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하는 길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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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아’
4월이 오면, 고교 시절 낭랑한 목소리로 ‘4월의 노래’를 읽어 주던 국어선생님이 문득문득 생각나곤 합니다. 실업계 고등학교인지라 상대적으로 건조해져 있기 쉬운 학생들의 감성을 일깨워 주고자 하는 듯했던 선생님의 따뜻한 배려는, 마음을 깊게 파고드는 사랑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시 하나에 담기고, 시로 하여 우리가 건질 수 있는 사랑과 기쁨이 얼마나 많은지를 누누이 역설하던 선생님의 열정 탓에, 학생들의 반응 또한 덩달아 뜨겁기만 했습니다. 이미 등단한 시인이기도 했던 선생님의 이름은 ‘설성희’라고 시처럼 예뻤으나, 그러나 남자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듯 해 키득거리기도 했었지요. 아니나 다를까요. 선생님 왈, 자신의 시가 신문에 게재되기라도 하면 정작 시보다는 이름의 자구에 현혹된 뭇 사내들의 구애 편지가 만만찮게 답지하여 곤혹스러웠노라고 토로하니, 교실 안이 한바탕 웃음으로 들썩이곤 했었답니다.
또한 선생님은 말해 주었습니다. 행복은 멀리에 있지 않다고, 시를 읽는 마음이면 이미 행복해진 것이라고. 몸의 세포가 시가 주는 기쁨에 감응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이미 시인이 된 것이라고 말해 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는 청록집을 추천하며 모두가 일독할 것을 권장하기도 했습니다. 청록집은 박목월·조지훈·박두진 등 이른바 청록파라 불린 3인의 시 39편이 수록된 시집이었습니다. 나는 이미 그 시집을 구입하여 여러 번 읽었던 터라 모종의 자부심에 하마터면 ‘읽어봤습니다’ 하고 손을 들 뻔도 했습니다. 자랑에 그냥 입이 근질거리는 것을 참아야만 했지요.
시에 대한 남다른 사유와 관심에는 그 연유가 있겠으니, 그 하나는 아주 어린 날 경험한 뜻밖의 칭찬에서 기인된 듯싶고, 다른 하나는 정호승이라는 오늘날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의 오랜 과거와 시간을 함께하는 행운을 가졌었던 탓이라 할 수 있을 것이겠습니다.
‘벌이 꽃에 앉으니
내 마음이 찝찝합니다’
국민학교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한글에 입문할 수 있었던 시절의 1학년 2학기 때 적어 본 글입니다. 국어 시간을 맞아 갑자기 동시를 적어 보라는 선생님의 지시에 모두들 당황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나는 창문 옆에 자리했던 터라 창밖의 화단이 쉽게 눈에 들어왔고, 눈에 담은 그 화단의 풍경을 직설적으로 적어 본 것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글로 인해 마치 융단폭격처럼 다가든 선생님들의 칭찬은 정녕 민망하고 당혹스럽기 그지없는 것이었습니다. ‘한글도 다 떼지 못한 1학년짜리의 어디에서 저런 감성과 표현이 나올 수 있느냐’며 모두가 등을 두드려 주니, 일약 신동으로 거듭나기라도 한 듯한 처지가 다만 어리둥절할 따름이었습니다. 동기부여가 그렇듯 넘쳐났으니, 어쩜 나는 나중에 시인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자라면서 마음에 담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겠지요.
그러나 나는 결코 시인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아니 되겠다는 결단을 별다른 고민 없이 할 수 있게 만들어 준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당시 ‘학원’지(誌)를 주름 잡고 있었던 정호승이란 선배이자 기린아였던 것입니다. 정호승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야만 그려지고 반짝일 수 있는 시어들은 정녕 범접할 수 없는 경이로움일 뿐이었습니다. 동일 계열의 중·고등학교에서 나는 중학생으로 그는 고등학생으로 각각 재학 중이었던 것입니다. 재빨리 시를 덮을 수 있었던 작심 덕분일까요. 해마다 교내 백일장 대회가 열리노라면 나는 산문으로 중등부 우수상을, 그 선배는 시로 고등부 우수상을 각각 수상하여 3,000여 명의 전교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란히 서서 교장 선생님과 악수를 나누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또한 매년 KBS 지방방송국 지하 전람실에서 개최·전시되었던 학교의 시화전에 그 선배의 시와 더불어 나의 시 한 편도 전시장 한쪽 귀퉁이에 자리할 수 있어서, 가슴 콩닥거리는 설레임으로 밤잠을 설친 날도 있었지요.
세월이 흘러 그 선배가 신춘문예에 해마다 동시와 시, 그리고 단편 소설 등에 입상·등단하는 것을 멀리서 지켜보며 마음으로나마 무한한 박수를 보내곤 했었습니다. 이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우뚝 선 그 선배를 운명처럼 조우할 수 있었을 때는 중학교 시절의 만남으로부터 이미 40여 년의 세월이 흐르고 난 뒤였습니다.
삶을 쫓아가는 등고선과 기지개켜고 호흡하는 일상의 서식지를 전혀 달리했음에도 기적처럼 다시 이루어진 우리들의 해후는, 아무리 운명이란 게 신비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다손 치더라도 그보다는 필시 세상과 사물에 대한 그 선배의 특별하고 일관된 사랑과 배려가 있었기에 건져진 선물일 듯싶었습니다. 본부장으로 근무할 때 가석방심사위원들의 요청으로 일선 교정시설에서 가석방심사위원회를 준비토록 하였더니 선정된 시설이 공교롭게도 청주여자교도소였는데, 마침 위원회 개최일자에 다른 행사가 있다며 행사 시행여부에 대한 지시를 기다린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무슨 행사인가를 알아보았더니 재소자들의 심성순화를 위한 시낭송회였는데, 다름 아닌 정호승 선배가 탤런트 김혜자 씨 등과 더불어 그 시낭송회를 주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려 왔었습니다. 행사를 그대로 시행토록 지시하였음은 물론입니다.
행사 당일 떨리는 마음으로 그 선배를 만났습니다. 세월의 오랜 간극을 메우기가 쉽지 않았으나, 기억의 문을 열고 추억 묻은 시간들을 바쁘게 불러내었습니다. 마음은 온통 봄빛으로 자글거려 왔습니다. 시낭송회에 기꺼이 자원하여 정호승 선배의 시 한 편을 낭송하였습니다.
‘운주사 와불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먼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시를 낭송하자니, 시간이라는 안개 속으로 흘려보낸 다른 길들의 아쉬움에 문득 가슴이 저려 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또한 삶의 걸음걸음마다 풀어가는 질문과 방정식이 어느 하나 귀하지 아니함이 없을 것을, 그 무엇도 더는 욕심이나 아쉬움으로 품을 일은 아닐 듯싶었습니다. 다만 시를 낭송하며 마주한, 절절한 사유를 담은 수많은 눈빛들에게, 내 낭송의 시어가 부디 치유와 정화의 언어일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존경하는 선배와 또 교정가족과 함께 사랑이라는 곡선을 만들어 간 그날의 만남과 행사는 마냥 즐겁기만 했습니다. 눈부시고도 아름다운 마음 잔치일 따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