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용명
전 안동교도소장, 교도소연구소 소장
1925년 2월 21일 취업 인원 239명으로 업종은 18개이다. 관사업에는 73명이 취업했고 석세공(石細工)에 21명이 취업해 가장 많았으며, 다음으로 지물공 16명, 보철부 10명, 기타 효공, 무력공(錻力工), 마공, 혁공, 영선토공, 취사부, 청소부, 변사부, 세탁부 등이 있었다. 수부업에는 77명이 목면경직공에, 위탁업에는 56명 중 화재봉공에 36명이 주로 막대소공(莫大小工) 10명, 양재봉공 9명 등이 취업했다.
관사업은 지물공을 본업으로 했고 또한 그 주문자가 많았으며, 최근 시제품은 그 재료를 함경북도 내의 귀중한 나무의 금벌(禁伐)에 속하는 ‘스테이크’용 재료로 사용되는 것으로 가장 가치가 있었다. 그 수요가 가장 많았으며 이로써 본 재료는 박달나무의 일종으로 그 성장이 느리고 약 10년 동안에 직경 1촌 내지 1.5촌 정도에 불과해 오래전부터 중국 및 국경의 조선 지방에서는 주로 이를 마차 종류의 진봉(眞棒)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널리 노탁(艪擢)에 사용했다. 견고해 쉽게 부러지지 아니해 비행기의 프로펠러 또는 인쇄재료에도 적당하다고 사료됐다.
오히려 석세공은 종래 벼루의 제작을 하거나 육지(肉池) 기타 그 시작품으로 해 역시 희망하는 사람이 많은 한편 대리석으로 화대(花臺), 그 밖의 제품을 제작했고 재료인 돌이 좋아 호평받았다. 그리고 내의 공 중 양말을 제작했으며 이 역시 수요자가 많았다. 그리고 벼루는 그 석재를 도내 종성군 용계면 현산동에서 나는 것으로 거의 무진장으로 예로부터 연서라 이름하고 그 질의 경연(硬軟)이 중간 정도이고 칠흑 같은 광택이 나고 묵의 액체가 쉽게 흡수되는 특색이 있어 함경북도 특산품으로 애용됐다. 이처럼 지물공, 혁공, 양재봉공과 함께 주문 제작이 성황을 이뤘다(제19사단 각 대의 제물품의 위탁수리를 했음).
청진형무소 작업 중 주된 업종은 지물공, 양재봉공, 혁공, 벽돌공, 쿠루메짜기, 경사공 등이 있고 여기에서 세입에 관해서는 1932년 11월 관용주의 실시 이래 열심히 선전 보급에 노력한 결과 현저한 발전을 달성하기에 이르렀다. 1936년도에 이르러 세입 총액이 98,400여 원에 달해 개청 이래 호성적을 거둘 수 있었으며 이러한 비약적 발전을 달성하기 이른 것은 군부 및 제 관청의 적극적인 이해와 원조를 얻어서이다. 지난해에 이들 관용품 제작고는 61,900여 원의 큰 금액을 올려 작업 중인 군수품은 그 93%를 차지했으며 작업 경영상은 물론 수형자의 직업 훈련상에도 매우 큰 이점이 있었다.
위와 같이 작업은 군수품을 주로 제작해 발전했고, 한층 그 철저화를 도모해 작업 중인 지물공은 청진형무소 유일의 기본작업으로 하고 그 확실을 기하기 위해 한층 노력을 경주했다. 그리고 다른 업종에서도 여러 차례 발전이 있었으며, 벽돌공 작업은 지난해 신설에 관련된 이래 고심의 연구 결과 양질의 제품을 출하하기에 이르러 수요자로부터 극상의 호평을 받았고 그 성적 양호에 따라 주문의 요구에 응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한편, 야채류와 돼지를 사육했으며, 이에 대한 수확고는 아래 표와 같다.
수형자에 대한 심신의 조화를 위해 교회를 활용했다. 총집교회의 식장에는 가성(可成), 교제를 게시하는 것으로 하고 계절의 서화 또는 분재의 종류를 진열(서화로서 교제로 하는 것을 제외하고 달리 교회 후에 진열하는 것은 가능)해 청각, 시각의 양면에서 구체적으로 이를 주입했다. 즉 교회에 대한 감각을 얻고 인상을 깊게 하는 것에 노력했다. 이와 같은 서화, 분재의 전시는 미적 감정을 환기하고 취미의 향상에 도움이 돼 좁은 지역에 있어 부자연적 생활을 계속해 머무르고 있는 수형자들의 정신을 위안하거나 혼탁한 잡념 또는 몰래 품고 있는 불만의 생각도 서화와 같이 단성(丹誠) 그릇에 심어진 아름다운 분재와 같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의해 이를 좋은 마음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주었다. 또한, 동시에 규율적 작업의 활기 없는 정신에도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동하게 해 부지불식의 사이에 피로를 완화할 수 있었다. 이 두 가지 모두 사상을 고상하게 하고 감화를 돕는 데 지대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이를 시도한 이래 그 자리에 있는 수형자들의 감화를 증가시켜 교화상 이익이 적지 않다는 것이 인정됐다.
총집교회는 일요교회, 기념일교회, 식전교회, 특별교회, 공장교회 등 5종이 시행됐으며 각 총집교회 인원은 아래 표와 같다.
개인교회는 입소 시, 석방 시 등 총 16종이 시행됐다. 특히 석방 시 또는 석방 준비 시, 징벌 시 또는 징벌 종료 시 등 개인에게 감화를 제공하는 기회로 개인교회가 시행됐으며 각 개인교회 인원은 아래 표와 같다.
1923년과 1924년에 시행된 접견 및 서신은 피고인과 수형자를 구분해 집계하고 있으며, 1930년부터 1936년까지의 접견 및 편지의 내역은 아래 표와 같다.
원래 청진형무소는 설비에서 다른 형무소 본소에 비해 규모가 가장 협소하고 수용 인원 역시 불과 2, 3백 명 내외, 큰 형무소에 비해 정말 조용한 편이었다. 피수용자의 질과 관련해 남쪽 지방 수형자에 비해 흉악적 위험성을 가지거나 특히 중국 간도나 러시아령 등에 근거하고 있는 뿌리가 깊고 부정단에 해당하는 정치범죄자 20~30명과 야만적 살인과 약탈을 도모하는 다수의 중국인이 개입하고 있었다. 한편 지리상 대외 포구가 인근하고 또한 중국 간도에 가까운 곳인 이곳을 도주 탈주해 그 영역에 들어갈 때는 가장 빨리 일본 관헌의 손 또는 소위 국경적 분위기의 하나인 요행을 바라고 파옥도주를 생각하는 데 마음을 쓰고 있는 자가 항상 있었다. 1922년, 1923년에 걸쳐 수 명이 공모해 직원 폭행을 가하고 파옥도주했다. 또한, 재소 중인 정치범은 독립만세기념일에 해당하는 3월 1일에는 거의 매년 불식의 움직임을 보이는 등 다른 형무소에 비해 경비상 위험률은 높아 계호상 한층 더 주의를 기울였다. 동시에 그 수괴자로 인정되는 2, 3명의 자의 분리 방법을 강구했다. 한편 다른 일반 수형자에 대한 유도적 방면에 한층 힘을 기울인 이후 수형자 동정은 점차 평온으로 돌아와 모두 근면하게 됐다. 그리고 외부에 있는 부정단자 등은 재소 중인 자와 내통하기 위해 종종 음모가 있다는 경찰, 헌병대 측으로부터의 정보가 번번이 있어 항상 당 경찰서와 연락을 취하고 경계상 만전을 기했다.
관동대지진과 화재에 대해 일반 수형자에게 그 사실을 보여주고 그들의 근검역행(勤儉力行)에 한층 독려를 가했다. 1924년 5월 29일 상장 수여식을 이용해 이번의 진재(震災)는 이전의 도쿄(東京)를 중심으로 한 대지진과 화재에 이어 참상이 심했고 그 피해 범위와 손해의 정도, 이재민의 고민과 곤궁의 상태 등 참상의 상황, 국민의 깊은 동정과 구원 활동, 또 세계 각국의 동정이 엄청나게 많았으며 일왕 부부, 섭정궁 전하의 걱정, 이재민을 불쌍히 생각하는 마음의 따뜻함에 대한 국민의 걱정, 동포의 비참한 일에 직시해 동정의 생각을 금할 수 없고, 모두 국민의 일원으로 동정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훈시했다.
아울러 일동은 의연금 갹출에 이르렀고 그 마음으로 근검역행에 노력하는 한편 그 의미에서 한층 작업에 정려해 국가의 부에 뜻을 이루고 이를 성취하고 그 구원이 되는 뜻을 정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 후 작업에 긴장을 불어넣고 작업상여금 또는 영치금으로부터 의연금 갹출을 원하는 자가 십수 명, 금액 약 50원에 이르렀으며 그 정의 따뜻함은 상과 칭찬을 받을 만했다. 지난해 법무부국으로부터 통첩도 있었고 오늘의 경우 위의 그 예의에 이르렀다는 취지를 정성스럽게 설명해 더욱더 근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