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한마음
메뉴 선정부터 휴가지 결정까지 삶은 크고 작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리고 모든 선택의 단초에는 나도 모르게 쌓아 온 ‘라이프 스타일’이 있다. 라이프 스타일을 하나의 공식이라 한다면 안승철 회원(대한민국재향교정동우회 창원지회, 이하 창원지회)은 그 삶에 ‘매 순간 최선’이라는 공식을 적용해 왔다. 낯설기 그지없어 피하고 싶었던 ‘교정직’이었지만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 미수(米壽)를 바라보는 현재 그를 가장 빛나게 하는 것 역시 ‘교정’에 품은 애정인 듯하다.
안승철 대한민국재향교정동우회 창원지회 회원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사람이 환경을 만든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보다 분명한 것은 환경을 활용하거나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어떤 이들은 그 환경에 굴복하는 반면, 또 다른 누군가는 그 가운데 변화를 추구하며 자신만의 길을 찾아간다. 그리고 이때, “따라갈 사람이 있다”는 자각은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해방 후’와 ‘전쟁 후’, 인생의 초기에 두 번의 혼란기를 연이어 겪은 안승철 회원은 당시 겨우 5살에서 10살 무렵이었다. 가난이 무엇인지 완전히 이해하기에는 어린 나이였지만, 그가 자란 환경은 모두가 똑같이 가난했다. 하지만 인터뷰 내내 ‘백씨’라는 호칭에 유독 힘을 주는 것을 보면 그에게 ‘큰형’의 존재만큼은 달라 보였던 듯하다. 한없이 넉넉한 버팀목이자 롤모델이 아니었을까.
“경남 고성에서 나고 자랐어요. 그때만큼 혼란스러운 시기도 드물었죠. 게다가 엄청 시골이라 자연스럽게 삶의 경계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고요. 그래도 큰형이 교육공무원이던 터라 저도 막연히 ‘공무원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결국 그 생각대로 살아왔고요.”
그러나 행정시스템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였다고 한다. 말하자면 절차와 규정보다는 경험과 관계, 판단과 임기응변이 더 많이 작용하던 시대였다. 계획을 세우더라도 정보를 얻기가 어려웠고, 그렇다 보니 그 문턱에서 방향을 바꾸는 일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던 때이기도 했다. 언뜻 자유롭고 개방적이라는 생각이 스치기도 하지만, 안 회원은 그만큼 지난하고 불안한 초기 단계를 거쳐야만 했다.
“제가 그린 그림은 ‘전매청*’에 있었어요. 처음부터 그랬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는 당연히 그럴 줄만 알았죠. 그게 아니라면 다리를 놓거나 보수하는 건설 분야의 일을 하게 되나 기대했고요. 각종 서류에 ‘교정공무원’이라는 글자가 박혀 있는데도 그랬으니, 그 정도로 이쪽이 낯선 세계였던 겁니다.”
* 옛 중앙행정기관. 1948년 8월 15일 재무부 전매국으로 처음 발족됐으며, 1987년 4월 1일 한국전매공사로 개편·폐지됐다가 이듬해 한국담배인삼공사로 개편됐다.
창원·마산 지역 교정人들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매김한 안 회원은 어쩌면 젊은 시절, 전쟁의 폐허 속에서 도로와 철도가 놓이고 한강대교 같은 다리들이 건설되는 것을 보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한 축을 맡게 되리라 꿈꿨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교정공무원’이라니, 직군을 바꿀 시도도 여러 번 했었음을 안 회원은 털어놨다.
“돌아보니 완벽하게 무지한 상태에서 ‘교정의 세계’에 발을 들여놨더군요. 저도, 제 주변의 그 누구도 교정공무원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고, 알게 된 후에도 탐탁지 않아 했어요. 하지만 언제부턴가 이 길이 필연적인 연(緣)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 믿음이 지금의 저에게는 큰 의미이기도 하고요.”
그도 그럴 것이, 1967년 이래 안 회원의 삶은 오직 ‘교정’으로 점철돼 있었다. 마산교도소에서 근무를 시작한 지 2년 만에 신축·이전이 진행된 덕에 화단 조성 및 나무 식재 등으로 교정의 환경을 개선하는 데 앞장섰으며, 31년간 장기근속과 20년간 개근으로 남다른 직업의식과 모범적인 태도를 보여줬다. 특히 교사로 승진하고부터는 불우한 재소자를 돕는 일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만기 출소자의 취업 알선에 나섰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수형자와 불우한 동료들을 돕고자 노력하기도 했다. 게다가, 이러한 헌신을 인정받아 법무부 교화위원으로 추천되고는 교정의 사회화를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런 걸 보면 천성이 활동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무엇을 하든, 어디를 가든 가만히 있질 못했어요. 지역사회와 밀접하게 연결되며 교정직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다양한 역할을 맡기도 했고요. 테니스클럽 활동도 그 연장선 중 하나였는데, 각계각층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하다 보면 교정이라는 주제를 빼놓을 수 없죠. 그렇게 살다 보니 이제는 교정이 시설 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지역과 함께하는 과정’이라는 걸 실감하게 됩니다.”
안 회원의 교정인으로서의 삶은 그리하여 퇴직 이래 스물일곱 해가 되어 가는 지금도 한창 ‘근무 중’이다.
교정공무원이 된 이래 안 회원의 발걸음은 결코 멈춘 적 없다. 퇴직과 동시에 행정사 자격을 취득, 표면적으로는 업종을 바꾼 게 분명하지만 ‘행정사 안승철사무소’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오가는 이야기의 결론은 늘 ‘교정’이었고, 앞으로도 ‘교정’일 거라는 게 안 회원의 애정 깃든 고백이다.
“퇴직 후 27년간 민원 해결에 헌신하며 각종 행정문서 작성, 행정심판 청구, 인허가 서류 대행은 물론 중국동포 초청 업무까지 폭넓게 다뤘습니다. 창원지회 회장을 역임하며 자연보호 및 불우이웃돕기 활동에 솔선하기도 했죠. 교정직에 대한 오해를 이해로 바꾸는 데 이만한 자리가 없네요.”
안 회원은 이렇듯 교정 전도사를 자처한다. 건강한 몸으로 사회에 이바지하며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그의 웅장한 고백으로 교정 분야의 진정성과 가치가 곳곳에 전해질 것을 기대해 본다.
돌아보니 완벽하게 무지한 상태에서 ‘교정의 세계’에 발을 들여놨더군요.
저도, 제 주변의 그 누구도 교정공무원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고, 알게 된 후에도
탐탁지 않아 했어요. 하지만 언제부턴가 이 길이 필연적인 연(緣)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 믿음이 지금의 저에게는 큰 의미이기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