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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 아카이브

교정 포커스

  • 글 금용명 교도소연구소 소장(前 안동교도소장)

우리나라
현대 행형의 성립(상)

Ⅰ. 서

형사사법의 역사는 공정, 평등, 법적 안정성을 의미하는 법치주의의 이념과 대중적 사법의 열정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감 속에서 자의적이고 변덕스러운 일들로 점철되어 왔다. 또한 형사사법기구는 부패, 비능률, 가혹행위와 같은 길고도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권력을 가진 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회적 약자, 정치적 반대자, 문화와 생활방식을 달리하는 사람들의 처벌에 형사사법체계를 주저없이 활용하였다. 정치권력과 형사사법체계의 핵심 주체들은 공익보다는 감옥을 처벌의 한 수단으로 이해하고, 반대자들을 제거하는 데 거리낌 없이 사용하였다. 즉 감옥은 지배자가 권력을 유지하고 사회질서에 대한 위협에 대응하는 편리한 도구였다.

현대 행형은 식민지시대의 행형제도를 극복하고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를 반영한 행형시스템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식민지, 미군정, 좌우익의 극렬한 대립, 6·25전쟁 등의 시기에 희생과 헌신, 학살이 자행된 야만의 시대를 경험했다. 1945년 해방 후 식민지 시대의 법률, 제도, 시스템을 형식상이든 실질적인 내용이든 우리나라 것으로 전환하기까지의 시간과 노력은 십수년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국가가 저지른 야만적인 행위는 전국 형무소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으나 이를 포함한 행형 전반에 대한 학계 연구는 거의 없으며, 행형 역사의 발전과정에 대한 중요성을 이해하고 교훈을 얻고자 하는 노력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우리나라 행형사에 대한 비판적인 학자들은 행형제도의 발전을 맥락화하려고 시도하지만, 1945년 한반도 해방과 1961년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 사이의 이 시기를 대부분 간과하고 있다. 근대행형사는 주로 19세기 후반의 감옥제도 도입과 식민지 시대(1910~1945년)의 일제 통치에 대한 저항을 억압하기 위해 징역형이 사용된 것에 초점을 맞춰왔다. 전근대 형벌 문화는 주로 억제 효과를 위한 체벌과 자백을 이끌어내기 위한 고문에 크게 의존하는 법률 및 제도와 함께 보복적인 성격이 강했다. 근대로의 전환기인 대한제국(1897~1910년) 시기에 신체형을 시간제 형벌로 전환한 것은 갱생주의 행형사상으로의 기념비적 전환을 상징한다. 학계에서는 우리나라가 일본의 개입 없이 형벌과 행형 개혁을 수행할 자율성을 가졌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지만,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추진된 형사사법제도의 근대화는 이후 식민지 제국이 한반도의 일상생활에 침투하는 데 이용되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감옥을 역사화하는 것은 식민지 정권이 독립운동가들을 구금하고 고문하고 처형하는 데 사용한 것과 분리할 수 없다. 학계는 식민지 감옥의 ‘근대성’이라는 개념을 반박하기 위해 식민지 행형 당국의 지속적인 신체 고문에 거의 전적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행형 근대화가 식민지 경험에 의해 착색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사실이 식민지 정권과 식민지 이후의 정권을 통한 지배 권력의 확산에 대한 분석을 흐리게 해서는 안 된다.

일반적으로 행형제도는 피지배자와 권력자 사이의 진화하는 관계를 극명하게 드러내면서 국가 권력을 공고히 하는 중요한 도구였지만, 정권의 지지자들은 정당성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했고 위기에 처한 형무소에서 구금자 갱생의 효과를 과장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적법 절차에 따른 구금이라는 식민지 행형제도의 정당성을 계승했지만,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계속해서 초법적이고 예외적인 폭력으로 회귀했다. 식민지 시대와 미군정 사이의 틈새에서 이러한 권력관계가 어떻게 되었는지, 군사 정부에서 어떻게 통합되었는지, 그 후 우리나라에서는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에 대한 학술적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아가 행형개혁이라는 매우 다른 맥락에서 구금자의 갱생은 자유가 박탈된 자를 자유로운 주체로 변화시키는 과정으로 작용하며, 이러한 기능은 민주적 통치를 정당화하는 데 필요하였다. 형무소의 처벌 이미지는 식민통치로부터 해방의 장소에서 ‘반역자’를 처벌하는 장소로, 그리고 결국에는 선량한 시민을 양성하고 책임감을 심어 ‘자유 세계’ 국가의 합당한 일원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학교로 변화했다. 형무소는 구금자와 시민 모두에게 일탈과 범죄를 국가 발전의 장애물로 규정하는 혐오감을 주입하는 또 다른 통로였다.
1945년 8월 16일 경성형무소 밖에서 해방된 정치범을 맞이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 한가운데를 점령한 채 전차를 멈춰 세우는 모습은 식민지 시기의 일상적인 삶의 흐름이 멈춰버린 모습이다. 그러나 이 순간의 희망은 잠시뿐, 해방과 함께 점령과 분단, 이념대립으로 인한 학살,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Ⅱ. ‌해방, 그리고 미군정의 억압적 통치와 행형운영의 한계(1945년 8월∼1948년 8월)

가. 서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수립까지 시기는 대한제국부터 시작되어 식민지 시대를 거친 근대 행형으로부터 현대 행형으로의 변혁기에 해당한다. 자료 소실과 연구 부재 등으로 혼란과 대립, 갈등의 시기에 행형운영과 형무소 상황에 대해서는 어떠한 과정을 거치면서 전개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기록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일본은 식민지 침략 과정에서 저항하는 사람들을 처벌하고 구금하여 사회로부터 분리하기 위한 전략으로 우리나라에 형벌과 행형의 근대화를 강요하는 등 사회통제수단으로 근대식 감옥을 도입했다. 감옥은 범죄자의 갱생과 다른 나라를 식민지화하는 데 있어 치밀하게 계획적으로 이용된 전형적인 근대적 시설이었다. 해방 후 형벌과 행형시스템의 한국화는 식민지 억압의 도구인 감옥이 사회 통제의 필수 시스템으로 변화되는 과정이었다. 이 시기는 총독부로부터 형무소를 접수하고 형무소 확장을 통해 행형 개혁과 미국의 이익에 우호적인 정권을 수립하려는 미군정의 계획이 교차하는 시기이다. 미군정은 행형시스템을 한국화함으로써 가혹한 식민지 제도를 효율적이고 자율적인 한국 통치의 도구로 바꾸려고 했지만, 우리나라가 스스로 제도를 개혁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

이 시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제 범죄, 빈곤 범죄, 미군정 명령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절망에 의한 경제 범죄가 만연했다. 일본인들은 식민지 은행 금고로부터 많은 자본을 가지고 귀환하려고 하였고 이는 인플레이션과 곡물 배급 위기를 촉발했다. 정치 엘리트들이 새로운 정부 기구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경쟁하는 동안 노동자 계급은 파열된 식민지 경제에서 사회적 재생산의 무게를 견디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해방은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존재를 위한 공간을 열어주었지만,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써 이주와 격변, 사회 범죄도 증가했다.

해방 후 수년 동안 형무소 운영과 수용자 처우에 대해 식민지의 법령이 거의 그대로 적용되었다. 1948년 3월 31일 남조선과도정부 법령 제172호로 「우량수형자 석방령」이 공포되어 선시제도(good time system)가 시행되었으나,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유명무실하게 되다가 1953년 형법 제정시 부칙에 의해 폐지되었다. 또한 1912년 조선감옥령 제정으로 우리나라에 적용된 일본 감옥법상 징벌의 종류 가운데 감식(減食)벌은 1946년 3월 23일 형정국장 지시로 폐지되었다. 미군정은 1908년부터 식민지 시대에 이르기까지 형무소 감독권이 공소원(고등법원에 해당)에 있었던 것을 폐지하고 감독권이 법무부장관에게 속하게 하였다. 이 제도의 시작은 일본에서 감옥은 사법대신이 직접 감독하였으나 식민지인 우리나라에서는 법무대신과 함께 공소원 검사장으로 하여 관내에 있는 감옥을 감독하도록 중간감독제도를 마련하고 나서부터였다. 이때부터 검사 중에는 감옥 감독권이 검사장에게 있는 것을 마치 검사국에 있는 것 같이 오해하여 감옥에 대해 감독관 행세를 하고 임하는 자가 있었으며 지방의 감옥감독의 업무를 위탁하여 검사장이나 지청의 검사에까지도 감독행위를 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검사는 마치 감옥의 감독관에 해당한다고 생각하였다. 이 제도를 통해 총독부는 식민지 감옥운영에 실효를 거두어왔으며, 해방 후에는 행형운영에 검찰의 과도한 관여가 존재하였고 행형이 정치권력에 이용되는 불행한 역사를 가진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1946년에만 1,200명의 형무관이 교체되었는데, 그중 가장 많은 비율(328명)이 명령 위반, 직무 태만, 비효율성을 이유로 해고되었다. 1,206명의 형무관이 해고되었지만 형무관학교에서 교육을 이수한 신규 형무관은 807명에 불과했고, 빈자리를 형무관의 이직률을 따라잡을 만큼 자격을 갖춘 지원자로 충원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인사 문제는 이미 과밀화된 형무소의 질서를 약화시켰다.

나. 해방과 행형기관의 상황, 인수와 행형조직 구성

무너져가는 식민지 조선에서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순간은 한국인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무수히 많은 영향을 미쳤지만, 일본의 항복 소식이 형무소 복도처럼 울려 퍼진 곳은 찾아보기 어렵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미국에 항복한 후 형무소는 사실상 비워졌다. 다음날 오전 11시경, 서울에서 석방된 재소자들은 태극기를 휘두르는 환영 행렬에 합류하여 도심 지역인 종로로 향했다. 활기찬 시민들은 형무소 문을 통과하는 자유의 투사들의 모습에서 해방된 우리나라의 미래를 보았다.
조선총독부는 여운형과 협의를 하여 치안유지를 의뢰하였고 그는 해방 당일 오후 4시에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하였으며 다음 날인 16일 오전 9시부터 정치범과 경제사범을 위주로 석방하였다. 정치범 석방은 식민지 행형 시스템의 지속성과 정당성에 균열을 내는 스펙터클이었다. 식민지 행형을 넘어선 사회적 존재를 위한 공간을 일시적으로 열었지만 일탈한 빈곤층, 즉 사회적 범죄의 가해자와 비정치적이라고 간주되는 범죄자들을 계속 감금함으로써 식민지 체제의 지배 논리를 유지했다. 이 시기를 권력 공백기라고 표현하지만, 일본이 물러간 후에도 한동안 행형제도에 권력의 논리와 덫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미 법무부 조사에 따르면 1945년 6월 한반도의 26개 형무소에는 30,413명의 구금자가 있었고, 38선 이남의 17개 형무소에는 17,243명의 구금자가 있었다고 한다. 8월 말까지 해방 직전 구금자 29,000명 중 약 2,600명이 감옥에 남아있었다.1) 9월 8일 미군 장병들이 한반도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남쪽의 모든 형벌 기관에 구금된 구금자 수가 총 1,400명 미만으로 추정된다고 보고했다.
권력의 공백 속에 남은 것은 식민지 통치와 근대화의 도가니 속에서 형성된 일탈 주체를 처벌하고 감금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였다. 해방 후 식민지배자들이 경찰, 형무소와 같은 제도를 정비하여 정부 권력을 발전시키는 데서 멈춘 부분을 미군정이 이어받았다. 1945년 10월 9일 법무국장 보좌관에 김영희가, 형무과장에 최병석이 임명됨에 따라 2팀의 접수반을 편성하여 형무소 접수를 시작하였으며 전국 형무소를 인수하면서 한국인 직원 중 최상위자를 대리임명자로 현지에서 임명하였다.

1) 치형협회, 형정통계, 형정, 1949년 통권 11호.

경성형무소는 해방 당일 수용인원은 2,039명으로 본소에 1,543명, 의정부농장에 496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경성형무소와 서대문형무소의 일본인 직원들은 행형기록을 파기하고 돈을 벌기 위해 형무소 자료를 팔아넘기다가 적발되었다. 대전형무소에서는 해방 다음 날부터 사상범, 재산범, 형기의 3분의 1이 지난 수용자를 석방하였으며 잔류자 400명이 폭동을 일으키고 도주를 기도하였으며 접수는 10월 28일부터 시작되었다. 대구형무소에는 해방 당일 1,550명이 수용되어 있었으며 다음날부터 석방절차에 들어가 흉악범 240명을 남기고 모두 석방하였다. 일본인 직원들은 가족과 함께 9월 8일 일본으로 귀국하였으며 간부직원은 10월 24일 대구역을 출발하여 일본으로 귀향하였다. 목포형무소에서는 해방 당일에도 아침부터 500명의 수형자를 항만정비작업에 출력시켰다가 일상대로 저녁에 형무소로 돌아왔다. 다음 날 아침부터 치안유지법 등 정치범과 경제사범은 형기의 3분의 1이 지난 수형자는 24시간 이내에 석방하라는 지시에 따라 수용자의 60%를 석방하였다. 가족 등이 형무소 정문으로 몰려 들어 상황이 어려워 짐에 따라 8월 20일까지 전 수용자를 석방하였다. 미군정 담당관이 시설을 접수하러 온 것은 9월 중순경이었으나 접수관이 온 것은 11월 중순 이후였다. 인천소년형무소는 해방 당일 소년수용자 530명이 수용되어 있었으며, 다음날 전원 석방하였다.
11월 13일부터 3일간 접수반이 현지답사를 하였으며 비밀문서 소각과 봉급 선지급 문제로 소장과 간수장 1명이 서대문형무소에 구속되었다. 11월 20일 일본인 전직원이 화물열차로 부산으로 이동하여 귀국하였다. 김천소년형무소에는 해방 당시 500명이 구금되어 있었으며 8월 16일 환자 30명을 남기고 전원 석방하였다. 11월 22일경 접수원이 도착하여 인계를 하고 간부는 11월 25일 김천역에서 승차하여 부산항을 통해 귀국하였다.

해방 후 형무소의 기능을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록 하는 데에는 수개월 이상이 필요하였으며, 그동안 형무소 공간은 국가 형사사법시스템에서 필수적인 기구로 자리 잡지 못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소장과 직원으로 형무소를 재건한다는 사실은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법과 질서를 지킬 수 있는 법적 권한이 국민의 손에 돌아갔다는 것을 의미했다. 식민지 시대의 형무소 관리들을 해임하고 자문 역할을 하는 미국인들을 계속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을 형무소 관리로 임명한 것은 독립된 국가 건설에 중요한 제스처였다.

미육군 Maye J. Thompson 대령이 서대문형무소를 시찰하는 장면(1945년 10월 25일)

다. 미군정의 통치와 행형운영의 한계

1945년 9월 8일, 주한 미군정이 수립되었으며 미군정 하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법적 권한을 부여하는 문제는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미군정 지도자들은 도착 후 몇 주 만에 38도선 이남 지역의 법적 권위자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Emery J. Woodall 소령은 법무국장으로 임명되어 법원의 재편과 법과 질서 문제를 감독하는 역할을 맡았다. 총사령부는 해방 이후 생겨난 평화 유지 단체의 권한을 빼앗고, 1945년 9월 내내 그들과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기도 했다.
1946년 3월 군정법령 제64호로 법무국을 사법부로, 형무과는 형정국으로 변경되었으며 형정국에 보호과, 서무과, 경리계, 형무계, 작업계, 교무계, 보호계를 두었다. 1947년 5월 군정법령 141호로 남조선과도정부라고 부르고 형정국 내 각 계를 형무과, 작업과, 서무과, 교무과, 보호과로 개편하였다. 이 시기에 일선행형기관으로 18개 형무소와 1개 지소 및 형무관학교를 운영하였다.

해방 이후 형무소가 전면적인 폐지에서 구조조정과 과잉수용으로 급격하게 전환한 것은 좌우이념대립, 냉전시대, 무능한 정부 등을 포함한 우리나라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범죄자들을 처벌하고 구금하는 도구는 점차 가동을 재개했지만 식민지 시대의 탄압과 권력 남용의 악취를 제거해야 했다. 미군은 식민지 정권에 협력했던 한국인 직원들을 해고할지, 아니면 유지할지 어려운 선택에 직면했지만, 행형 업무의 한국화는 미군정의 정당성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경찰서, 형무소는 식민지 유산을 가장 극명하게 느낄 수 있는 현장으로, 담당자들이 제복만 바꾸고 관행은 바꾸지 않는다면 전체 업무가 그대로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미군정은 형무소 시스템의 근본적인 변화를 최우선 과제로 삼아 법령을 제정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형무소는 반체제 인사들의 구금을 통해 통제함으로써 급격히 악화되는 상황을 늦출 수 있었기 때문에 주민들을 내부적으로 진정시키는 데 중요한 장소였다. 식민지 시대의 형무소와 경찰서는 주민들을 진정시킬 수 있는 능력을 유지했던 몇 안 되는 구 정권의 잔재였다. 일관되고 합법적인 국가 권력이 부재한 상황에서 미군정은 기존의 식민지 권력관계의 매트릭스를 활용하고 확장할 수 있었지만, 식민지시대에 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형무소를 이용했던 아픈 기억도 떠올리게 했다.

국가 권력의 회복은 범죄의 원인에 관계없이 범죄자의 신체를 처벌하고 감금할 수 있는 권한을 다시 확립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적 일탈자에 대한 구금은 식민지적 기원에서 벗어나야 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점령자의 억압 도구가 아니라 자율적인 통치의 수단으로 확립되어야 했다. 이를 위한 상징적인 조치 중 하나는 사법 및 형벌 기관의 수장에 있던 일본인을 제거하고 한국인으로 교체하는 것이었으며 미군정 당국은 1945년 10월 9일 예일대 졸업생으로 법조계 경험이 없는 김영희 박사를 법무국장으로, 최병석을 형무국장으로 임명했다. 형무소는 1945년 10월 17일에 명목상 한국인 관리자에게 넘겨졌지만 미군 고문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고문과 한국인 직원으로 법무부 지도부가 채워졌음에도 불구하고 법무부는 형무소의 일상적인 운영을 관리할 자격을 갖춘 인력을 찾는 데 여전히 어려움을 겪었다.

행형에서는 식민지 체재에서 일했던 형무관들로부터 단 한 달 동안만 교육을 받은 신입 형무관들은 식민지 체제의 나쁜 습관과 과잉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으며, 식민지 시대에 근무한 경험이 있는 소수의 한국인 직원들을 계속 고용해야 한다는 난제가 숨어 있었다. 미군정은 식민지 행형 인프라와 많은 직원들에게 의존하면서 현재와 미래의 행형을 식민지 시대에 비해 훨씬 더 민주적인 것으로 포장했다.형정국은 1945년 11월부터 전국의 형무소 현황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12월 초에 진행된 조사에서는 17개 주요 형무소 중 절반만 실태를 보고할 수 있었으며, 상당수가 여전히 일본인 인력이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식민지 시대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체제의 행형 기구의 공백을 메우려는 미군정 초기의 노력은 혼란과 물질적 어려움, 관료적 비효율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식민지 형벌제도의 시설과 많은 일반 직원들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미군정 초기 행형개혁은 난민 대량 송환, 인플레이션, 곡물 분배 위기라는 절망적인 사회 현실로 인해 빈곤 범죄가 증가하는 시기와 맞물려 있었다. 이 시기는 기아와 높은 영아 사망률로 점철된 시기였고, 빈곤 범죄는 생존을 위한 흔한 방법이었다. 이러한 물질적 조건으로 인해 절도 및 강도죄로 재판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형무소가 꽉 차기 시작하면서 과도기 형사사법 체계에 추가적인 압력을 가했다. 1945년 12월 서울형무소 전체 재소자 중 절반 이상(1,241명)이 절도 또는 강도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또 다른 23%(291명)는 미군정 명령 위반으로 구금되었으며, 이러한 유죄 판결은 대부분 군수품 절도와 관련이 있었다.

1946년 광복 직후의 혼란한 정세 속에서 미군정의 강제적인 양곡 공출, 미곡정책의 실패 등으로 인해 식량난이 계속되자, 대구와 경상북도 지역을 중심으로 추수봉기가 발생하였다. 이는 노동자 중심의 9월 총파업, 농민 중심의 10월 인민항쟁으로 이어지는데, 1946년 9월부터 12월에 걸쳐 38도선 이남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광주 지역에서는 농민과 노동자 등 일부 군중이 모여 10월과 11월 사이에 소규모 시위를 하였다. 형무소는 1946년 가을 추수 봉기 전, 도중, 후에 반란을 진압하는 데 필요한 중요한 도구였으며, 이후의 탄압으로 형무소는 급격히 넘쳐났고, 국가가 경제 위기에 빠지면서 수용자들은 굶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에 미군정은 모든 형태의 반대를 범죄화하여 저항의 현장을 형무소 담장 안으로 몰아넣었다. 1946년 7월 보고서에는 전국 형무소의 총구금자 수가 12,150명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형무소가 식민지 시대의 구금자 수로 다시 채워지면서 형무관들은 종교, 노동, 위생 관행을 개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치적 분쟁, 한반도로 돌아오는 난민, 빈곤 범죄의 물결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행형에 대한 압박이 가중되었다. 형무소는 경제 위기와 정치적 혼란으로 인한 가난한 시민의 유입은 말할 것도 없고, 평상시에도 구금자 수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했다.

1946년 가을 추수 봉기로 인해 형무소에는 전례 없는 수의 폭동과 탈옥 시도가 발생했다.2) 탄압으로 인해 전반적인 반발을 잠재우는 데는 성공했지만, 구금자들의 저항의 장소가 형무소 내부로, 심지어는 신체 자체로 옮겨가기도 했다. 대구는 지역 경찰에 대한 가장 폭력적이고 직접적인 공격이 발생한 곳으로 공격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대구형무소에는 구금자가 넘쳐났다. 10월 1일 대규모 봉기 이후 53명의 경찰이 사망하고 100명 이상의 재소자가 대구형무소에서 탈옥한 것으로 알려졌다.
2) 형무소 집단탈옥사건에 대해 자세한 것은 교정본부, 대한민국 교정사 Ⅰ, 2010년 5월 31일, 352-358면 참조.

10월 24일 광주형무소에서는 정치범들이 형무관의 도움을 받아 탈옥을 계획하던 중 발각되었다. 광범위한 반란의 분위기로 인해 형무소는 정치적 반체제 인사들의 표적이 되고 인큐베이터가 되었다. 광주형무소에서 또 다른 대규모 탈옥 시도가 있을 때까지 대중에게 전주형무소 탈옥 사건의 진전 상황을 계속 알렸다. 11월 21일 밤, 작업 중이던 한 무리의 구금자들이 형무소 내 공장에 불을 지르고 폭동을 일으켰는데, 이 폭동에는 구금자 200명(총 900명)이 포함되었다. 폭동의 주동자로 추정되는 구금자 51명이 광주에서 대전형무소로 이송되었다. 목포형무소에서도 12명의 죄수들이 세운 계획이 발각되었다.

이미 과밀화된 형무소는 이러한 검거 작전의 정점을 찍었고, 미군정 당국은 과밀 형무소라는 화약고에 좌파 급진주의자들을 보내면서 직면하게 될 역풍을 예측하지 못했다. 1946년 5월 29일 아침, 서울형무소 정치범 중 일부가 단식 투쟁을 시작했다. 이들은 배급으로 지급되는 보리와 영양가가 낮은 곡물 외에 쌀밥을 요구했다. 6월부터 7월까지 전국 형무소 인구는 43%(12,150명에서 17,375명으로) 증가했고, 5월부터 8월까지 청소년 구금자는 두 배로 증가했다. 김천형무소에는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에 831명의 구금자가 꽉 차 있었다. 전국 구금자 수가 1만 7천 명에 달했을 때, 미군정 형무소의 구금자 수는 해방 전의 수치를 넘어섰다. 전국 총 19,407명은 식민지 말기보다 약 2,000명이 더 많은 수치이다. 식민지 시대를 넘어서는 속도로 형무소가 빠르게 채워지기 시작하면서 형무소의 기본적인 인프라는 한계점에 달하였다.

형무소 폭동과 단식 투쟁은 열악한 환경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재소자들이 최후의 수단으로 선택한 것이었다. 한 달이 넘는 단식 투쟁은 구금자들이 애국심을 표현하는 익숙한 구호인 만세를 외치며 소란으로 변했고, 10명의 단식 투쟁자가 계속 음식을 거부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1947년 7월, 미국의 공식적인 통치하에 마지막으로 대규모 시위와 단식 투쟁이 춘천형무소를 강타했다. 422명의 구금자 중 158명이 배식을 거부하고 신문 접근, 더 좋은 배급, 사적(私的) 또는 초법적 처벌 관행의 중단 등 이전 운동과 유사한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1947년 여름이 되자 정부 권한은 명목상 대한민국임시정부(SKIG)로 넘어갔다. 여름철 전국 구금자 수는 5월 20,554명, 6월 19,833명, 7월 19,777명으로 겨울의 최고치 아래로 다시 내려가 감소 추세로 돌아섰다. 8월에는 총 19,263명으로 최저치를 기록했다. 하지만 그러나 서대문형무소는 여전히 수용인원을 초과하여 4,000명을 수용하였다. 이 시기에는 형무소가 구금만을 위해 존재하는 도구로 전락하였으며, 행형제도의 정비는 먼 훗날에나 실현가능한 상황이 지속되었다.

Ⅲ.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정치화된 형무소 (1948년 8월∼1950년 6월)

가. 서

1948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국내에 선포하였으며, 대한민국 제1공화국의 공식적인 수립 이후 미군정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으나, 실제로 미국 정부가 대한민국 정부를 공식적으로 승인한 것은 1949년 1월의 일이었다. 한편 정부의 각 직제가 제정되었으며 법무부 형정국은 18개 형무소와 1개 형무지소 및 형무관학교를 관장하는 중앙행정기구로 발족하였다.
미군정과 제1공화국 초기까지 식민지 감옥법이 그대로 적용되었으며, 해방 후 거의 5년이 지나서야 우리나라 독자의 「행형법」(법률 제105호)을 1950년 3월 2일 공포·시행하였다. 그러나 행형법 시행을 위한 부속 법령이 제정되지 아니하여 식민지시대의 「감옥법시행규칙」이 그대로 적용되었을 뿐만아니라 행형법의 체제과 내용은 감옥법과 크게 다르지 아니하였다. 더구나 6·25 전쟁이 발발하여 행형법 시행은 종전 이후로 미루어지게 되었다.

초기 대한민국 정부는 노골적으로 형무소를 반공 전향을 위한 정치적인 이용을 하면서 형무소의 일반적인 사회적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미군정시대부터 형무관들은 재소자 수, 의료 서비스, 배급에 대한 접근성에서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이 시기에는 이승만 정권이 건국 사면을 통해 구금자 수를 줄이는 데 실패하였다. 하향식이고 자의적인 형무소 구금자 총량 감축은 애초에 많은 국민들이 가난이나 반란 범죄에 의지하게 된 사회적 조건을 완화할 수 없었다. 게다가 반공법과 가혹한 단속은 과밀 수용을 더욱 악화시켰을 뿐이었다.

나. 사면과 형무소 공간의 변질

1948년 제1공화국 수립과 함께 수천 명의 정치범을 석방하고 사면함으로써 식민 통치에서 해방되자마자 정치범을 석방한 것을 기념했다. 수형자 사면은 자선 행위가 아니었으나 이후에도 이승만 정권은 새로 수립된 제1공화국에 대한 지지를 강화하기 위해 사면을 활용했다. 형무소 과밀화를 줄이기 위한 홍보 전략이자 임시방편이었던 이 조치는 언론이 출소자의 재범 문제를 지속적으로 부각하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드러났다.
사면은 당시 총 22,300명의 재소자가 구금되어 있던 대한민국의 19개 형무소를 모두 대상으로 했다. 미결, 벌금과 장기 형기가 남은 구금자를 제외한 3,740명의 구금자 석방을 승인했으며 석방자 중에는 438명의 정치범이 포함되었다. 사면은 새 정권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구축하는 데 상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형무소의 과밀과 물질적 부족을 직접적으로 완화하는 효과도 있었다. 서울형무소 구금자 3,225명 중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1,064명이, 마포형무소에서는 1,813명 중 608명이 출소하였다. 같은 주에 대구에서 200여 명, 대전에서 760여 명, 진주에서 153명, 부산에서 800여 명의 재소자가 석방되어 해당 형무소의 재소자 수가 절반으로 줄었다. 국회 회의록에 따르면 10월 6일까지 총 6,192명의 재소자가 석방되었다.

이 사면은 명목상 미군정으로부터 분리된 새로운 정권이 국가와 사회에 대한 어떤 행위가 사면 가능한 범죄인지 판단할 권리를 행사했다는 점에서도 차별화되었다. 언론 보도에서는 사면의 구체적인 명분(건국)과 동시 감형(일제 통치에서 해방된 기념일)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해방과 정부수립의 두 기념일을 같은 날짜로 한 것은 대한민국이 해방된 대한민국의 유일한 합법적 계승자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적인 전략으로 보인다. 여기에 더해 광복과 사면이 동시에 이뤄진다는 것은 주권국가의 상징성이 담긴 표현이었다.

부산형무소 가석방식

나. 사면과 형무소 공간의 변질

부수립 후 사면은 구금자들은 새로운 국가 건설에 기여할 수 있는 잠재력으로 평가되었으며 상징적인 차원에서 사회 범죄에 대한 처벌은 한국인들에게 구금자들이 갱생을 통해 사회에 복귀할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사면을 다룬 신문기사에는 석방된 구금자들이 형무소 문 앞에서 가족을 만나는 사진이 실렸고, 수많은 구금자들이 자유사회로 돌아간 것을 새로 수립된 공화국의 밝은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포장했다. 그러나 경제적 지원이 없는 많은 출소자들이 출소 후 몇 주, 며칠, 심지어 몇 시간 만에 다시 범죄에 손을 댔다.

한편, 건국 사면 직후 형무소는 고도로 정치화된 반공 전향의 공간이 되었다. 국가와 좌파 세력 간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형무소 담장을 드나드는 데 따르는 위험은 점점 더 커졌다. 그러나 형무소는 단순한 사회 통제 수단이 아니라 냉전시대에 이상적인 반공주의 시민을 생산하는 동시에 국가에 반항적인 타자를 식별, 격리, 개종시키는 도구였다. 6·25전쟁 이전 형무소의 전향 의식은 행형개혁 프로그램에서 벗어난 일탈이나 편차가 아니라 건국 사면으로 시작된 국가 중심의 구금자 갱생 프로그램의 논리적 결과였다. 그리고 건국 초기의 반공주의적 열기는 처벌과 과시적인 전향 쇼가 결합된 형태로 형무소 공간에서 나타났다. 갱생에 대한 개념은 인력의 생산적 활용을 촉진하기 위한 국가주의적 프로젝트에서 숨겨진 내부의 적을 뿌리 뽑고 전향시키는 것으로 변모했다. 형무소에서의 전향은 냉전 경쟁의 현장이 되었고, 선전을 위한 화려한 이미지와 내러티브를 생산했으며, 형벌제도의 역할을 기본적인 사회 통제에서 냉전의 내외부 위협으로부터 국가의 존립을 보장하는 역할로 격상시켰다.
사면은 우리나라 초기 행형역사에서 당국이 구조적이고 물질적인 문제를 이데올로기적 해결책으로 해결하려 했던 많은 사례 중 첫 번째 사례로 기록되었다. 당국은 형무소 과밀화에 대한 해결책을 민족주의적 태도와 사회의 방향에 대한 실질적인 우려를 혼합하여 은폐했다. 재범률은 형무소 시스템의 직업훈련이나 성공적인 갱생 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부각시켰고, 가석방 제도는 1950년대 후반까지 이 문제를 적절히 해결하지 못했다.

다. 좌우대립의 혼란과 국가보안법 제정, 반공공간으로 탈바꿈한 형무소

1948년 10월 좌익 군인들이 계획한 반란은 주로 진행 중인 제주 봉기의 폭력적인 진압에 반대하여 일어났다. 군인들은 정부정서에 반대하여 동조하는 민간인들과 합류했고, 국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반란을 진압하였으며 지방의 좌익 동조자들을 근절하기 위한 캠페인에 착수했다. 반란이 진압된 후 대구지역에서 또 다른 반란이 일어났지만 역시 폭력적으로 진압되었다. 비워진 감옥은 다시 구금자들로 채워졌다. 직접적인 예로 대전형무소는 10월에 700여 명의 구금자를 석방했지만 11월에는 순천 지역에서 체포된 반란군 700여 명으로 다시 채워졌다. 정부는 이 사건을 이용해 좌익으로 추정되는 사람들과 그 동조자, 그리고 전투에 휘말린 다른 민간인들에 대한 전례 없는 단속을 정당화했다.

이승만 정권은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여 시민의 행동이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될 경우 표현의 자유, 정치적 결사, 인신보호권을 침해할 수 있는 국가의 권한을 크게 확대했다. 특히 좌익 용의자를 등록, 감시하고 반공, 친정권 성향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유사 시민단체인 국민계도연맹(NGL)3)을 설립함으로써 감시와 감금 네트워크 구축이 가속화되었다.
과밀한 형무소 공간에 여유를 주었던 대규모 사면은 오래가지 못했다. 여순사건을 진압한 이승만 정권은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여 169개 정치범죄의 범위와 범주를 확대함으로써 이는 곧 좌익 정치범의 증가로 이어졌다. 국가보안법은 정권의 반대파를 ‘국가의 평온을 교란하려는 배신자와 결속 또는 집단화하려는 목적’을 공모한 범죄자로 낙인찍어 공산주의를 사실상 불법으로 만들었다. 1949년에는 좌익으로 추정되는 구금자가 전체 구금자의 80%에 달했다. 형무소는 정권이 반대파를 제거하는 데 유용한 도구였지만, 이러한 정치범죄의 범주적 확장은 형무소의 물질적 어려움을 악화시킬 뿐이었다. 동시에 형무소 담장 양쪽에서 반공주의 열정으로 대중을 동원하는 것은 국가 권력의 공고화를 촉진했다. 3)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은 1948년 12월 시행된 국가보안법에 따라 ‘극좌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사상전향시켜 이들을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취지와 국민의 사상을 국가가 나서서 통제하려는 이승만 정권이 대국민 사상통제를 목적으로 1949년  6월 5일에 조직했던 반공단체로, 흔히 보도연맹이라고 부른다.

수감자 수는 식민지 시대 한반도 전체 구금 인구의 최소 두 배에 달하였다. 대전형무소에서는 매일 1~2명의 재소자가 사망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감방이 평소 수용 인원의 두세 배로 가득 차 있었다. 비슷한 과밀 수용 문제를 겪고 있는 다른 형무소에서도 추가 감방 건설을 서둘러 재개했다. 공간도 문제였지만 배급은 또 다른 문제였다. 같은 시기에 행형 당국은 ‘민주행형’이라는 슬로건 아래 형무소 운영과 갱생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개혁하고 1950년 3월 「행형법」을 제정했지만 많은 프로그램이 전쟁으로 중단되었다. 국회는 행형법을 통과시키면서 1948년 재범사건에 대한 반발로 촉발된 형무소 기능에 대한 논쟁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새로운 행형법은 행형의 목표를 수형자의 교화로 전환하여 출소 후 생산적인 생계를 보장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수형자를 생산적인 사회 구성원으로 개혁하는 것이 다시 강조된 것은 정치범의 사상적 개종을 수행하라는 행형기관에 대한 압력의 증가와 맞물려 반공주의 열정과 전쟁 위협의 증가로 인해 묻혀버렸다.

국가보안법 통과라는 임계점 이후 모든 범죄는 정치범죄로 왜곡되고 모든 구금자는 반역자로 간주될 수 있었다. 국가와 행형 당국은 다시 범죄자의 전향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신생 자치 국가인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이고 당연한 것으로 묘사했다. 따라서 처벌은 새로운 반공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기 위한 재교육으로 구성되었다.

서울지역 좌익사범 처형(1950년 4월)

Ⅳ. ‌6·25전쟁과 형무소 피난, 희생과 야만적인 학살 (1950년 6월∼1953년 7월)

가. 서

6·25전쟁 동안 형무소에 대한 담론의 주된 내용은 첫째, 형무소는 국가와 인민군이 이념을 이유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한 현장이었다는 점, 둘째, 정부는 6·25전쟁과 관련하여 형무소 운영과 수용자 피난에 대해 아무런 대책을 마련하지 아니한 채 각 형무소에 방임함으로 인해 형무소 피난의 실상은 참혹함 그 자체였다는 점, 셋째, 수용자를 보호하면서 호송하고 형무소의 기본적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애쓴 형무관과 희생된 형무관에 대한 이야기 등이다. 그러나 1950년 6월부터 1953년 9월까지 당시 형무소의 상황을 평가할 수 있는 기록 자료는 매우 부족하기 때문에 흩어진 기록과 기억의 편린들을 모아 당시 상황에 대해 기술 할 수밖에 없다.

6·25전쟁 당시 형무소는 한반도가 한국군과 북한군 사이에 수시로 바뀌는 동안 해방 또는 학살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1950년 9월 서울을 탈환한 후 이승만 정권은 북한조선인민군과 협력한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구금하고 신속하게 처형하는 데 형무소를 이용했다. 6·25전쟁 중 좌익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이 대량 학살되었고, 인민군이 국경을 넘어 남하하자 형무소는 전투에 휘말린 정치범과 다른 구금자들을 학살하는 장소가 되었다. 이러한 학살은 정권에 대한 실제 반대 세력을 제거하려는 정치적 전술을 훨씬 뛰어넘는 편집증적이고 보복적인 대응이었다. 이는 수년간의 반공주의적 열정과 재범자들을 사회에 재통합하지 못한 채 범죄 빈민층에 대한 불신이 낳은 논리적 결과였다.

대구, 마산, 부산형무소 3곳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형무소 건물과 시설은 전쟁으로 파괴되거나 손상되었으며, 복구는 1950년 후반까지도 부분적으로 완료되었다. 당시 발간된 『형무요람』에 간략하게 언급된 것 외에는 전후 한국 행형 시스템의 재건이나 1961년 ‘행형’에서 ‘교정’으로의 전환을 자세히 다룬 연구는 없다. 6·25전쟁 중에 형무소의 역할은 모호했지만, 전쟁의 파괴로 인해 행형가들은 시설을 재건하고 냉전 시대 미국 동맹국들의 이른바 자유 세계 건설 프로젝트로서 갱생을 재정의해야 했다. 형무소의 재건과 개혁은 냉전 동맹국의 인프라, 경제, 공중보건 시스템을 재건하려는 미국과 유럽의 노력에서 필수적인 프로젝트였다.

나. 6·25와 형무소 피난, 희생과 학살

6·25전쟁 당시 형무소 피난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아니하고 정리된 문서는 존재하지 아니한다. 다만, 교정본부에서 1986년 『한국교정사』를 편찬하기 위해 6·25전쟁 당시 근무했던 형무관들을 찾아가서 대담형식 또는 구술자료를 정리한 자료가 남아있다. 그 기록들로부터 알 수 있는 사실은 1950년 6월 25일을 시작으로 한 형무소 피난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은 고난과 생사의 시간들이었으며, 거의 알려지지 아니한 1.4후퇴 당시 형무소 피난은 보다 더 비참한 상황 아래 이루어졌다.
춘천형무소에 근무했던 형무관이 남긴 춘천형무소 피난의 기록은 한 편의 드라마와 같으며, 형무형무소 전체가 파괴되고 난 후 재건하는 사진이 남아있다. 당시 춘천형무소에는 1,250명(기결 900명, 미결 350명)이 수용되어 있었으며, 그 중 좌익수가 70% 정도였다. 춘천형무소가 피난길에 오른 것은 6월 26일 오후 3시 40분 경으로 직원 60명과 수용자 1,000여 명을 20개의 이동행군 대열로 편성하고 트럭 1대에 여자수용자 28명, 다른 트럭 한 대에는 식량 20가마니를 싣고 출발하였으며 당일 밤은 강변에서 노숙하였다. 출발한지 3일만에 겨우 70리를 이동하였고 2일 동안 모두가 굶주렸으며, 이때부터 조절석방을 시작하여 10년 이상 좌익수 184명을 데리고 여주를 향해 출발하여 6월 29일 여주초등학교에 도착하였다. 6월 30일 여주역에서 오후 3시반에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 오후 6시경 수원역에 도착하였다.

당시 서울에는 2개의 형무소가 있었으며 조절석방 등을 통한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한 상태로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는 상황에 직면하였다. 법무부 행형당국자들은 일선 형무소에 아무런 지시도 내리지 않고 모두 피난하였다. 서대문형무소는 소장을 중심으로 직원들이 정문을 굳게 닫고 비상경비를 하면서 법무부로부터 지시를 기다리다가 연락이 없어 직원을 광화문 청사로 보내 알아보니 정부가 없어진 상태였으며 직원들과 수용자들이 피난하기도 전에 인민군이 탱크로 정문을 밀고 들어와 당시 현장에 있던 형무관들이 모두 희생되었으며, 인민군들은 서무과에 있던 직원 주소록으로 형무관들을 찾아서 죽였다고 한다. 마포형무소는 소장과 간부들이 직원들에게 형무소를 지키라고 명령해 놓고 자신들은 도망쳤고 남아 있던 직원들은 인민군들이 형무소를 점령하면서 죽음을 당하고 인민군들이 거실문을 열고 수용자들을 풀어주었으며, 당시 형무소 운영에 협력했던 지도원들도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청주형무소는 6·25전쟁 당시 500명 규모에 1,600여 명이 수용되어 있었으며 그중 절반 이상은 포고령 제2호 위반자들이었다. 조절석방 등을 통해 수용인원이 줄어들었으나 보도연맹에 가입하였던 수용자 400명이 입소하는 등을 반복하는 전시상황 속에서 7월 11일 재소자 200여 명을 대전교도소로 호송하고 텅 빈 청주형무소를 잠그고 직원들은 피난길에 올랐다.

6·25전쟁으로 파괴된 춘천형무소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청주형무소

한편, 형무소는 적을 도왔다는 의심을 받는 사람들을 집중 수용하는 공간으로서 6·25전쟁 학살의 주요 장소였다. 전쟁 초기 행형상황은 한반도 남쪽으로 후퇴하는 과정에서 이동 중이던 구금자들을 학살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졌다. 진격하는 적으로부터 수백 명의 포로를 이송할 책임을 회피한 한국군과 경찰에 의해 수천 명의 포로가 처형되었다. 이러한 성급한 결정의 가장 악명 높은 사례는 1950년 7월 대전형무소에서 발생한 정치범 학살 사건이다. 전쟁 초기의 학살은 적의 진격에 따라 서둘러 이루어진 것만이 아니었다. 후방지역 형무소에서도 좌익 범죄 용의자를 집중적으로 처형하는 데 사용되었다.

공주형무소 재소자와 일시 구금된 보도연맹원들이 희생된 장소는 충청남도 공주시 상왕동 산 29-19번지(일명 왕촌 살구쟁이)이다. 이곳은 금강을 따라 공주에서 대전으로 향하는 구 도로가에 위치하고 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2009년 6월 12일부터 7월 20일까지 충남 공주시 상왕동 29-19번지(왕촌 살구쟁이)에서 유해 발굴을 실시한 결과, 모두 3개의 구덩이에서 약 317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이 발굴에서는 민간인을 사살하는 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M1 탄피 527개와 카빈 탄피 107개, M1 탄두 82개, 카빈 탄두 4개 등을 발굴하였다. 발굴 당시 유해 대부분은 구덩이 양쪽 벽을 향해 두 줄로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손이 뒤로 묶여 있거나 일부는 목뒤로 깍지를 낀 상태로 발굴되었다. 이는 희생자들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사살되었음을 보여준다. 희생자는 모두 남성이며 나이는 치아의 발치 정도로 보아 대부분 20대 이상으로 희생규모는 최소 400명에서 최대 700명으로 추정된다.

6·25전쟁 발발 후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공주형무소 재소자들

6·25전쟁이 전후 한국 사회를 지울 수 없을 정도로 변화시킨 것처럼, 형무소 내부와 외부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한국 행형 역사의 흐름을 영원히 바꿔놓았다. 전선은 여러 차례 바뀌었고, 한반도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전투가 이어지다가 국경은 비교적 변하지 않은 채 교착 상태로 끝났다. 이러한 격변으로 인해 화재, 인원 손실, 문서 압수 등으로 전시 형무소에 대한 대부분의 자료가 사라졌다.

행형사적 관점에서 볼 때, 전쟁 초기 사건은 특별한 것을 밝혀내는 데 한계가 있다. 전쟁침략시기 형무소는 최종 처형 대상을 집중적으로 수용하고 격리하는 데 사용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초기 한국 현대행형사를 서술하기 위한 큰 프로젝트는 전쟁의 모든 단계에서 형무소를 중심으로 한 학살이 만연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수용자 학살은 도피 기간에 잠재적 반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급한 수단이었을 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안정된 이후 행형 질서를 재확립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우리나라가 영토를 수복한 후, 인민군에 협력한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협력한 사람들을 대규모로 투옥하고 처형하기 시작했다.

전쟁 초기, 북한군의 서울 침공과 한국군의 부산 후퇴로 인해 형무소는 정치범을 서둘러 학살하는 장소가 되었다. 북한군의 진격에 따라 각 형무소는 릴레이식으로 후방지역 형무소로 수용자를 호송하면서 마지막으로 남은 대구형무소, 마산형무소, 부산형무소로 집결하였으며 전국에서 피난을 온 형무관들과 함께 초과밀화된 형무소에서 전쟁기간 내내 의식주와 보건의료, 작업, 처우 등에 매달려야 했다. 전쟁 후기의 구금자 학살은 예방적 조치라기보다는 보복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이승만 정권은 인민군 점령지에서 서울을 탈환한 후 적을 도운 혐의를 받는 재소자들을 학살했다. 형무소는 인명 손실과 국토 파괴, 그리고 (암묵적으로) 독립된 국가 발전의 진전을 중단시킨 책임이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처벌하는 역할을 맡았다. 당국은 북한 인민군과의 협력 혐의에 대해 신속한 재판을 거쳐 대량 투옥과 처형을 통해 보복을 가했다.

다. 6·25전쟁으로 인한 형무소 피해

전쟁으로 부산과 마산의 최남단 시설을 제외한 거의 모든 형무소 시설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다. 재건은 1960년 후반까지도 부분적으로만 완료되었다.
CAC4)는 1950년 미 제8군과 유엔 공중보건복지단(UNPHWD)의 한국 재건 지원 활동을 통합하여 설립되었다. 이 조직은 1951년 1월 유엔한국재건단(UNCACK)이라는 이름으로 출범하여 1953년 9월 30일까지 ‘민간인의 질병, 기아, 보건을 예방하는’ 임무를 주로 수행했다.

1951년 부산형무소 수용상황

다. 6·25전쟁으로 인한 형무소 피해

1951년의 전체 일일 평균 구금자 수는 1951년 15,874명에서 1952년 27,071명으로 증가했다가 1953년에는 17,277명으로 다시 감소했다.
1951년 11월에 정부가 두 번째로 대전으로 내려가면서 재소자 수가 급격하게 변동했다. 1차 서울 탈환 이후 남쪽과 북쪽의 형무소 사이를 오가던 많은 재소자들이 미군과 국군이 38도선 이남으로 밀려난 후 다시 한 번 구금시스템이 개편되었다. 갑작스러운 수용자의 유입으로 일부 시설의 과밀과 보급품 부족이 악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각 형무소에는 장티프스 등 감염병이 만연하여 수많은 재소자와 형무관이 희생되기도 했다. 마산, 부산, 진주형무소의 총 수용인원은 1,706명이었지만 4,679명의 재소자를 수용하고 있었고 한 달 동안 24명이 사망했다고 보고했다. 부산형무소의 경우 특히 심각해 권장 수용 인원인 706명의 거의 5배인 3,470명의 재소자를 수용하고 있었다.
1953년 전쟁이 중단되었을 때 한국의 행형 인프라 대부분은 여전히 파손된 상태였지만, 재소자 수는 안정화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전쟁으로 인한 형무소의 광범위한 피해를 복구하기 위한 목재와 유리 조달이 계속 어려웠지만, 재소자들의 노동이 재개되자 분위기는 낙관적으로 바뀌었다.
4) CAC는 Civil Assistance Command의 약자로,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미 제8군과 유엔 공중보건복지단(UNPHWD)의 한국 재건 지원 활동을 통합하여 설립된 조직이다. 이 조직은 전쟁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한국의 민간인을 지원하고, 공중보건 및 복지 활동을 수행하며, 한국 사회의 재건을 돕는 역할을 했다. 특히 식량 배급, 의료 지원, 피난민 보호, 공공시설 복구 등을 담당하며 한국전쟁 중과 전후에 걸쳐 인도적 지원을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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