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하는 길
지난 2023년 6월 26일, 6.25 동란 시 교정시설을 방호하다가 순국한 교도관(167명)들의 희생과 헌신을 기리고자 서울남부교도소 진입로 인근에 충혼탑을 세우고, 그 제막식을 성대히
거행한 바 있었습니다. 해마다 6월이 오면 고개 떨구고 곱씹었던 공분과 마음의 허기로부터 비로소 벗어날 수 있었던, 참으로 뜻깊은 날이었다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시 대한민국
재향교정동우회장의 자격으로 헌화하면서, 가치 있는 것은 언젠가는 발견된다는, 그리고 또한 시대가 위인을 재발견하기도 한다는 섭리의 무거움을 새삼 고개 끄덕일 따름이었지요.
해를 뛰어넘어 다시 6월을 맞이하고 보니, 교정 충혼탑의 존재로 하여 가슴에 담아내는 6.25란 역사의 울림이 이렇듯 배가되어 다가들고, 또한 더욱 각별하게 마음의 손을 모으게 하는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또한 생각과 마음이 그리하노라면, 교정 충혼탑이 있기 전 6월이면 언제나 우리를 한자리에 불러 모았던 불멸의 표지석_개성형무소장 우학종의 흉상이 또한 뇌리를 스쳐 지나고 맙니다.
청계산 자락 서울구치소 한 모퉁이에 비록 작은 흉상으로 앉아 있었지만, 그러나 늘상 큰 바위 얼굴처럼 우리 마음에 자리하였고, 언제라도 팔 벌려 우리를 부르고 또 품어 안곤 했었지요.
‘시대가 시간이 아니라 매 순간 역사로 다가왔던 때’의 엄숙함과 절절함을 그 품에서 깨우치며 입술 깨물곤 했었답니다.
우학종, 어쩌면 역사의 멱살을 잡고자 했던 사나이! 그 이름을 되뇌이노라면 비단 6월이 아니어도 언제나 가슴이 먹먹해지고 맙니다. 한 사람 인생의 시련과 도전, 회한과 다짐이 그토록
장엄할 수 있는 것이라면, 교도관으로서 자기희생을 감수한 사나이의 삶이 또 그리 의연하고 범상치 아니한 것이라면, 그 발자취를 조명하여 후대에 이르기까지 우국충정의 표상으로 기리고
추앙함이 지극히 마땅한 도리요 의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여 오래전 필자가 교정과 서기관으로 근무했던 98년도의 교정지에 우학종 소장을 이미 한 번 거론한 바 있었으되 작금에 새로
입직한 후배님들이 다수 재직하고 있음을 감안, 역사로 남은 그의 발자취를 다시 한번 쫓아가 볼까 합니다.
우학종이 소장으로 재직하던 개성소년형무소는 38선에서 직선거리로 불과 1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개성시 선죽동 208번지 송악산 맞은편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6월 25일 새벽 요란한
총성에 심상치 아니한 사태의 추이를 예견한 소장은 즉시 전 직원의 비상소집을 명하였으나, 그러나 직원들이 미처 응소할 겨를도 없이 형무소는 이미 북괴군에 의해 포위된 형국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퇴로가 끊어지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소개 지시를 받지 못하였으니, 소장은 형무소 사수를 결심하고 당시 근무 중이던 80명의 직원과 함께 방어전투를 준비하였습니다. 감시대와
주벽을 방책으로 삼고 각 요소마다 직원들을 배치하는 등 만반의 항전 태세를 갖추었던 것입니다. 적의 공격을 지연시키노라면 인근의 국군 12연대가 출동·지원할 것이라고 믿었고, 배치 현장을
순시하며 직원들에게도 그 사실을 고지함으로써 사기와 전투의지를 북돋우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시점에는 개성 시내가 벌써 적의 수중에 떨어진 뒤였고, 적의 선봉은 이미 포천과 동두천까지 진출하고 있었음을 이들만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쨌거나 전격전으로 인한 연전연승의 승리감에 도취되어 형무소 하나쯤은 손바닥 뒤집듯 쉽게 점령할 수 있으리라 예상했던 침입자들은 뜻밖에도 형무소의 강력한 저항을 마주하게 되자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잠시 공격을 멈추고는 포로로 잡은, 비상소집 응소 중이었던 직원들 및 직원 가족들을 인질로 삼아 형무소의 투항을 종용해 왔습니다. 하지만 소장 이하
전직원들은, 아프지만 비장한 결단과 다짐을 서로 나누며 항전과 사수의 의지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투항의 설득작전이 먹히지 않자 마침내 북괴군은 총공격을 감행, 형무소측의 격렬한
응전에도 불구하고 공격제파를 연이어 투입하며 파상공격을 감행해 왔습니다. 소장과 80명의 전사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총구의 노리쇠를 당기며 사투를 벌였으나 병력과 장비의 열세는 물론,
주벽 너머로 수류탄을 던지는 등 집요하게 달라붙는 적의 공격으로 부상자는 급격히 늘어나니, 급기야 30여 명의 소년수형자들까지 자원하여 부상자 치료 및 탄약 운반을 돕는 등 실로 감당하기
힘든 전투를 힘겹게 버티어 내고 있었습니다.
장장 10시간에 걸친 항전으로 화력이 바닥나고 사상자가 급증하는 실정임에도 불구하고 인근 군병력의 지원이 전무함은 물론 모든 통신조차 두절되기에 이르니, 방어전투에 임하던 직원들의 사기는 빠르게 가라앉았고, 소내에는 일시에 패배의 두려움과 함께 무력감이 감돌고 말았습니다. 그러하자 우학종 소장은 잠시 생각하고 빠르게 결단을 내렸습니다. 죽음이란 게 어차피 삶과 맞닿아 있는 것이거늘, ‘마치 숫돌에 몸을 가는 것 같은’ 그 아픈 소모의 시간을 더는 지속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죽음 가득한 행간에 꼭꼭 숨겨 두었던 생의 의지 마저 과감하게 구겨 던져 버리고는 스스로의 전쟁을 마감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이윽고 그는 모든 직원을 불러 퇴각을 지시한 뒤 말했습니다. “나라를 위해 우리는 열심히 싸웠다. 훗날을 승리를 기약하며 이곳을 포기하자. 후퇴의 책임추궁이 있으면 소장의 명령에 따랐다고 전해라.” 그때 우학종의 비감했던 심중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마는, 그는 부하들의 퇴각을 명령한 뒤 바로 스스로의 몸에 총을 겨누어 자결함으로써 장렬히 산화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훌훌 털고 떠날 줄 알았던 그 용기로 그는 전사가 되고 또 역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6.25란 전장의 공간이 그리 넓고 깊었음에도 우학종과 80 전사의 용맹이 워낙 도드라져 쉽게 가려둘 수 없었던 탓인지 아직 전쟁의 와중이었건만, 1951년 6.25사변 1주년을 맞아 우학종 소장을 비롯한 개성소년형무소 형무관들의 명예로운 희생을 기리고 넋을 추모하기 위한 추도식이 임시수도인 부산에서 거행된 바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교정사에 기록되어 있는, 당시 법무부장관의 추도사 원문을 아래에 축약 기술합니다. ‘떠난 이는 말이 없지만 남겨진 이들에겐 할 말도 함께 남는다’는 말의 의미를 마음에 새기어보며.
“…고 우학종 소장은 고립무원, 오직 민족적 의식과 형무정신을 발휘하여 형무소의 일각에라도 괴뢰군의 침입을 불허하고 고립분투 10여 시간, 그러나 부득이한 대세에 중과부족을 어찌하랴. 고 우학종 소장은 이미 각오한 바 있어 형무소 구내를 일순하고 왕성한 책임감과 형무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소지한 칼빈총으로 장렬한 자결을 하였다.
아! 장하고 귀중하도다. 애석함이 또한 크다. 그 절개와 최후의 일각까지 괴뢰의 침범을 불허하는 감투정신과 생명을 초개와 같이 던져 대한민국에 진충을 다한 것은 전 형무관의 귀감이 될 뿐 아니라 영구불멸 길이길이 빛날 것이며…3천만의 염원인 멸공 남북통일의 결의 자못 새로운 바 있습니다.
영령이시여 고이고이 명복하소서.
단기 4284년 6월 25일
법무부장관 조진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