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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동행

함께하는 길

  • 글 이태희 교정대상심사위원장(前 교정본부장)

약속과 의무

약속이란 장래의 일을 상대방과 미리 정하여 어기지 않을 것을 다짐함을 의미합니다. 이른바 마음의 계약이요 믿음의 출발점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따라서 약속이란 언제나 겉과 속의 표적이 다르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때로는 상대방 없는 스스로와의 다짐이 오히려 우리의 삶과 영혼을 더욱 따뜻하게 아우르는 약속의 토대가 되어 주기도 하지요. 한편 우리의 일상을 규정하고 강제하는 의무란 것도 어차피 법적 약속으로 치부되는 것일 터, 짐작건대 약속이든 의무든 간에 지켜질 때 비로소 아름다운 것이니, 두 단어가 모두 동일한 결단의 궤를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약속이란 마음의 출발이라 일컫기도 하지요. 그리고 그 ‘출발은 언제나 반짝이는 이마와 설레는 가슴을 갖고 있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모든 약속이 그 반짝임과 설레임의 행로로 우리를 데려가지는 않습니다. 피트 하밀의 ‘노란 손수건’처럼 결말의 격한 감동으로 우리의 가슴을 데워주는 약속이 있는가 하면, 서슴없이 그 설레임에 때를 묻혀 상처가 되고마는 아픈 약속 또한 적지 아니합니다. 말이 약속이 되고도 그 의미를 상실하는, 그리하여 서로의 존재가 서로에게 존중되지 못하는 안타까운 경우들을 우리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경험하며 살아왔을 것입니다.

중학교 재학 중일 때였습니다. 개교기념일을 맞아 전교생 마라톤 대회가 열린다고 크게 광고하였는데, 1등부터 15등까지 시상한다고 게시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담임 선생님 왈 “우리 반에서 15등 이내 입상자는 내가 중국집에서 짜장면은 물론 맛있는 요리를 사 줄테니 부디 입상하여 우리 반의 기상을 드높이도록 해라”하였으니, 그 말을 들은 60여 명의 학생들은 모두 박수로 응답하였습니다. 그 박수는 입상하고 말겠다는 우리 반 친구들 모두의 의지와 각오들이 가득 담긴 탓인지 교실이 떠나갈듯 우렁차기만 했습니다.

이윽고 개교기념일이 도래하였습니다. 우리들 삼총사도 출발 신호를 기다리며 몸을 풀었습니다. 원래는 육상에 소질이 꽤나 있었던 친구 한 명과 나 둘이서만 짝을 이루어 달리려 했는데, 갑작스런 친구 한 명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부득이 삼총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평소 모범적이고 공부도 잘하였으나 왠지 몸이 유약해 보이던 같은 반의 친구가 난데없이 다가와 말하였던 것입니다.

“같이 좀 뛰어 줄 수 없겠니? 나대로는 훈련을 많이 했다. 꼭 입상하여 엄마를 기쁘게 해 드리고 싶어.”

홀어머니와 함께 사는 줄은 알았지만 알듯 모를듯한 얘기를 워낙 진지하게 하는 터라, 차마 거절할 수 없어 엉겁결에 손을 잡게 되었던 것입니다.

출발을 알리는 총소리와 함께 우리는 쏜살같이 뛰어나갔습니다. 대회를 앞두고 정말 훈련을 많이 한 탓인지, 동반을 부탁했던 그 친구는 반환점을 돌아올 때까지도 선두 그룹을 형성한 우리의 뒤를 처지지 않고 잘도 따라붙었습니다. 그런데 피니시 라인이 있는 학교 정문을 불과 1km 정도 앞두고서 갑자기 발걸음이 느려지고 힘들어하는 모습이 역력하여, 둘이서 그 유약한 친구의 등을 밀며 역주해야 했습니다. 그 사이 하나둘씩 우리를 추월해 가는 학생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초조한 마음 이루다 말할 수 없었으나, 끝까지 인내하며 아예 그 친구의 손을 잡고 달렸습니다. 이윽고 골인 지점 인근에 도착, 우리 셋은 각자 마지막 힘을 다해 피니시 라인을 통과하였습니다. 그러했는데 아뿔싸! 반칙 행위로 지적당할까봐 그 친구의 손을 놓고 달린 찰나의 순간에 다른 학생 한 명이 그 친구를 앞지르고 말았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순위가 15등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원래의 멤버였던 친구와 내가 13등, 14등을 차지했고 나중에 합류했던 그 친구는 애석하게도 16등에 머무르고 말았었습니다. 속이 상해 눈물을 글썽이는 그 친구를 붙잡고 위로하자, 그 친구는 자기 때문에 우리의 입상 순위가 뒤로 밀린 것 같다며 오히려 미안해하는지라 더욱 마음이 아팠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속이 상했던 것은, 약속을 호언장담했던 담임 선생님의 이상한 태도였습니다. 짜장면은 고사하고, 한 반에 두 명이나 입상하였음에도 따뜻한 격려나 축하의 말 한마디도 없었습니다. 당신이 기대하던 학생이 따로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약속이 송두리째 무시당한 그 경험은 참으로 충격적이었습니다. 스스로의 약속이 그렇듯 가벼운 것이라면, 선생님을 하늘처럼 여기던 어린 학생들에게 그리 쉽게 엿보이게 해서는 결코 아니 될 것이었습니다. 틈틈이 망각의 커튼을 열고 돌아보노라면, 어릴 적 손 잡았던 약속과 우정의 너울들이 다행히도 그 시절 선생님의 허언을 가려주니, 그나마 따뜻함을 머금고 그때의 마음들을 품어보곤 합니다.

그러나 정녕 약속이 답이 될 수 없고, 의무라는 게 책임의 옷을 내던지고서도 감히 명명되는 허장성세의 실상을 교도관이 되고서는 실감나게 목도할 수 있었습니다.

책임과 의무의 확행을 시대의 척후병처럼
앞세우고, 갇힌 세상을 밝혀가는
뜨거운 사명감을 ‘불꽃의 도화선’처럼
분출하며 존재해야 할 것

비록 그 시절 세상의 다른 모든 것들과 키높이를 같이한 것이기는 하겠지만, 간부후보생 교육과정을 수료하고 일선 교정시설로 배명을 받았을 때의 행형현장이 주는 배반감은 실로 컸습니다. 우리가 배우고 체득한 각오와 기대와는 전혀 다른 얼굴로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교도소라 이름하는 조직의 강렬한 현장성의 이미지와는 동떨어진, 마냥 흐트러져 있는 행형의 매무새가 적지 아니 실망스러웠습니다. 적어도 교정시설이라 함은 구성원 각자에게 부여된 약속, 즉 책임과 의무의 확행을 시대의 척후병처럼 앞세우고, 갇힌 세상을 밝혀가는 뜨거운 사명감을 ‘불꽃의 도화선’처럼 분출하며 존재해야 할 것이라고 배웠기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한낱 쓰레기와 수초가 뒤엉킨 강바닥처럼, 달리 둘 때를 찾지 못해 버려진 듯한 군상들로 법석거리는 감방들은 다만 상실과 허무의 냄새들로 코를 찔러 올 따름이었습니다. 온통 곰팡내 나는 영혼들의 소란과 비명으로 가득할 뿐이었습니다. 그 고통의 편린들을 이기지 못해 급기야는 감독하는 교도관에 대한 가시 돋친 배반의 언행까지 서슴지 않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더해 속칭 가다밥(등급별 도구로 찍어낸 밥), 신입식 등으로 대변되는 남루하고 악습적인 교정시설의 일상성 마저 감수하기에 이르러서는, 교정처우라는 말은 언감생심 입에 올려서도 아니 될 듯 싶었습니다. 무리를 지어 몰려오는 행형의 그 어두운 몰골들에 마음이 무너져 그냥 돌아서고도 싶었습니다. 실제 일찌감치 손 털고 돌아가 버린 동기생들도 있었습니다. 마음에 쥐었던 약속과 의무를 미련 없이 던지고 돌아서 가는 동료의 그 쓸쓸한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외로운 늑대로 가득찬 세계에서 양으로 보이면 곤란을 겪게 된다’던 프리드먼의 말이 문득 떠올라 쓴웃음을 짓고 말았습니다.

당장에 손이 닿고 할 수 있는 것들만이라도 선별, 집중하여 행형제도의 올바른 기틀을 하나둘씩 하루바삐 갖추어 나가야 하리라 생각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신산한 삶의 비애가 뼛속까지 스며든 수형자들로 하여금 건전한 수용생활의 실천으로 다른 미래를 꿈꿀 수 있게 하고, 앞날의 예감에 가슴 두근거릴 약속 하나쯤은 스스로 저장할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우리의 입으로 교정을 말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일개 교위 한 명이 오륙십명의 직원을 지휘하여 교도소의 긴 밤을 온통 짊어져야 하는 직무의 행태 또한 보람이기는 커녕, 열등감의 힘든 동통으로 다가설 뿐이었습니다. 좌절과 수치의 시절이었습니다. 다만 ‘잔잔한 바다는 능숙한 선원을 만들지 않는다’는 격언 하나를 마음의 위안으로 곱씹을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도 많이 흐른 세월과 더불어 그런 와중에도 자신의 역할을 놓지 아니한 훌륭한 선배·동료들의 고통과 희생이 있어, 오늘날 우리의 교정시스템은 여느 선진국 못지않게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자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상전벽해라고나 할까요. 다만 안타까운 점은, 일부 문제수형자들의 행태는 아직껏 여전하여, 직원들로 하여금 가끔씩 견디기 힘든 모멸감을 경험하게 해주기도 하지요. 때로 그런 부류까지도 포용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면 착하고 성실하게 살 이유는 무엇인지 싶어 무거운 회의감에 빠져들게도 됩니다. 그리고 기실 그 모두를 끌어안고 가는 게 어차피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가끔은 오늘날의 행형체계가 오랜 세월 지나치게 법집행을 위한 편의 위주로 다듬어진 까닭에, 작지만 빠져서는 안 되는 재소자들의 평범한 바람들을 혹여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어떤 것이 인간의 마음을 뚫고 들어가 뜨거운 위로가 되고 설득의 언어가 되는지, 진중하게 돌아보고 또 숙고해 보아야 할 일이기는 하겠습니다.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을 합니다. 직업도 사랑도 자기 삶의 모든 매듭도 스스로의 선택으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에는 필연적으로 약속과 의무가 함께 따릅니다. 그러므로 더러 우리의 선택이 무겁고 두려워도 결코 고개를 떨구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수많은 삶을 싣고 오가는 열차를 향해 눈비 속에서도 깃발을 흔드는 철도원처럼 꿋꿋하게 서서, 우리 교정의 향방과 건널목을 지켜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절망하는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는 약속이 되고, 우리의 의무로 화톳불처럼 누군가를 데워주는 따뜻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편견과 질시로 가득한 세상이 그나마 살 만한 것도, 우리 교도관처럼 ‘정의에 목마른 사람들이’ 그 세상을 함께 하기 때문임을 잊지 맙시다. 하얀 눈과 얼음만으로 펼쳐진 이 겨울의 햇살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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