전쟁 후 행형개혁가들은 식민지 시대의 과거에 대한 불안과 냉전 시대 미래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민주 행형’이라는 슬로건 아래 행형 시설과 문화 자체를 재구성했다. 재소자에 대한 인도적 처우를 행형 민주화와 함께 한국 사회 발전을 위한 전제 조건으로 여기게 되었다. 민주화 담론은 인도적 처우의 개념을 확장하여 적절하게 설비되고 위생적인 시설에서 작업, 교육, 오락, 종교적·도덕적 교화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확장했다. 이 시기에 이승만 대통령은 재임 시 서울형무소를 2차례(1954년 12월 12일, 1960년 1월 1일) 방문하였으며, 이는 현대행형사에서 행형개혁을 국가적 차원에서 다룬 첫 번째이자 마지막 시도였다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1952년부터 1960년까지 진화하는 민주행형 담론의 윤곽을 따라가면 먼저 우리나라 행형개혁자들의 미국과 유럽에서의 시찰여행을 통한 행형개혁과 이를 통한 시설과 행형운영의 현대화, 국제원조를 기반으로 한 전후 시설복구, 그리고 각종 법령의 정비 및 이를 통한 행형의 발전을 알 수 있다. 특히 수원형무소 건설은 이 시기에 있어 행형개혁의 결과물로서 성과를 거두려고 치열하게 노력하였으나 이론과 실무, 인력, 경험 등 모든 분야에서 빈약한 인프라로 인해 그리고 이어서 발생한 5·16 군사혁명으로 인해 좌절에 직면해야 했다. 다만, 수원형무소 건축구조와 운영방식은 우리나라 행형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매우 중요한 도전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제정된 행형관련 법령을 살펴보는 것은 전쟁후 시설복구를 위한 노력 속에서도 재소자에 대한 의식주와 갱생을 위한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발전해 나가는 행형의 개혁을 알기 위해 필요하다. 1950년 행형법 제정 후 약 6년 만에 1956년 2월 2일 「행형법시행령」(대통령령 제1125호)이 시행되었다. 6년이라는 시간은 6·25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형무소 시설을 복구하고 행형시스템을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었으나 행형법시행령의 내용은 1912년 시행된 감옥법시행령의 구조와 내용과는 거의 다르지 아니하였다. 1957년 7월 19일 「재소자 식량급여규정」(법무부령 제21호), 「재소자 의류 및 침구의 제식규정」(법무부령 제22호)이 시행되어 재소자에 대한 의식주의 기본적인 수준을 갖추게 되었다.

나. 복구와 재건

행형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전쟁으로 파괴된 형무소 시설을 재건하는 것이었다. 형무소의 시설과 장비 대부분이 파괴되거나 도난당하는 등 전체 시설의 80%가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6·25 전쟁 당시부터 계속된 빨치산 혐의자와 전시 민간인 정치범을 구금하기 위해 구금 시설 확충이 시급하였다. 형무소는 항상 과밀했지만 전시 반역죄로 구금되는 정치범이 증가하고 전쟁으로 손상된 시설의 수용 능력이 감소하면서 더욱더 과밀해졌다. 행형개혁가들은 민주행형 이론과 물질적 실천을 통합하는 최신 시설을 건설하여 기존 시스템을 뛰어넘을 계획을 세웠다. 이는 전쟁으로 완전히 황폐화된 형무소는 물론 행형시스템을 개선하고자 한 원대한 목표였다.
1953년 7월 휴전 이전부터 유엔한국재건단(UNKRA), 유엔한국민간원조단(UNCACK), 국제협력단(ICA) 등의 원조 단체들은 한국의 공장, 병원, 기타 중요한 공공 인프라를 재건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었다. 38도선 주변에서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유엔한국재건단과 ICA는 1951년 11월 남부 지방에서 가장 피해가 심한 7개 형무소에 5,445㎡(1,650평)의 감방 공간을 재건하는 데 자원을 투입했으며, 229,323달러 상당의 건축 자재를 제공하여 피해 형무소 전체에서 즉각적인 구금 요건을 위한 최소한의 공간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1954년 국제협력단(ICA) 원조자금 1차 연도 45만 달러의 자금을 받아 수원에 현대식 중간형무소를 건설하기 위해 사회 일반인의 전문적 기술과 경험을 망라하고, 형무소부흥대책위원회의 토의를 십수회 거듭하여 설계를 완성하고 토목공사를 진행하였다. 6·25전쟁으로 인해 다른 분야보다 형무소 건물 및 시설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빈약한 국가재정으로 복구사업에 노력을 기울여왔으나 기술상·경제상 등 제반 애로에 부딪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민주행형을 지향하면서 파괴된 형무소를 부흥하기 위해 조사하고 이에 따른 대책과 계획을 수립할 기관 설치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형무소부흥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1955년 2월 17일 법무부 형정국장실에서 신언한 형정국장 등 16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1회 회의를 개최하였다. 형무소부흥대책위원회는 법무부장관의 자문에 응하여 전재를 당한 형무소의 부흥대책에 관하여 제반조사 및 심의를 하며 그에 관한 계획을 수립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형무소부흥대책위원회규정 제1조).

수원형무소 자치제 기념비(左_설립 당시, 右_현재 여주교도소에 있음)

전체 시설은 1954년에 45%, 1956년에 52% 복구된 것으로 추정되었지만 1960년까지는 70.1%만 복구되었다. 복구 과정은 더디게 진행되었고, 전후 재건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형무소와 행형을 냉전 블록 구축의 문제로 암묵적으로 재구성했다. 우리나라가 형무소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ICA는 법학자, 경찰, 형법학자 등 다양한 분야의 한국전문들을 미국과 유럽으로 파견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형무소 현대화에 대한 개혁 이야기는 우리나라의 냉전시대 후원자이자 롤 모델인 미국 형무소를 직접 경험하면서 도출된 발전적 경로를 따라 사회를 재구성하는 것이기도 했다.

1957년 8월 말 현재 복구실황(6·25 전쟁으로 인한 파괴)(형무요람, 1959년)

다. 개혁을 위한 치열한 노력과 한계

전쟁 후 1960년까지 수용인원은 급격한 증가 없이 약간의 증가추세에 있었다. 이 시기에 행형은 미국의 지원 하에 식민지 행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하였으며 그 결과 행형에서 교정으로, 형무소에서 교도소로, 형무관에서 교도관으로의 기초를 닦는 시기로 평가할 수 있다.

법무부는 1954년 새해를 맞아 ‘인권 보호’와 ‘행형 민주화’를 슬로건으로 한 법무제도 개선 계획을 발표했다. 지난 몇 년간 영장 없는 체포, 성급한 처형, 고문 및 기타 인권 침해에 대한 보고가 쇄도했던 한국 경찰과 검찰의 암울한 인권 기록을 개선하는 것은 부끄럽고 당연한 개혁 목표였다. 그러나 처벌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개혁가들은 구금자 학대를 없애기 위해 형무관 문화의 변화도 요구했다.
개혁 담론에서 미국과 유럽의 행형에 대한 이상(理想)화는 일제 식민지 시대의 악마화와 병치되었다. 행형에 종사하는 형무관들은 전후 개혁조치를 봉건적 과거로부터의 역사적 각성이라는 정부의 노선을 따랐다. 봉건적 잔재와 인권 침해로부터 자유로운 형무소를 구현하는 것이 이 세대의 행형학자들의 역사적 소명이었다. 이러한 행형 발전의 틀은 식민지 시대의 유산과 해방 이후 구금자에 대한 지속적인 학대를 넘어, 구금자의 인권이 존중되고 우리나라가 냉전 동맹의 동등한 파트너가 되는 미래를 기대하는 것이었다. 형무소는 1950년대 내내 유엔과 미국의 홍보 활동과 점점 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지만, 실제적인 변화는 더디게 진행되었다.
최세황은 1953년 초 영국을 방문하여 여러 형무소를 방문했다. 영국 여행에 대한 전반적인 보고는 단순하고, 한국의 형벌 개혁을 위한 비교 분석이나 처방은 약간의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1950년대 중반 한국의 행형개혁가들은 오래된 형무소가 식민지 시대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에 새로운 형무소 건설을 통해 과거와 단절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의 베테랑 형무관들은 대개 과거 식민지 체제 하에서 일해왔고, 점진적인 개혁 프로그램이 진행될수록 오명은 더욱 심해져만 갔다. 오랜 경력을 통해 얻은 그들이 가진 노하우는 식민지 관행의 잔재라는 비난을 받았다. 법무부 형정국장 신언한은 1954년 두 차례에 걸쳐 미국, 스웨덴, 덴마크를 방문했으며 수원형무소를 최소한의 보안을 갖춘 시설로 개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최월동은 부산형무소장으로 1955년 9월부터 1956년 1월까지 미국 연방 및 주 행형기관을 견학했다.
이 시기에 우리나라 형무소는 극적인 재건과 혁신을 겪고 있었고, 미국의 형무소는 갱생 기반 교정 모델의 효율성이 정점에 달하고 있었다. 개혁가들은 1955년에 발표된 「수용자 처우에 관한 유엔최저기준규칙」에 명시된 국제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는 압박을 더 받았다. 논란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형무소 시스템은 우리나라 형무소의 발전을 위한 중요한 로드맵이었다.

1955년 8월 FOA는 최세황이 워싱턴, 뉴욕, 뉴저지, 펜실베이니아, 웨스트버지니아, 일리노이주 방문하는 4개월간의 해외여행에 1천5백 달러와 2천 달러의 봉급을 지원하기로 했다.1) 최세황의 공식 FOA 프로젝트 제목은 형무소 운영 및 관리였다. 미 국무부의 제도적 기반과 재정적 지원은 1950년대 전후 한국의 빈곤한 상황에서 살던 한국인들에게 매우 드문 경험을 제공했다. 그가 쓴 글에는 자동문, 방탄유리로 분리된 면회 시설, 전화 수신기, 구금자 거실 내 라디오 등 20세기 중반 기술 강국의 형무소에서 인상 깊었던 점들에 대한 언급과 함께 이 충격적인 경험이 반영되어 있다. 그는 뉴욕시 형무소의 베테랑 형무소장을 만난 이야기를 소개했다. 형무소에 들어서자마자 소장은 최세황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아들이 유엔군과 함께 한국에 파병되어 전쟁 후에도 그곳에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는 다른 여러 나라의 행형 관련 자료는 가지고 있지만 한국의 행형 관련 문서는 아직 입수하지 못했고, 한국의 행형에 대해 전혀 모른다며 설명을 요청했다. 최세황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한국 행형법의 영문 번역본과 형무소 조직도를 출력해 보여줬다. 그는 인쇄물을 잠시 살펴보더니 ‘일본 제도와 거의 똑같다’며 무관심한 듯 안경을 벗고 말했다. 미국의 형무소 소장들은 1955년의 우리나라 행형제도가 식민지 시대의 뿌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음을 무심코,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시사하고 있었다. 최세황은 자신의 노력이 과거 식민지 시스템과 거의 동일하다는 말을 듣고 크게 낙담했다.
형무소 개혁 담론은 탈식민지화와 전쟁이라는 독특한 경험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서구 모델에 대한 수용은 공산주의 팽창에 대한 보루로서 동북아시아의 국가 통제 장치를 안정화시키는 프로젝트에 국한되어 있었다. 민주행형은 형벌 이데올로기 자체의 변화뿐만 아니라 해결해야 할 실질적인 문제들을 중심으로 제기되었다. 실질적 영향은 형무소 공간을 미국의 냉전 블록에서 우리나라를 보호하는 더 광범위한 프로젝트에 통합하는 것이었다. 전후 재건기의 일선 형무관부터 형무소장, 형법학자, 법무부 고위급까지 다양한 인사들이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민주의 행형 이념을 표현했지만 대체로 파괴된 시설복구, 최소 보안형무소 개발, 수용자 교육 및 오락 프로그램 개선, 형무소의 위생 및 의료시설 확보 등 몇 가지 핵심 개혁 과제로 귀결되었다. 보다 추상적으로 민주행형을 추진한 배경에는 냉전의 자유 세계 건설이라는 초국가적 개발 프로젝트에 한국 형벌을 통합하여 탈식민지화를 완성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다. 1) ‌ICA의 전신인 해외공작국(FOA)의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1954년부터 1960년까지 미국 원조 단체 연합은 약 1,700명의 한국인의 미국 기술 연수 여행을 지원했다.

민주행형은 이념적, 형법적 측면에서 형무관을 교육자로, 재소자를 제자로 삼아 형벌을 ‘교육적’인 것으로 재구성했다. 형정국장 신언한은 근대 행형의 임무를 교정교화를 통해 각 범죄자의 개별적 인격을 치료하는 것으로 재구성했으며, 서구 계몽주의 이후 전개된 목적론적 형벌 역사를 들며 나태함, 게으름, 자제력 부족 같은 범죄자의 특성은 형무소에서의 올바른 교육과 대우를 통해 형성될 수 있는 개인의 측면이라고 주장했다.
교육적 형벌과 민주적 형벌은 종종 혼용되거나 다양한 개혁 이니셔티브의 기표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민주주의라는 용어와 우리나라의 냉전 동맹국과의 상관관계로 인해 민주행형은 형무소에 영향을 미치는 광범위한 변화를 포괄적으로 표현하는 용어가 되었다. 민주행형의 구체적인 목표를 가장 먼저 제시된 것이 수용자의 적절한 분리를 위한 시설 재건, 가족 및 사회와의 접촉 확대를 위한 안전한 접견제도, 의료시설 및 작업 프로그램 개선, 수용자 처우 개선 등이다. 범죄자를 처벌한다고 해서 국가와 범죄자 간의 상호작용이 종결되거나 범죄에 대한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유 사회에 다시 합류할 수 있는 기술 교육을 받아야 하고, 국가 건설에 기여할 수 있는 노동력이 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대한민국은 세계 선진 ‘민주주의’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을 것이다.
수십 년에 걸쳐 형성된 행형의 문화와 관행을 바꾸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정치적 동기를 부여하면 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고, 반대로 위생적인 구금 환경과 의료서비스를 보장하는 물질적인 문제는 국제원조를 통해 제공되는 돈과 물품으로만 극복할 수 있었다.

Ⅵ. 결어 : 행형에서 교정으로

우리나라 행형은 1961년 행형법 개정을 통해 행형에서 교정으로의 길을 출발하였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개혁을 위한 수많은 사람의 노력과 현신, 희생을 통해 얻은 값진 결과였다. 그러나 해방 이후 형무소의 공간이 담아낸 역사에 대한 연구는 현재 우리나라 교정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을 극복하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지만 어디에서도 그와 같은 노력이 진행되고 있지 아니하다. 2010년 발간된 『대한민국 교정사』는 우리나라의 현대 행형제도가 이념 세뇌, 정치범 예방 구금과 학살에 사용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이러한 제도적 역사는 한국 행형사를 사회적, 정치적 맥락에 놓지 못하고 형무소 제도를 당연시하며 그 역사를 현재로부터 거꾸로 연장하고 있다. 현대 행형사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하고 범죄자라는 이유로 같은 국민을 잔혹하게 대하는 국가의 자세가 변화되지 않는다면 교정시설이 지역사회와 공존하지 못하고 국민은 자신의 지역에서 교도소를 쫓아내는 행태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범죄의 피해는 자신들과 가족 그리고 후손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간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말이다.
뿐만아니라 국가행정의 일부인 교정은 그 특징에 대해 배려받지 못하고 운용되면서 국가는 공동체의 안전에 대한 위협이라고 하는 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현상이 가까운 장래에 개선될 것 같지도 않다. 범죄자를 우리와 같은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특별한 사람(괴물)으로 대우하는 한 그리고 국가운영과 대중의 관념을 혼동하는 사람들에 의해 교정정책이 좌우되는 현상이 지속되는 한 범죄자를 재사회화하기 위한 교정의 노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구금은 범죄로부터 사회의 일상을 보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당화 담론을 벗겨내면 구금은 사람을 우리에 가두는 단순한 행위일 뿐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와 현대사를 통해 순수 범죄가 아니라 특정집단의 생각에 따르지 아니하는 사람을 처벌했던 일들이 교도소에 대한 주된 기억으로 대중들의 머리속에 자리 잡았다. 그 영향은 범죄자란 누구인가와 범죄자 처우 그리고 재사회화를 이념적 기초로 하는 교정철학에 오랫동안 혼란을 초래하였다. 또한 교도소는 사회복귀, 형벌, 무해화라고 하는 모순된 목적들을 동시에 충족시켜야만 했고 그와 같은 목적에 대한 혼란의 결과는 교도소의 역사를 끊임없이 실패의 역사로 만들었다.
1961년 행형에서 교정으로 획기적인 전환 이후 교정현장에는 처벌과 교화의 균형축이 무너져 죄에 대한 벌의 관념은 사라지고 교화만이 남아있다. 앞에서 살펴본 현대행형사의 불행한 사건들로부터 잉태된 교도소에 대한 왜곡된 인식들은 수용자에 대한 과도한 권리보장을 위해 중복되고 다양한 관료적 통제를 만들어냄으로써 구금의 위하력과 일반예방의 효과 그리고 교도관의 역할과 감화력을 약화시켰다. 수용자에 대한 전통적인 관리방식은 2000년 이후부터 헌법재판소, 법원, 국가인권위원회의 조사와 개입의 대상이 되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헌법상 국민의 기본권에 대하여 평균적 정의에 입각하여 객관적인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현실과 거리가 있다. 고립된 교정공무원들은 위축되고 내부적으로 비판하고 불신하면서 자존감을 상실하고 있다. 국가 형사사법체계의 한 축이 소리 없이 무너지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에 있으며 그 책임을 져야 하는 교도관들의 어깨는 더 무거워지고 있다.
지금부터라도 우리는 현대행형사를 연구하고 정리함으로써 교훈을 얻고 이를 바탕으로 미래 교정이 나가야 할 방향을 찾아야 한다. 역사는 우리의 과거를 이해하고, 현재를 살아가며, 미래를 준비하는 데 중요한 교훈을 제공하고, 그리고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의 교훈이기 때문이다.

참고자료

금용명, 교정학, 박영사, 2021년 9월 25일
서운재, 일제강점기 조선행형이야기(증보판), 교도소연구소, 2023년 4월 1일
법무부 교정본부, 대한민국 교정사Ⅰ, 2010년 5월 31일, 교정본부
법무부 형정국, 형무요람, 1956년, 형정국
James David Hillmer, Democratizing Punishment: South Korean Penal Reform and Cold War Subjectivity 1945–60, Doctor of Philosophy in Asian Languages and Cultures University of California, Los Angeles,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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