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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동행

우리는 한마음

서예의 세계에서 문방사우(文房四友, 紙·筆·硯·墨) 중 종이(紙)는 다정한 청자(聽者)로 의인화될 수 있다. 말 못 한 사연도, 지난 세월의 무게도 가감 없이 받아내는 품 넓은 벗이기 때문이다. 반면 붓은 거침없는 직언자(直言者)다. 소홀했던 마음을 마주하게 하며, 방치했던 감정들을 톺아보게 한다. 그런가 하면 벼루는 오래도록 묵묵히 길을 일러주는 스승이며, 먹은 제 몸을 갈아 붓의 길을 빚어내는 헌신 깊은 친구와 같다.

  • 글 서선미
  • 사진 홍승진

정우회 회원의 문방 ‘연서회’
은은한 묵향 속 그윽한 성찰 연서회 대한민국재향교정동우회 정우회 소모임

문방에서 피어나는 배움과 우정

1983년 11월 4일 발족한 대한민국재향교정동우회(이하 교정동우회)는 정부의 퇴직공무원 친목단체 결성 촉구 방침에 부응하는 전국 규모의 법정단체다. 그리고 교정동우회 출범 이전부터 교정기관장 출신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모임이 바로 ‘정우회’라는 이름의 특별회다.
정우회 회원들은 공무원으로서의 공직을 마친 뒤에도 배움과 교류를 이어가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한 바람의 통로가 된 것이 바로 연서회(硯書會)인 것.
이름 그대로 벼루(硯)를 앞에 두고 글씨(書)로 교류하는 이 서예동호회는 2009년 4월 15일 첫 모임을 열었다. 이후 2013년 7월 30일 「대한민국재향교정동우회법」(법률 제11952호)이 제정·시행되면서 교정동우회가 법률적 근거를 갖춘 단체로 승격되자, 연서회는 자연스레 그 산하 조직으로 편성됐다.

붓끝에서 길러진 안목과 성취

지난 9월 중순, 교정동우회 사무실 인근에 마련된 연서회의 문방에는 아홉 명의 회원이 모여들었다. 이후 각자의 사우가 책상 위에 정갈히 놓이자 공간은 단숨에 묵향으로 번졌다. 도구를 펼쳐놓는 단순 행위에 불과했으나 그 안에는 오랜 시간 이어온 습관과 정성, 그리고 오늘 하루를 진지하게 맞이하겠다는 마음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손끝에서 시작된 힘은 팔과 어깨로 이어지고, 다시 마음의 결을 타고 흐른다. 종이를 스치는 붓털의 사각거림, 붓끝에 맺혔다 흩어지는 먹물의 무게, 은은히 퍼지는 묵향까지, 이 모든 요소가 하나의 의식이 되어 ‘몰입’으로 수렴됐다. 바로 연서회 회원들이 서예를 단순한 기록이 아닌, 내면과 마주할 수 있도록 하는 또 하나의 거울로 인식하게 되는 순간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문방에만 머물며 정적인 활동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니다. 글쓰기와 몰입 속에서 쌓은 감각과 성찰을 바탕으로 경험의 폭을 적극적으로 넓혀간다. 서예에 대한 안목과 소양을 기르기 위해 전시회를 찾고, 때로는 공자의 탄생지와 같은 서예 명소를 찾아 해외 답사를 하며 그 유산을 눈과 마음에 새기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들 모두가 결국은 마음의 깊이를 더하는 밑거름으로, 그 결실은 다시 붓끝에 닿아 서예라는 행위 자체와 글씨를 통해 배어 나오는 것이다.
실제로 연서회 회원들의 발자취는 눈부신 성과로 이어지기도 했다. 70대 후반부터 90대 중반에 있는 아홉 명 모두 한국서예미술진흥협회 초대작가로 등단했으며, 대한민국미술대전과 대한민국서예미술공모대전 등 주요 대회에서 초대작가상, 우수상, 특선, 삼체상 등을 수상하며 필력을 인정받았다.
지도를 맡고 있는 오산 권희영 회원은 물론, 현암 안현석, 충암 김차승, 이산 정원섭 등 회원들1)의 성취는 단순한 수상 실적을 넘어선다. 그것은 오랜 수련과 고요한 정진이 그 삶에 남긴 무늬, 곧 인문학의 향기인 것이다. 1) 오산 권희영(지도), 지강 손선흥, 원당 민경화, 현암 안현석(회장), 충암 김차승, 봉산 방을봉, 지천 이상우, 천산 나승두, 이산 정원섭(총무)

서예의 시간, 초심과 겸손의 합주

연서회의 서예 학습은 한자가 탄생하고 발전해 온 흐름을 따라 진행된다. 붓을 잡는 기본 기술을 익힌 뒤, 전서·예서·해서·행서·초서 순으로 다양한 서체를 배운다. 이는 한자가 처음 만들어진 순간부터 이어져 온 방식으로, 결국 연서회 회원들은 서체의 발전 단계와 미학을 따라 붓을 움직이며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셈이다.
학습 방식도 체계적이다. 사부가 제공하는 16자 체본(体本)을 일주일 동안 임서(臨書)하며 반복 연습을 하고, 차주에는 연습한 글씨에 대한 조언과 평가가 이루어지는 식이다. 이어 새로운 체본으로 또 연습을 계속해 가다 보면, 어느새 회원들은 붓과 종이가 전하는 미묘한 감각에 손과 마음을 맞추고 있다고 한다.
서예는 단순한 글씨 연습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과 정신은 물론 역사와 문화를 함께 품으며 스스로를 마주하는 여정이다. 연서회 회원들 역시 이구동성으로, 그 길 위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마음을 다스리게 된다는 데 입을 모았다.
“10년 이상 붓을 잡아 왔어도, 저희 중 자신의 필력에 만족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지필묵 앞에선 늘 처음 배우는 것처럼 초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이죠. 연서회가 소박한 모임인 듯 보여도, 붓과 종이, 먹과 벼루 앞에서 보내는 매 순간이 성찰인 겁니다.”

공직의 무게 벗고, 개인적 사유(思惟)를 입다

연서회 회원들도 현역 시절에는 늘 경직된 모습이었다고 한다. 또한, 한 치의 흐트러짐도 허용하지 않는 공직자의 무게, 수용자와 사회를 동시에 마주해야 했던 긴장감은 여전히 그들의 일상에 깊이 스며 있으리라.
그러나 이곳, 문방에서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경직된 책임자의 얼굴은 사라지고, 묵향이 스민 따뜻한 기운만이 흘러넘친다. 손에 잡힌 붓끝은 예리하지만, 표정에는 여유와 미소가 감돈다. 문방에 앉은 순간만큼은 세월의 길이와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그저 한 사람으로서의 자신을 마주할 따름이다.
현재 연서회는 아홉 명의 정예 회원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앞으로는 더 많은 이들이 함께하기를 바라고 있다. 특히 서예에 관심 있는 후배들이 새로 합류한다면 연서회의 배움과 교류는 더욱 활기를 띠고, 서예가 퇴임 후 정서활동으로 자리 잡는 데에도 큰 힘이 될 것이라 믿는다. 그리하여 묵향 속에서 쌓아온 배움과 우정이 다음 세대의 손길과 만나 더 깊고 넓게 이어졌으면 하는 것이 연서회의 또 다른 바람이다.
물론 그것이 단순히 회원 수의 확장을 뜻하지만은 않는다. 서예가 주는 고요와 울림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고, 삶의 무게를 내려놓은 자리에서 서로의 마음을 따뜻하게 보듬는 일이면 된다. 연서회 회원들이 바라보고 있는 방향은 분명 거기에 있었다.

이곳, 문방에서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경직된 책임자의 얼굴은 사라지고,
묵향이 스민 따뜻한 기운만이 흘러넘친다. 손에 잡힌 붓끝은 예리하지만,
표정에는 여유와 미소가 감돈다. 문방에 앉은 순간만큼은 세월의 길이와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그저 한 사람으로서의 자신을 마주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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