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하는 길

1987년 교감이던 시절, 2년간의 청송 근무를 마친 후 떠나오기 직전에 가족 동반으로 안동댐을 찾았었습니다. 떠나 가면 다시는 쉽게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장소인지라, 머물렀던 격지에 대한 추억 하나쯤은 눈에 담아두고자 큰마음 먹고 나섰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안동댐에서 배도 타고 사진도 여러 장 찍으며 한나절을 즐겁게 보내고 돌아왔었지요.
그러나 웬걸, 석별의 사진첩을 미처 열어 보기도 전인 1990년 교정관으로 승진하니 다시 청송으로 발령이 났었고, 어쩜 그 동네와는 세월의 수레바퀴에도 끊이지 않는 인연의 질긴 실이라도 꿰였는지 1999년 12월에는 다시 안동교도소장으로 발령이 나기에 이르니, 이삿짐을 꾸리는 마음이 그리 편치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되돌아갈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 안동댐의 물살은 경쾌한 찰랑거림으로 손을 흔들며 반겨 주었고, 그때마다 다시 배 타고 노닐며 사진 한 판 아니 찍을 수 없었으니, 지난 87년도의 그 성급했던 작별의 마음짓이 다만 싱겁고 민망할 따름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1977년 교정간부후보생 교육을 이수한 이후, 2010년 교정 본부장 보임을 마지막으로 33년간의 교도관 생활을 마감하기까지 대략 스무서너 번 단봇짐을 꾸렸었던 것 같습니다. 빈번한 인사이동이었던 탓에 떠돎과 머묾이 새삼스럽지도 않았고, 삶의 새로운 둥지를 틀 때마다 언제라도 떠날 수 있다는 마음으로 머물곤 했었지요. 그렇듯 보따리를 싸고 푸는 일에 익숙한 삶이었지만, 그러나 여러 번 반복했다고 하여 떠나고 또 만나는 일이 수월해지는 건 결코 아니었답니다. 툭하면 날아오는 사령장을 손에 쥐고 이곳저곳 쉬임없이 발품 팔며 떠돌았지만 떠남의 길 끝에 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가끔씩은 불쑥불쑥 솟구치는 알 수 없는 흔들림에 마음을 힘껏 부여잡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멀고 긴 세월의 뒤안길을 그렇듯 서성이다 보면 아득한 시간의 여울에 흘려보낸, 꼭꼭 숨어있어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옛 추억의 장소를 조우하는 망외의 행운(?)을 얻기도 했습니다. 한번 지나쳐 버린 장소를 오랜 시간이 흘러 해후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닐터, 그 오랜 과거를 문득 마주하여 오늘에 되새기는 가슴 먹먹하고 마음 축축한 회상의 자맥질을 거듭하노라면, ‘시간과 존재의 반복성’, ‘스스로를 품고 도는 삶의 원형적 순환’ 같은 어려운 말에도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게 되지요.
대구청장으로 근무할 때였습니다. 대명동 대구청소재지에서 한 블럭만 내려가면 안지랑 사거리와 추억 속의 골목 입구 삼각진 모양의 2층 건물이 있을 줄은 전혀 모른 채 지냈습니다. 근무한 지 달포가 지난 후에야 밤길 산책을 나섰다가 그야말로 우연히 그 장소를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고층 건물이 숲을 이룬 지금과 달리 옛날에는 우측 안지랑 입구를 제외하고는 주변 모두가 하나같이 논밭을 이루고 있었던 터라 사위를 분별하기가 쉽지 않았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그날 밤 안지랑 사거리 우측 골목길의 삼각진 2층 건물을 마주하고는 그 건물의 외벽에 손을 대자니,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한 감격과 함께 파란만장했던 내 어린 청춘의 그림자가 그 건물에 길게 드리워져 오는 것만 같아 마음이 데워져 왔습니다.
고교 시절 야간부로 적을 옮기고 주간에는 취업했던 일명 근로학생이었던 시절, 모 구청의 지적협회 측량보조원으로 일한 적이 있었는데, 공고재학생이었던 터라 제도기를 이용한 도면작성은 물론 현장의 측량 기능 또한 6개월쯤 지나자 어렵지 않게 체득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측량 기사가 바쁜 약속이 있는 날이면 간단한 측량업무 정도는 보조원으로서 일임받아 처리하곤 했습니다. 당시 안지랑 사거리 우측 골목길 입구 삼각형 2층 건물의 분할측량도 그렇게 하여 직접 맡아 처리했었던 것입니다. 당시는 막 창문 공사를 하고 있던 신축 건물이었는데 세월을 머금은 것들은 다 부식되고 녹이 슬기 마련인 터, 37년 만에 마주한 그 건물은 용도가 폐기된 듯 창문마다 나무 가림판이 덧대어져 있는 것이 어쩜 지난 시간의 흔적마저 모두 봉인해 버린 듯해 허허로운 마음 금할 길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날의 그 우연한 해후는 강물 같은 뒤척임으로 마음을 흔들어 그 건물의 벽에 손을 대고 한참을 멈춰 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1994년 안양 평촌 신도시에 아예 눌러앉기로 작정한 것은, 아이들의 교육상 더이상은 가솔들을 대동하여 도시를 떠돌아서는 아니 되겠다는 생각이 먼저였고, 더불어 본부를 비롯해 인근의 여러 교정시설로 출퇴근이 가능하겠다는 지리적 이점 또한 고려한 때문이었습니다. 안양으로 이사를 한 후 모처럼 가족 모두가 안양유원지로 나들이를 갔었습니다. 공용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두고 잠시 걸은 후 유원지 초입의 두부 전문 식당을 지나치다가, 식당 옆의 싸리나무 울타리가 쳐진 공터를 보는 순간 화들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안양 유원지가 내 첫걸음이 아님을 미련스럽게 깨우치고 있었습니다. 약 20년 전쯤 그 공터는 딸기를 팔던 장소였고, 친구와 둘이서 그날 첫 만남을 가졌던 아가씨 두 명과 함께 거기서 맛있게 딸기를 먹으며 담소를 나누었던 기억이 새로웠습니다. 고개 흔들며 얼른 그 터를 지나쳤지만, 그러나 마음은 회상의 더듬이를 들고 홀로 뒤쳐져 한참을 그 자리에 멈춰서는 걸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70년대 중반 서울 상계동 독서실에서 소위 ‘출세’를 꿈꾸던 친구들과 코피 터지게 학업에 정진하다가, 늦봄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친구 한 명과 바둑판을 들고 독서실 뒤 수락산 자락을 올랐습니다. 그리고는 넓은 바위를 차지하고 앉아 힌돌 검은돌 착수하며 신선놀음을 흉내내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때, 아마도 약수터를 가는 길인 듯 아가씨 두 명이 우리를 지나쳐 산을 오르고 있었는데, 어찌나 곱고 예쁘게만 보이던지 우리는 아무 말 없이도 서로 통한 듯 눈을 마주치고는 재빨리 바둑판을 접어버리고 아가씨들을 뒤따라 산을 올랐습니다. 뒤따르며 말을 걸어도 웃을 뿐 전혀 응답이 없었던 것을, 약수터에 이르러 가판대의 콜라를 집어 건네길 성공함으로써 비로소 말이 오갈 수 있었답니다. 하산길에는 먹혀들거나 말거나 일주일 후의 만남까지 언급할 수 있었고, 천우신조인지 일주일 후 그녀들이 약속 장소에 나왔던 터라, 설레는 마음으로 버스를 타고 찾아온 곳이 난생처음 발을 디뎌본 안양 유원지였던 것입니다. 싸리나무 울타리 쳐진 딸기 가게에 들렀다가, 그때만 해도 고즈넉했던 유원지 일대를 둘러보았습니다. 유원지 깊숙한 곳으로 들어서니 무성하게 우거진 숲 사이로 붉은 벽돌로 지어진, 고고하게 비춰지는 큰 건물이 있어 다가갔더니 입구 기둥에 ‘안양소녀원’이라는 뜻밖의 표지판이 있어 고개를 갸우뚱거렸습니다. 하지만 그 아늑하고 조용한 주변의 풍경 탓에 놀라움보다는 그런 곳에 근무하는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으로 입을 맞출 따름이었습니다.
아무튼 그날 이후 우리는 자연스레 각자의 짝을 이루고 1년 남짓 만남을 가졌었습니다. 1년 후의 헤어짐이 당시는 무척 아팠지만, 돌이켜 보면 가난하고 무망한 공시생에게 1년이란 긴(?) 시간 동안 친구가 되어 준 그녀가 다만 감사할 따름이라 아니할 수 없겠습니다. 모든 삶에는 아픔과 아쉬움이 동반되기 마련이고 우리의 기억은 그 아픔과 아쉬움이 남긴 흔적이라는 말에 백번 동의하며, 싸리나무집 공터 앞에서 뒤쳐져 버린 마음의 걸음을 재촉하고자 얼른 아이들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 후 세월이 한참 더 흘러 서울청장으로 재직할 때는, 안양예술공원으로 이름이 바뀐 동 유원지 미술전시관 개관식에 안양시장이 참석을 요망하여 들렸는데, 지나가는 차창 너머로 그 옛날의 싸리나무집 공터가 아직 그대로인 채 눈에 들어와 혼자 쓴웃음을 짓기도 했답니다.
어쩜 대구 안지랑 사거리의 들판 길에 유난히 홀로 도드라졌던 삼각형 2층 건물의 기세 좋은 오름이, 혹은 안양소녀원의 그 고고했던 풍광과 자태가 우연처럼 내 삶을 이끌었던 것은 아닌지, 아니면 내 무의식 속 기억들이 그렇게 운명처럼 추억의 장소를 뒤쫓아 헤메인 것인지 알 수 없으니, ‘클래식에 듣는 훈련이 필요하듯’ 삶 또한 마음에 되새기는 훈련이 필요할 성싶습니다. ‘인생에서 소중한 것들은 시간의 담금질을 견디며 천천히 정제되어 간다’고 했으니, 옛 시절의 그 떠남과 만남들, 반은 필연같고 반은 우연같은 시간 모두를 다만 ‘떠돌아 온 자의 비망록’으로 가슴에 담아 토닥일 따름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