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하는 길
어느 날 책장을 정리하는데, 책장 한쪽 구석에 숨은 듯 놓여 있는 색바랜 누런 종이 박스가 문득 눈에 들어왔습니다. 박스를 들어내어 위 뚜껑을 조심스레 밀자니, 오래되어 빛바랜 편지 묶음이 눈에 가득 들어와 순간 멈칫하고 말았습니다. 코끝으로 훅 들어오는 해묵은 종이 냄새는 진했지만, 그러나 익은 시간의 그 냄새는 정녕 구수하고 정겨울 따름이었습니다. 냄새에는 기억이 배어 있다고, 그 냄새는 한 시절의 숨결처럼 혹은 잊힌 세월의 속삭임처럼 조용히 마음을 노크해 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아내가 정리해 두었음이 틀림없을 그 박스에는 낡고 푸른 천으로 야물게 묶여진 편지 묶음들뿐 아니라 학창 시절의 통신표(성적표)며 상장 등 속은 물론, 신혼여행을 비롯해 가족 여행 때마다 구입한 기념 엽서들까지 가지런히 쌓여 있는 것이, 온통 시간을 거슬러 가는 그리움의 더미들로만 다독다독 쟁여져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정현종 시인은 노래했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보낼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이
편지이다.’
오래전 주고받은 편지들, 머금은 세월을 반추케 하는 종이와 글들을 펼쳐 놓고 지난 삶의 퍼즐 조각을 매만지고 보듬는 일이란 참으로 아름답고 기꺼웁기 그지 없는 작업이라 할만합니다. 편지는 시간을 닮는다고, 살아오며 마주했던 역경의 흔적과 무수한 의문과 다짐의 독백들까지도 모두 시간이라는 잉크에 희석되고, 이윽고 별뉘같은 추억의 질료로 절취되어 마음의 온기를 돋구어 줍니다. 그리하여 ‘삶이란 스스로의 속도로 자신만의 풍경을 얻어 가는 과정’임을 묵은 편지로 하여 새삼 깨우치기도 합니다.
박스 속의 편지 묶음을 뒤적이자니 자그마한 상장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중학교 재학 중 백일장에서 받은 상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상장에 표기된 작품의 제목 또한 ‘편지’인지라 절로 웃음이 나고, 아득한 시간을 거슬러 마치 어제의 일인 양 당시의 상황이 생생하게 눈에 그려져 왔습니다. 학급의 명예를 드높이라는 담임 선생님의 엄명으로 어쩔 수 없이 참가한 교내 백일장이었습니다. 주어진 과제가 ‘편지’인지라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머뭇거렸지만 당시 한창 불붙고 있었던 월남전이 얼른 뇌리에 떠올라 바쁘게 글을 써 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고아원에서 자란, 친형제 못지않게 우애가 깊었던 의형제가 있었는데, 형이 군에 입대하여 월남전에 파병되었고, 동생은 고교에 재학 중이었던지라 그야말로 애틋하고 절박한 형제간의 사랑과 정을 편지에 담아 나누었으며 그 편지로 하여 두 형제는 하루하루 삶의 활력과 의미를 찾았었는데, 어느 날 형으로부터 보내 온 편지가 다름 아닌 형의 전사 통지서였던지라 그 편지를 들고 울며 쫓아 나간다는, 편지가 담을 수 있는 삶의 애환과 희비의 극단을 표출해 보고자 적어나간 글이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한참 민망할 뿐인 중학생의 글이지만, 그러나 또한 시간의 먼지를 털어내고 보면 어쨌든 글귀를 찾아가려 했던 기특함을 엿볼 수 있어 즐거웁습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편지를 이름하여 아스라이 떠오르는 얼굴들이 또한 하나둘이 아닙니다. 고교 시절 유행했던, 이른바 펜팔(pen pal)에 대한 추억이 그러합니다. 당시의 학생잡지 뒷면 펜팔 페이지에는 편지 왕래를 원하는 남녀 학생들의 이름과 주소가 가득했었습니다. 하지만 여학생에게 편지를 보내어 답장을 받을 확률은 지극히 낮았던 터라 대부분의 학생들은 언감생심 도전조차 해보지도 않고 등을 돌리기 십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옆자리 짝꿍이 애절(?)하게 펜팔 편지를 부탁하여 오는 것을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고개 끄덕이고 말았습니다. 처음 해 보지만 부탁받은 이상은 회신의 유무에 자존심이 걸린 일이라 노심초사 이마를 괴고 한 자 한 자 마음을 다해 글을 적어 나갔습니다. 완곡하면서도 간절한 문구로 시작하여, 편지지 위에 펜을 들게 한 솔직한 속내를 서슴없이 적어 두는 것으로 편지글의 끝을 맺었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편지를 받은 여학생의 답신이 도착하는 사건(?)이 빚어졌고, 흥분한 친구가 비명하듯 그 사실을 학급 내에 퍼뜨리니, 이에 반 학생들이 뒤질세라 여럿이 나서서 편지의 대필을 부탁해 오기에 이르렀습니다. 한 명 두 명, 회신 확률 100%의 성과를 나타내기에 이르자 대필 청탁은 더욱 극성을 부렸습니다. 그렇건 말건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한번 써먹은 편지 내용에 약간의 단어만 달리하여 프린트 인쇄물 배포하듯이 건네주면 그만이었고, 덕분에 수시로 빵 가게로 초대되어 빵을 포식하는 호강을 누리기도 했었지요. 싱겁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지만 지나간 것은 다 그리움이라고, 그 청춘의 한 페이지가 흑백영화의 한 장면처럼 마음의 잠금을 풀고 아련히 떠오릅니다. 그리움이 찌릿찌릿 역류해 오는 것만 같습니다.
어디선가 읽은 듯합니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추억을 먹으며 산다고, 따라서 젊어서 자신의 삶을 용기 있고 치열하게 사는 것은 늙어서 먹고살 양식을 저장하는 일’이라고. 그런 의미에서라면, 편지라는 도구를 통해 발휘된 스스로의 용기와 부지런함만으로도 이미 만만찮은 노후의 양식은 축적해 왔었다고 감히 자부해볼 듯싶습니다. 젊은 날 연애 시절에는 ‘상대가 나를 이끄는 만큼 나도 상대에게 최고의 선물이 되고 싶어’ 마음의 모든 것을 꺼내어주는 고백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말로 하기엔 쑥스러운 마음을 편지라는 그릇에 담을 수 있어 참 좋았습니다. 혹, 감추고 싶은 사소한 욕망에 대해서도 편지의 힘을 빌리니 쉽게 고백할 수 있었고, 그리하여 종국에는 내 마음을 꺼낼 수 있고 상대의 마음을 들을 수 있는 따뜻한 교류의 장을 편지라는 소통의 도구로 하여 만들어 갈 수 있었습니다.
결혼 후에는, 아이들의 사춘기 민감한 성장 시기에도 늘상 혼자 떨어져 지내야 하는, 직업적 리스크에 따른 우려를 떨쳐버리고자 또 참 많은 엽서와 편지를 아이들에게 보냈었습니다. 행여 아이들이 빗나가기라도 할까 봐 감정의 공유와 생각의 일치를 견인해 나가는 땀흘림이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떨어져 지낸 시간만큼 행여 마음의 벽이라도 쌓여지고 있을까봐 그 마음의 돌들을 하나씩 부지런히 치워내는 작업이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만 나의 편지가 서로의 마음을 이어주는 다리로, 또한 마음의 거울을 닦아 주는 격려로 역할 할 수 있기를 고대할 뿐이었던 것입니다.
긴 세월을 두고 보면 어떤 것도 쉽게 좋다 나쁘다 얘기할 수 없지만 그때는 왜 그렇게 삶의 모든 것이 절박하고 소중하게 마음을 휘감아 와 나로하여금 끊임없이 펜을 들게 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무탈하게 자라 이미 불혹을 훌쩍 넘었고, 제 삶의 자리를 굳건히 뿌리 내려 건사해 갈 줄 아는 두 자식을 보노라면 그때의 절박함들을 결코 나무라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랜 세월 교도관이었음을 표징하듯, 편지 중에는 출소자들이 보내온 것들도 여러 통 있었습니다. 비록 갇히고 지키는 날 선 경계를 두고 살았지만 오랜 시간 몸을 부대끼면 정들고 마는지라, 출소할 때면 힘 주어 악수를 나누곤 했었지요. 살다가 정 힘들면 미리 연락이라도 한번 하라며 등 두드려 배웅해 주곤 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재소자들이 있는 곳이라면 언제나 군기반장을 자임하며 나섰던 터라 출소자의 편지를 처음 받았을 때는 나름 긴장하며 봉투를 뜯어야 했었지요. 하지만 염려와는 달리 하나같이 잘살고 있다는 내용이었고, 특히 수용생활 중의 가르침에 감사한다는 말이 빠지지 않아 감개무량할 따름이었습니다. 재소 중에는 잔소리와 호통이 섭섭하기만 했는데, 출소하여 돌아 보니 적당히 넘어가지 않는 원칙적인 수용처우야말로 행형의 알파요 오메가임을 정녕 깨우칠 수 있었다고들 했습니다. 출소와 동시에 이미 세금을 내는 시민의 입장에서 객관의 눈으로 교정을 정의할 줄 알고 있었으니, 고맙고 놀라웁기 그지없어 한참을 허허거리며 혼자 웃었더랍니다.
시간과 기억에 대한 독특한 사유가 곳곳에 묻어 있는, 흐트러진 편지들을 다시 모아 묶고 물건들을 정리한 후 박스 뚜껑을 닫으려는데, 문득 떠오르는 낯익은 시구 하나가 먹먹하고 묵직하게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내가 너에게
정말 하고 싶었던 말들은
언제나
봉투를 닫고 나서야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