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하는 길
“운명이 나를 안고 살았나, 내가 운명을 안고 살았나.”
나른한 오후 경 팔베개를 하고 소파에 몸을 뉘고 있으려니, 멀리 라디오의 노랫가락이 묘한 울림으로 귀를 열어 왔습니다. 노래 제목도 가수의 이름도 알 턱이 없었지만, 그러나 대중가요의 가사가 그렇듯 깊은 정서와 철학적 사유를 담은 듯 다가옴은 드문 일이었던 터라 나도 모르게 몸을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세월을 많이 그린 마음의 나이테 탓일까요. 아니면 지난 한때의 추억으로 삶의 위로와 격려를 얻곤 하는 호흡 긴 시간들 때문일까요. 생각을 흔들어오는, 잔잔하지만 묵직한 그 노래의 여운에 이끌려 창졸간에 마음이 강물처럼 일렁이고 있었습니다. 마음의 감응이 새삼 그리 절절하였다면, 시간의 여과 과정을 거쳐 온 스스로의 지난 삶이 그만큼 만만치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겠습니다.
돌아보노라면 삶에 드리워졌던 운명의 그림자, 피하기 힘든 그 필연의 굴레와 무게를 남달리 일찍이 악수할 줄 알았던 것 같습니다. 주어진 공간 밖의 풍경을 엿보기보다는 내게 허용된 당장의 시선만큼만 집중하는 것으로 마음을 누르며, 그 마음의 면역을 키우고자 노력했었던 것이지요. 다만 어떤 위기는 기회가 되기도 함을, 생의 고난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을 것임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곡진한 삶을 두고서야 운명 또한 우연을 가장하고서라도 한 번쯤은 내 편에 서줄 것임을 정녕 믿고 싶었던 것입니다.
살아가며 우리 모두 비슷한 고민과 상처들을 마주합니다. 출생이라는,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삶의 출발선이 주는 그 불공정한 게임의 룰을 의아해하며, 많은 사람들이 자존감의 동통으로 일찍이 마음을 다치기도 합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운명의 희롱은 서슴없고 잔인하여, 마음 다진 인고의 행보에 마저 곳곳에 건널목을 만들어 두고 생의 시간표와 청춘의 보폭에 태클을 걸기 오길 마다하지 않습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미 이격된 삶의 출발선, 그 아픔의 잔흔에 마음의 끈을 풀어 버리고는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더욱 많은 사람들은 치열한 고민과 선택으로 자신의 보람된 삶을 일궈 나갈 줄 압니다. 설령 그 삶이 잦은 실패로 흔들리더라도 ‘실패가 두려워 시도를 멈춘다면 삶 자체가 실패’에 이르는 것임을 깨달을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어두운 초생달도 십오야는 밝아진다.
젊어 한 때 고생은 돈으로도 못 사는 것
남이야 뭐라든 내가 있는데
헐벗었다 웃지마라 괄세를 마라
언젠가 한번쯤은 행복이 온다.
1960년대 고교입시를 앞두고 있던 중학교 3학년 시절, 새벽 4시 경의 캄캄한 어둠을 해저으며 조간신문을 배달할 때, 그 어둠을 이기고자 부르곤 했던 노래입니다. 당시 모 방송국의 라디오 드라마 주제가였습니다. 어쩌면 세상을 향한 어린 마음의 대꾸이기도 했을 그 노래를 소리쳐 부르노라면, 가로등 하나가 귀했던 그 시절 새벽길의 무서움이 조금은 덜어졌을 뿐 아니라, 스스로를 격려하는 듯도 해 좋았었습니다. 어찌나 많이 불렀던지 긴 세월을 두고서도 가사 한 구절 어김없이 뇌리에 머물고 있습니다. 신문 한 부의 월 구독료가 130원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가난이란 게 그리 쉽게 다가들 수 있음이 어린 나이에는 충격이었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겨내지 못할 것도 아니었습니다. 부모님이 조용히 불러 실업계 고등학교 진학을 권장했을 때, 그 슬픈 가난의 냄새에 잠시 눈시울이 뜨거워졌을 뿐이었습니다. 삶의 보호막을 잃은 듯한 두려움에 뜬금없이 신문배달을 자원한 게 사춘기 반항의 전부였습니다.
이윽고 공업고등학교 기계과에 진학하였습니다. 성적 좋은 학생이 진학해 오니 가상하다는 선생님의 언질을 아파하지도 않았고, 귀를 찔러 와 몸서리를 치게 하는 실습장의 기계음 소리도 묵묵히 참아낼 줄 알았습니다. 다만 1학기 첫 과제물로 화분삽 하나씩을 만들어 오라는 고지를 받았을 때, 내 인생의 길 끝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지 잠시 두렵기도 했었습니다. 그래서 온통 운동에만 몰두하였습니다. 도내 학도체육대회가 열리면 종합운동장의 수많은 관중 앞에서 합기도 시범을 보이는 것으로, 마음에 배인 열패감이 조금은 덜어지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기운 가세는 지속되어, 고학년이 되었을 무렵에는 학교에 납부할 공납금마저 치르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던지라, 선생님과 상담하여 야간부로 학적을 옮겼습니다. 공납금이나마 스스로 책임져 보리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일자리는 쉽게 찾아졌습니다. 자물쇠 제작공장이었습니다. 그 공장에는 내 또래의 남녀공원들도 30여 명 있었는데, 나에게는 자물쇠의 형틀을 찍어내는 커다란 프레스 기계가 맡겨졌습니다. 그 육중한 프레스는 발판을 밟아 작동시켰는데, 마냥 반복되는 단순 작업인지라 자칫 딴생각에 빠지기 쉬웠고, 그리하여 손과 발의 작동이 어긋나 하마터면 손가락을 다칠 뻔한 위험을 마주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첫날의 작업을 무사히 마친 뒤 오후 3시경 교복을 갈아입고 바쁘게 공장을 나서다가, 문득 뒤를 당기는 듯한 느낌에 뒤돌아 보고서는 그만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었습니다. 기름때 가득 묻은 수십 개의 얼굴들로부터 쏟아져 다가드는, 절절함이 가득 배인 듯한 눈빛들 때문이었습니다. 부러움으로 쏘아 오는 눈빛들이 정녕 당혹스러웠으나, 그 순간의 깨달음은 마음의 큰 충격이었습니다. 아! 이 가난으로 때 절은 내 교복이 누군가에게는 못내 가지고 싶은 부러움이기도 하는구나. 내가 가지고 누리는 작은 것이 결코 보잘것없는 것이 아니라는 위안을 담은 그때의 깨달음이야말로 평생을 살아갈 삶의 자양분이 되어 나를 이끌어 주었습니다. 그날 이후 살아가며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안타까워 하지 않았습니다. 가끔씩 생의 나침반이 흔들릴 때도, 세상의 모진 풍파로 힘겨울 때도, 고개 빳빳이 들고 맞설 수 있었던 용기와 ‘회복탄력성’은 학창시절 마주한 그 공장의 뜨거운 눈빛들에서 얻어진 것들이었습니다.
내가 가지고 누리는 작은 것이 결코 보잘것없는 것이
아니라는 위안을 담은 그때의 깨달음이야말로
평생을 살아갈 삶의 자양분이 되어
나를 이끌어 주었습니다.
이후 내게 있어 삶이란 내 필요에 보폭을 맞추고, 으레 있기 마련인 삶의 흠집과 실수들을 의심 없이 수선하며 옹골차게 이끌고 가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어깨에 쌓이는 운명의 무게에 고개 떨구어 끌려갈 바에야, 차라리 절규하듯 치열하게 간절하게 그 운명과 한판 씨름이라도 하고 볼 일이었던 것입니다. 교도관이 되어 이삼년마다 되풀이되는 인사이동으로 인해 2.5톤 타이탄 트럭에 삶의 모든 것을 싣고 수많은 도시를 떠돌 때도, 다만 절실함으로 내 삶을 이끌어 왔었습니다. 어디로 가고 싶은지, 무엇을 이루고 싶은지를 명확히 알고 가는 사람, 운명에 이끌리지 않고 그 어떤 난관에서도 자신만의 발걸음을 디딤질 할 줄 아는 사람, 인생은 그런 사람에게만 주인 노릇을 허락하는 것이라고 들어 왔었기 때문입니다.
축구의 나라 영국에는 1부 리그로부터 24부 리그까지 수많은 축구 선수들이 있습니다. 그들 모두가 태어나자마자 축구가 꿈이었던 사람들이었고, 모두가 유소년 축구 클럽 시절에는 한 이름 하던 소년들이었습니다. 어느 리그에 머물러도 좌절함이 없이 하나같이 프리미어 리그를 꿈꾸며 매일의 땀을 결코 멈추지 아니합니다. 환갑이면 장수한다던 조선 땅에서 과거(대과)에 급제한 최고령자가 84세 였던 것도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삶이란 게 얼마나 많은 절실함과 핍진함을 담을 수 있는지를 말해 주는 사례일 것입니다.
근자에 다시 읽은 탄저윙의 ‘살아 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 중 가장 감명 깊게 가슴에 와닿는 것도 11번째 할 일인 ‘두려움에 도전해 보기’였습니다. 삶과의 쟁투, 생존을 위한 소리 없는 분투는 그처럼 또 용감하고 절실해야 할 것입니다. 기꺼이 뛰어든 ‘야생의 터’를 아우르며, 일상이 전투인 삶을 꿋꿋하게 이끄는 우리 교정가족 모두는 그리하여 이미 행복해야 할 자격과 의무가 있음을 결코 잊지 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