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하는 길
행형시설이 사회 일반의 환경에 비해 전혀 독특한 장소일 것임에도 불구하고 교도관들은 그 환경에 그다지 개의치 않고 묵묵히 본연의 임무를 수행해 나갑니다. 그야말로 긴 세월 함께하여 몸에 배고 익숙해진 제 몫의 루틴 탓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렇듯 반복되어 관행이 되고 전통이 되어버린 것들로 사고와 생각과 시계와 관점의 맥락들이 고착되고 만다면, 자칫 우리의 직무 행태란 것은 높은 담만큼이나 갈라치기 된, 아주 배타적인 모양새로 자리하기 십상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장소와 사물들에 깃든, 사소하나 중요한 섭리들을 행여 놓치고 마는 우를 범하기도 쉽겠지요. 익숙해진 방식일수록 가끔씩 재고와 혁신의 시선으로 되짚어 보는 균형을 가슴에 품어야 하는 이유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하여 너무 가까이 있어 선뜻 실체를 파악하기 쉽지 않았던, 우리가 고쳐가야 하고 또 고쳐온 행형의 주요한 질문과 대답들을 돌아 보고자 합니다.
1977년 간부후보생 교육을 받을 때였습니다. 배부된 계호근무준칙을 읽다가 재소자를 수용자(收容者)로 잘못 호칭하고 있음을 발견, 깜짝 놀라 동기생들에게 그 표기의 잘못을 언급하고는 논쟁을 벌인 일이 있었습니다. 수용(收容)이란 어휘는 특정한 부류의 사람이나 물품을 일정한 장소에 모아 두는 것을 의미함이 사전적 정의이니 수용자란 곧 수용하는 사람, 즉 교도관을 의미한다고 할 것인데, 엉뚱하게 재소자의 호칭으로 잘못 사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재소자라면 응당 피수용자(被收容者)라 불러야지, 이를 수용자로 호칭한다면 마치 피고인(피고소인)을 고소인이라 부르는 잘못과 진배없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본시 피(被)란 한자는 서술성 명사 앞에 붙어 ‘그 일을 당함’의 뜻을 더하는 말이니 재소자는 피수용자로 불리어져야 옳은 것입니다. 당시의 행형법 등 행형관계 법령 어디에도 사용되지 아니하던 수용자란 호칭이 어떤 경위로 유독 계호근무준칙에서 오용되기에 이른 것인지 다만 아쉬울 따름이었습니다.
나의 문제 제기에 처음에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옥편을 찾아보는 등 쉽게 동의하지 않던 내무반의 동기생들도 생각의 일치에 이르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도 않았고, 마침내 긍정의 손바닥을 내려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는 “교정 경험이 한 수 위인 우리가 미처 못 본 것을 찾아내는 것을 보니, 순수공채인 자네가 교정간부가 될 수 있었던 연유를 이제야 알겠다”하고 말하여 모두들 한바탕 껄껄거리며 웃어대기도 했지요.
그런데 90년대 중반에 이르러, 갑자기 행형 용어를 순화한다는 구실로 행형법에 이르기까지 재소자 대신 수용자란 어휘가 잘못 표기되기에 이르는 사고가 빚어지고 말았습니다. 강력하게 반대 의견을 표명하였으나, 수용자란 말이 이미 재소자를 지칭하는 것으로 고유명사화되었다는 해괴한 논거를 핑계로 항변은 묵살되고 말았지요. 2005년 대구지방교정청장 재임 시 한일 교정직원무도대회 단장으로 일본에 가서 동경구치소를 참관할 때였습니다. 구치소 측이 수용현황을 설명하며 수용인원을 ‘피수용자’ 00명이라고 또렷이 호칭하였을 뿐 아니라 또한 그렇게 한자로 표기된 현황판의 자구까지 짚어오니, 같은 한자어 문화권을 공유하면서도 대비되는 우리 행형의 미몽과 무지에 괜스레 내가 대신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답니다.
본부장이 되었을 때 이 수용자란 용어의 오용을 고쳐보고자 노력했으나, 이미 각종 행형관련 법령과 규칙은 물론 일부 행형학 교과서에까지 남용되고 있어 엄두를 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또한 과부하된 업무의 처리 및 짧은 재임기간 등의 여건으로는 도저히 역부족이라,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모래를 바라보듯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 숙제를 남겨둘 수밖에 없었던 점 부끄럽기 짝이 없으나, 언젠가는 바로 잡아야 할 과제임을 상기하고는 있어야 할 것입니다.
1991년 M교도소 작업과장으로 근무할 때였습니다. 양재 공장을 순시하다가 근무 중인 직원이 기동모를 쓰고 있다가 얼른 벗고는 정모를 집어 착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기동모의 크기가 맞지 않아 수선케 하고 있는 듯 보여졌습니다. 근무복에 기동모를 쓴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보였으나, 그러나 찰나에 머리를 스쳐 지나는 생각 하나가 마음을 달구어 왔습니다. 기동모를 근무복 하의의 색상과 동일하게 제작하여 하절기 머리를 압박하고 땀에 젖게 하는 무거운 정모 대신 착용토록 한다면, 직무의 효율성 촉진은 물론 직원들의 사기 진작에도 크게 도움이 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상층부의 습관적인 외곬 이념이나 편견의 굴레를 불식시키기가 쉬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생각난 김에 빠르게 본부에 건의했었습니다. ‘근무모’라고 이름까지 붙였지요. 예상과 달리 본부에서는 빠르게 건의가 수렴되었고, 그리하여 직원들은 근무 시 머리를 짓누르던 정모의 무거움으로부터 비로소 벗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교도관들이 정모를 벗고 날렵한 외관의 근무모를 쓰자, 경찰관 등 다른 모든 제복공무원들이 재빨리 교도관을 흉내 내어 모두들 무거운 정모를 벗어 던지기에 이르렀던 것이지요. 복제에 있어 늘상 경찰관의 것을 뒤따르는 경향이 없지 않았는데 근무모에 있어서는 오히려 우리가 선도하였으니, 자긍심의 카운터펀치 하나를 날린 듯 차오르는 고양감으로 마음이 흡족하기만 했습니다.
2004년 S구치소장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당시의 정부 방침이 이른바 열린 교정을 표방하며 행형에 내재한, 시대에 뒤떨어진 각종 법령과 제도상의 구습 탈피는 물론 근무 행태의 새로운 각성과 전향적인 인식을 촉구해 오고 있던 터라, 직원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아이디어를 모았습니다. 오랜 세월 익숙해져 온 까닭에 무의식적으로 우리 마음에 자리매김하여, 재소자들의 입장과 정의를 간단히 비웃고 방치해 두는 행각이 잔존하고 있지는 아니한지 찬찬히들 곱씹으며 돌아보았습니다. 그러자 이구동성으로 제시하는 것이 직원들의 구두였습니다. 재소자들의 땀 흘림을 빌린,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반짝이는 구두였습니다. 7·80 년대에는, 오전에 포마드 기름에 깨끗하게 드라이한 머리를 하고 먼지 하나 없이 반짝이는 구두를 신고 가는 자라면, 열에 아홉은 교도관임에 틀림없을 것이라고 농담을 나누기도 했었지요.
그러나 직원들의 이발이야 어차피 재소자들에게 이발기능훈련을 시행하는 터이니 실습의 기회를 배려함이라고 변명할 수 있겠으되, 구두닦이를 두고서는 근로정신 함양이라는 억지스런 핑계는 물론 그 어떤 사유로도 용인될 수 없는 사안이라는데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리하여 직원들이 직접 구두를 닦기로 결의하였고, 익숙해질 때까지 교정 위원의 지원을 받아 500만 원 상당의 구두닦이 기계를 구입, 1회 100원으로 사용 가능하게 조작하여 비치하였습니다. 이후 타 교정시설들이 연이어 이를 따르기에 이르렀고, 종국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재소자의 구두닦이는 자취를 감출 수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본부장으로 재직 시에, 일선의 애로사항들을 직접 전달받아 재소자들의 수용기강 확립을 위한 CRPT 창립, 인권신장을 위한 항문 검사기계 비치, 재소자들의 상대적 박탈감 불식을 위한 고가 운동화 차입금지 등을 비롯 많은 개혁적 조치들이 강구·시행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도 미처 모른 채 다만 과거의 시간을 배회하고 있지는 않은지 틈틈이 돌아볼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혁신은 늘 익숙하게 사용하던 것들에서 낯설고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는 역량입니다. 우리의 사유 과정과 경험적 발견들을 통해 모호함이 없이 새롭고 명료한 하나의 답을 찾아냈을 때의 짜릿함이야말로 그 무엇에도 견줄 수 없이 빛나는 깨달음이자 깨우침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