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아름다운 동행

생각의 창

  • 글 장우현 한국외국어대학교 특임교수

마약사범,
배우가 되다

문지방을 넘어가다

“이번에는 배우들이 트라우마 상황을 연기한 후에 진행하는
감정정화를 위한 실습인 <문지방 넘기>입니다. 여러분 2미터 앞
정도에, 이곳 현실에서 상상의 공간으로 넘어가는 문을 만듭니다.
제가 신호를 드리면 문지방을 넘어 치유의 공간을 온몸으로
생생하게 경험하겠습니다. 먼저 불필요하거나 과도한 근육의 긴장을
제거하고요. (다들 천천히 숨을 내뱉으며 이완하고 집중한다) 다들
준비되셨나요?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Go!”

올해 2월부터 이곳 교도소 교육실에서 진행된 마약사범재활 전담교정시설 수용자 대상 연극치료 프로그램의 참여자 13명의 수용자들은 저마다의 시공간에서 무엇인가를 경험하고 있다. 이는 편안한 표정과 호흡, 그리고 부드러운 몸의 움직임을 통해 선명하게 전달되고 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그는 천천히 눈을 뜨고 무엇인가를 메모하였다.
치유의 공간에 대한 다른 참여자들의 보고를 다 들은 후, 마지막으로 그에게 실습과정을 물어보았다.

“(한숨을 쉰다) 강사님...
다른 분들과 다르게 저는 상상의 문지방을 넘을 수 없었습니다.”
“왜요?”
“마약이 가로막았습니다.”
“(잠시 망설이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 마약은 어떻게 생겼나요?”
“거대하고 투명한 ‘막’이었습니다. 소리를 질러도 막에 부딪혀 다시
메아리로 돌아오고, 저는 단 한 걸음도 치유의 공간으로 건너갈 수
없었습니다...”

총 21회기 일정 중 8회기에 진행된 <전할 수 없는 말> 실습에서 그는 자신의 마약중독과 강하게 결합되었다고 스스로 평가하는 트라우마와 관련된 감정응어리와 사건을 처음으로 말과 행동으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연기 발표가 끝나고, 다른 참여자들의 공감과 격려 그리고 조언을 듣고 그는 다른 수용자들에게 고맙다는 한마디 말을 꺼냈다. 그리고 그와 그 공간에 있는 모든 이들은 침묵했다.
약 5분간.

감정을 만끽하다

연극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문서인 기원전 2-3세기 경 인도에서 쓰여진 <나띠야 샤스뜨라>부터 20세기 초 러시아의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우리에게 메소드연기라고 알려진 연기법의 기초가 된 연기이론) 관련 문서들까지 연극에서 일관되게 강조되는 것이 있다. 배우가 되기 위해서는 감정을 만끽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자신의 삶은 물론 작가가 제시하는 삶에서 한 개인이 만나는 모든 감정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혹은 이들 사이에 위치하는 모든 종류의 감정들을 끝까지 경험하는 ‘감정만끽’ 연습을 해야 한다.

어색하고 불편하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수천 번의 감정만끽 연습을 통해 배우는 비로소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즉, 자유롭게 감정을 느끼며 온전하게 삶을 살아가려 한다. 또한 배우들은 무대에서 혹은 카메라 앞에서 라사rasa라고 불리는 감정의 에센스를 관객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기쁠 때, 기뻐하며, 슬플 때, 슬퍼하며, 화날 때, 화내며, 미울 때, 미워하며, 사랑을 느낄 때, 온맘으로 사랑해도 됩니다! 여러분!”

자신의 삶은 물론 작가가 제시하는 삶에서 한 개인이 만나는 모든 감정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혹은 이들 사이에 위치하는 모든 종류의 감정들을 끝까지 경험하는 ‘감정만끽’ 연습을 해야 한다.

경험을 경험하다

물질사용장애의 회복을 위한 이론적 모델인 Lifestyle Balance Model(LBM)과 물질중독을 공통요인으로 설명하는 대표적인 관점인 National Institute on Drug Abuse’s Phenotyping Assessment Battery(NIDA PhAB)에서는 메타인지, 실행기능, 내수용 감각, 정서조절 등을 중독치료의 주요한 요인들로 제시한다. 즉, 정서를 인지적으로 경험하고 또 조절하여, 문제상황에서 발생하는 부정적 정서경험이 다시 중독으로 연결되는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독회복의 목표이다. 이를 바탕으로 설계된 이번 연극치료 프로그램에서는 다양한 감정을 경험하는 순차적인 실습들과 더불어 메타인지, 성인실행기능, 생리적 스트레스, 정서조절곤란 척도 등을 활용하는 실험연구를 병행하여 실제적 효과성 또한 확인하고자 한다.

이번 연극치료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13명의 수용자들은 약 3개월 동안 강렬한 감정 반응이 유도되는 자신만의 에튜드(etude, 즉흥상황극)를 설계하여, 수행하는 배우이자 동시에 관찰하는 관객이 되는 경험, 즉, 자신의 경험을 아주 천천히 안전하게 경험한다. 더 나아가 혼자가 아닌 집단작업을 통해 자신의 경험들이 더욱 확장되고 연결되는 경험을 한다면, 출소 후 만나게 될 부정적인 감정경험과 갈망의 상황에 의식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힘과 자원을 비축하게 될 것이다.

서로가 연결되다

총 21회기 일정 중 14회기에서는 수용자들이 가진 행복한 경험을 다시 경험하고 기억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이는 발생가능한 부정적인 감정을 상쇄하기 위한 긍정적 자원을 비축하는 것이 목적인 작업이다.
한 수용자는 20여 년 전 가족들과 소풍을 가는 순간을 떠올렸고, ‘놀이동산’이라는 제목의 에튜드에서 자신의 97년식 아반떼 차를 타고 아내 그리고 아이와 함께 놀이동산을 가고 있었다. 연기하는 수용자는 물론, 에튜드를 지켜보는 관객인 12명의 수용자들까지 그날의 길과 날씨, 스틱 기어의 느낌이 생생하게 오감으로 느껴졌고, 아이가 최근에 배운 노래를 부르고 아빠가 그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할 때, 예상하지 못한 장면이 펼쳐졌다.

“개울가에 올챙이 한 마리~ 꼬물 꼬물 헤엄치다~ 뒷다리가 쑤욱~ 앞다리가 쑤욱~ 팔딱 팔딱 개구리 됐네~ 꼬물 꼬물 꼬물 꼬물~ 꼬물 꼬물 올챙이가~ 뒷다리가 쑤욱~ 앞다리가 쑤욱~ 팔딱 팔딱 개구리 됐네~”

하나둘씩 노래를 따라 부르다 급기야 모두가 함께 노래를 불렀다. 마치 그 시간과 공간에 함께 하고 있는 것처럼 느꼈으며, 대다수는 웃고 있었고, 몇몇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무심히 한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사실 저는 자식들과 저렇게 행복하게 함께하는 순간을 경험 못했습니다. 늘 감옥을 들락날락하는 동안 자식들이 훌쩍 커버렸습니다... 그래도 에튜드 발표를 보면서 뭔가 가슴이 뭉클하네요.”

마약중독자가 느끼는 가장 특징적인 경험은 ‘단절감과 고립감’이다. 마약에 중독되면서 가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세상, 더 나아가 ‘나’와도 단절되고 고립된다. 자신과 사람들, 세상과 다시 연결되는 것이 중독회복의 핵심이다. 연극이라는 예술 안에서 서로 다른 삶과 경험이 연결되고 이해되는 회복의 시간이 되기를 희망한다.

SNS 공유하기

주소복사 카카오톡 네이버블로그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