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하는 길
영화를 일러 ‘당대의 이데올로기가 함축되어 있는 문화 텍스트’이자, 또한 그 시대 사회의 가치관과 정체성을 검증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라는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유독 한국 영화의 카메라 앵글에 그려지는 교도소와 교도관상을 마주하노라면 금세 눈살이 찌푸려지고 고개를 가로젓게 됨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어쩜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싶은 이해의 작은 여백도 허용하기 어려우리만큼 한국 영화 속의 교도관은 하나같이 코미디언처럼 엉뚱하고 무기력하거나, 아니면 선악 구도를 겉옷만 바꾼 채 악의 상징성으로 노출되기 일쑤인지라, 관객으로서의 교도관들을 늘상 우울하게 만들어 버리지요. 영화란 관객의 사고를 자극하는 강력한 도구로서 개인의 가치관과 사회적 시각을 눈뜨게 하고 또 변화시키는 촉매로 작용하는 것일진대, 어쩌다 가뭄에 콩 나듯 한 영화 한두 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경우 꾸겨진 교도관상만 나열하고 비추는 작금의 카메라 앵글의 양태는 실로 짜증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사회 일반에 던져지고 끼칠 메시지를 생각하면 정녕 아쉬운 마음일 따름입니다.
대저 영화를 찾는 관객들은 황당무계하거나 기상천외한 사건이 아니라 양질의 시간을 찾아 영화관에 간다고 합니다. 또한 러시아의 유명한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왈, 인간은 보통 잃어버린 시간, 놓쳐 버린 시간, 또는 아직 성취하지 못한 시간 때문에 영화관에 간다고 했습니다. 영화가 어설픈 이야기나 도식화된 담론에 천착하지 아니하고 인간의 내면과 감정, 그리고 미학적 리얼리티를 깊이 있게 그리되 무엇보다 정신문화의 올바른 좌표를 쫓아가고, 또한 삶을 꿈꿀 수 있는 영화적 토양을 내포하고 있어야 할 이유와 의무를 암시해 주는 어록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영화가 매스커뮤니케이션의 유력한 수단이요 가장 대중적인 오락의 주체적 지위를 향유함에 따라, 영화의 작품성과 상업성이 결코 양립 불가능한 개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무래도 상업적 이윤 추구에 경도될 수밖에 없는 게 오늘날 영화 산업의 추세임을 부인할 수는 없겠습니다. 다만 바람이 있다면, 영화 예술적 가치는 차치하고서라도 오로지 이윤 추구에만 매몰된 부류들이 함부로 그네들의 삼류 영상물에 교도소를, 교도관을 그리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광복절 특사’류의 덕지덕지 꼬질꼬질 발라 놓은 스토리라인과 캐릭터의 영화로 하여금 교도관을 희화화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째서 교도소를 등장시키는 대부분의 한국 영화는 내부자만 알 수 있는 용어 하나도 캐치하지 못하고 주변부를 겉돌기만 하는 것인지, 행여 출소자들의 편견이 여과 없이 전달되었다손 치더라도 카메라의 앞과 뒤 모습이 어찌나 그리 판이하고 억지로 꿰맞춘 듯한 풍경으로만 가득한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얼마나 답답하였으면 본부장으로 재임할 때 아직 문도 열지 아니한 교정시설 하나를 통째 영화촬영지로 개방해 준 적도 있었습니다. 모 영화사에서 교도관이 주인공인 ‘집행자’라는 영화를 만든다며 시설물 이용을 부탁해 왔기에, 시나리오를 검토한 후 별 문제가 없어 개청 준비 중이던 화성직업훈련교도소 이용을 허가해 주었습니다. 그간에 영화에 그려져 관객들에게 각인된 교정시설이 얼마나 엉터리 같은 것이었던가를, 차제에 대한민국의 교정시설이 과연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보여주고 깨우쳐 주자는 취지에서 허가하였던 것입니다.
외화의 경우 ‘쇼생크 탈출’처럼 공허한 이분법을 기치로 극단의 카타르시스를 추구하는 영화도 있지만, 대부분의 영화에 있어 교도관은 선과 악의 치우침이 없이 담담하게 그려집니다. 하기야 쇼생크 탈출 또한 서로 다른 가치들이 첨예하게 충돌하는 감옥의 문화와 그 감옥이 재소자들의 상처를 어떻게 갈구고 덧나게 하는지 샅샅이 파헤치고 있으나, 거기에서의 교도관상이란 1946년의 미국, 그 시대 사회상의 평범성에 기준하였을 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지극히 객관화된 구도 속의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외화의 경우 그 어느 것이라도 최소한 서사적 힘, 즉 영상의 리얼리티 포맷이 장착되어 유치찬란한 꼴불견이나 헛웃음을 불러오는 경우는 거의 찾을 수 없는 강점을 지니고 관객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하드 보일드 액션 느와르인 ‘퍼블릭 에너미’는 죄수와 교도관을 그림에 있어 옳고 그름에 전혀 포박되지 않고 카메라를 비춥니다. 흩뿌리는 눈을 맞으며 이열 종대로 절도 있게 출역장으로 향하는 재소자들의 발걸음과 장총을 맨 감독 교도관의 발걸음 모두가 구호에 맞춘 듯이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습니다. ‘화면은 온통 푸른색 톤으로 표현되어 냉기를 뿜어낼’ 따름입니다. 이윽고 작업장에서 모의 총기로 교도관을 위협하고 정문을 벗어나 탈출하는 재소자들, 그들을 향해 총을 쏘는 교도관, 쓰러지는 자, 도주하는 차량 모두가 허무하리만치 냉소적이고 담담하게 그려집니다. 이 영화의 컬러 화면은 온통 흑백보다 더 창백할 뿐입니다. 어쩜 ‘선과 악은 멀리 떨어진 대척점에 위치한 게 아니라 서로 뺨을 맞댄 채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느낌 마저 가지게 합니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은 마음으로 화면을 지켜볼 수 있게 만듭니다.
또한 사형수와 감독교도관의 믿음과 선의를 그린 톰 행크스 주연의 ‘그린 마일’은 갇히고 지키는 자의 경계를 부수고 그들 서로가 빚어내는 처연하고 안쓰러운 정서가 관객들의 마음을, 영혼의 빈터를 촉촉하게 적셔주는, 교정 영화의 수작(秀作)이라 할만합니다. 사형장으로 향하는 복도, 초록빛 리놀륨이 깔려 그린마일이라 불리던 그 복도를 따라 걷는 생의 마지막 점멸의 시간에 이르도록, 교도관과 재소자의 서로 배려하고 보살피는 눈빛과 손길이 마냥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줍니다. 촘촘히 박힌 감옥의 호흡을 응시하는 시선이 그야말로 날카롭고 진지하기 짝이 없습니다.
각설하고, 교도소를 찾는 한국 영화의 영상도 어설픈 심판자가 아니라 동료와 공범의 앵글로 가까이 다가선다면, 지키고 보여줄 리얼리티적 풍경 하나쯤은 쉽게 건져낼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리하자면 우선 영화의 시놉시스 구성 단계에서부터 극적 효과만을 위한, 과장되거나 편향된 시선과 자세를 탈피해야만 할 것입니다. 모든 재소자는 폭력적이라는 선입감도 버려야 합니다. 재소자들의 대부분은 폭력범이 아니라 재산범 등 비폭력적 범행으로 수용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회색빛 군상들에 대한 불필요한 미화와 조명 또한 금물입니다. 교정시설에는 선량한 재소자가 있을지언정 선량한 시민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도관은 모두가 폭력·권위적이거나, 냉혈·무관심하거나, 부패·타락해 있다는 상투적인 설정도 틀렸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교도관, 즉 법집행과 재소자에 대한 인간적인 배려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 가야 하는, 힘든 직업적 고뇌를 이겨 나가는 실상을 조명할 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흔히들 교도관과 재소자의 적대적인 관계 및 갈등 구조를 영화적 매력인 양 과도하게 치중하여 앵글을 맞추고는, 관객의 호기심을 유도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애정과 증오는 보통 함께 다닌다고 합니다. ‘삶의 터전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적대가 형성되는 게 보통이지만 그들 사이에 사랑이 발생하는 것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것입니다. 교도관과 재소자의 사이도 그러할 것입니다. 카메라의 앵글이 될수록 적대보다는 사랑과 애정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그 안에 감춰져 있는 풍경들을 그려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감옥이 단순히 삶의 영역을 제한하는 장벽이 아니라 삶을 재도약시킬 기회이자 도전의 자양분으로 그려지고, 그 스토리의 궤적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인간승리의 포효가 관객들의 가슴에 고스란히 느껴질 수 있는 그런 영화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쩜 그런 시각과 관점 전환이야말로 교도소를 묘사하는 영화적 상상력의 탄생에 깊은 자궁으로 역할하여, 한국 영화의 지평을 넓혀주기도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