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식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수도권 어느 교도소에서 수용자가 교도관을 폭행한 사건이 전국적 이슈가 되고 있다. 솔직히 말해 필자는 위 기사를 보고 크게 놀라지 않았음을 고백해야겠다. 사건이 경미해서가 아니라, 주변으로부터 워낙 많은 교정기관 사례를 이미 들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는 민망해 차마 입 밖으로 내기도 어려운 이야기들도 꽤 있다. 물론 형사법 학자로서는 어떤 사실을 인정하기 이전에 교호신문절차를 거쳐야 하겠지만, 사회의 한 일반인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건들이 교도소 담장 안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모양이다.
카리스마 넘치는, 그와 동시에 엄청난 명성과 악명을 떨친 심리학자 필립 짐바르도(Phillip G. Zimbardo)는 역사에 길이 기록될 스탠포드 감옥 실험을 한 바 있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이 야심 찬 실험은 실패로 돌아갔다. 실험 결과가 실망스러운 것이 아니라 실험 결과가 ‘아예 존재하지 않게 됐기’ 때문이다. 참여자들은 가상의 교도소에서 임의의 방식으로 교도관과 재소자의 역할로 나뉘었고 그 역할을 연기했다. 처음에는 모든 참여자가 역할을 받기 이전처럼 화기애애하게 지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참여자들 사이에 묘한 분위기가 생겨났다. 교도관(역할을 맡은 참여자)은 재소자에게 각종 규칙을 강요했고 재소자(역할을 맡은 참여자)에게 폭언이나 욕설을 했다. 재소자들은 처음엔 이에 반발했지만 차츰 교도관의 권위를 인정하고 복종하면서 정말로 죄를 지어 감옥에 온 사람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중에 몇 명은 심지어 보석금을 내고 나가겠다거나, 변호사를 불러 달라는 요구했다. 급기야 교도관이 재소자를 고문, 학대하기에 이르자 실험은 예정된 기간의 절반도 채우지 못하고 중단됐다.
필립 짐바르도의 시대(1970년대)에서는 교도관과 재소자가 각각 위와 같이 행동하는 것이 당연한 사회적 약속이었던 듯싶다. 참여자들은 놀라운 속도로 사회가 자신에게 요구하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만약 현대 한국에서 필립 짐바르도의 실험을 재현해 본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재소자 역할을 맡은 사람 중에 적어도 일부는 마치 자신이 악성 재소자인 것처럼 ‘연기’해 교도관의 권위에 불복하려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학대를 받는 것은 교도관을 ‘연기’하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현재 한국에서는 교정기관에 요구되는 고전적 역할과 의무(재소자의 인권 존중)가 큰 문제 없이 달성된 듯하다. 과밀화라는 고질적 문제는 있지만 이는 예산 부족과 혐오시설 회피라는 정치적 갈등이 주원인이지 재소자를 괴롭히려 과밀화를 조장한 결과는 아니다. 적어도 교도관이 재소자를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는 이념은 이론의 여지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제는 교도관에 의한 재소자 학대가 아닌 재소자에 의한 교도관 학대가 새로운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사실 ‘떠오르고 있다’는 표현은 조금 잘못됐다. 꽤 오래전부터 이미 이 문제가 실무와 학계에서 오르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분야에 관한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가시적인 성과는 잘 나오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와 사회, 문화가 놀라운 속도로 변화하는 동안 교정의 물리적 요소는 거의 변하지 않았고 그 안을 구성하는 교도관과 재소자의 인식만 바뀌었다. 이런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종전의 이념과 상반되는 이념을 추구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재소자가 교도관을 학대하는 시대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을 그 누가 알았을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교도관을 괴롭히는 문제적 재소자가 아직 큰 비율을 차지하지는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여전히 모범수가 되고자 노력하는 재소자가 많고, 그렇지 않더라도 별문제 없이 교정기관 규율을 따르는 재소자들이 훨씬 많다. 그러나 한두 명의 ‘괴물’은 마치 고급 사과 상자에 심어진 한 개의 썩은 사과가 돼, 언제 주변의 사과들까지 오염시킬지 모른다. 한 개의 썩은 사과가 있을 때 사과 상자를 며칠만 방치하면 상자의 사과는 전부 썩어버리고 만다.
교정기관의 ‘괴물’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일단 이 논의를 용기 있게 시작하는 일이 중요하다. 놀랍게도 이 괴물들을 다루려는 구체적인 논의는 물론이고 괴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아직도 만연해 있다. 국가의 공직자가 재소자에게 험한 꼴을 당한다는 사실이 퍼지면 교정기관은 물론이고 형사사법절차 전부가 웃음거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일단 문제를 제기하면 적당한 답을 찾아내고 문제를 봉합하기가 너무나도 어렵기 때문일까? ‘교정기관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라는 규범이 ‘교정기관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라는 사실까지 지배해 버린 것은 아닐까? 교정활동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문제를 끄집어내기가 꺼려져서일까?
아마 이 모든 것이 조금씩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만큼 괴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괴물을 물리치는 첫 번째 걸음은 ‘괴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제는 누구나 괴물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들을 어떻게 다룰지 과감한 논의를 시작해야 할 때이다. 괴물에 이름을 붙이지 않고, 괴물의 이름이 불리지 아니하게 하여 마치 괴물이 없는 것처럼 속이기에는 때가 늦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