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준섭 문화칼럼니스트
사람들은 타인이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공감해 주길 원하며, 이러한 경향성은 아이러니하게도 개개인의 개성이 갈수록 중시되고 있는 오늘날 더더욱 두드러진다.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공감만 할 수는 없는 일. 공감에 현명함을 더해야 진정한 화합을 이끌 수 있다.
“너 T야?” 요즘 MZ세대 사이에서 돌고 도는 유행어다. 흔히 ‘MBTI’라 불리는 자기보고식 성격유형지표는 네 자리의 알파벳으로 구성되는데, 그중 세 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바로 사고(T)-감정(F) 지표다. 전자는 이성적 사고를, 후자는 감성과 공감을 중시하는 성향이다. “너 T야?”의 ‘T’는 바로 여기에서 파생된 밈(Meme)으로, 내 이야기에 공감해 주지 않고 이성적으로 직언만 하려는 상대방의 태도를 꼬집을 때 쓰인다.
작년 대유행한 이른바 ‘깻잎 논쟁’도 같은 맥락이다. 내 애인이 깻잎장아찌 떼기에 애를 먹고 있는 이성 친구를 도와줘도 괜찮은지, 그러면 안 되는지를 묻는다. 이 질문의 표면적 문제는 깻잎 떼기지만, 그 안에는 ‘이성 친구를 도와줬을 때 상처받을지도 모르는 애인의 마음에 공감해 줄 수 있는가?’라는 속뜻이 숨어 있다.
“너 T야?”와 ‘깻잎 논쟁’이 전하는 메시지는 명료하다. ‘공감해 달라’는 것이다. 개개인의 개성을 중시하는 MZ세대 사이에서 공감과 관련된 밈이 크게 유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다소 의아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의 본성을 갖고 있으며, 자연스럽게 여러 사람의 공감을 얻길 원한다. 그런데 세상은 이와 반대로 한 사람 한 사람이 잘게 세분화된 ‘나노사회’로 향하고 있으니, 공감에 대한 본능적 욕구는 오히려 커질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공감해 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밈의 가벼움을 빌리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주변 사람들에게 공감에 대한 요구를 은근히 전달하면서도 분위기가 이상해지면 “이거 요새 유행이잖아!”하며 웃어넘길 수 있으니 말이다. 결론적으로 공감은 세대를 막론하고 인류가 존재하는 한 갈구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필요충분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공감은 인간의 삶에서 떼어 낼 수 없는 중요한 덕목이지만, 때로는 오히려 공감대 형성과 화합에 방해가 되기도 한다. 공감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선택적 과잉 공감’이 문제다. 사실 공감은 어느 정도 편향성을 지닌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과 일치하는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 혹은 상황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지만,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람과 집단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적다. 이러한 경향이 심해질수록 특정 방향성을 택해 무한대의 공감을 보내고 다른 방향에 대해서는 들으려 하지도 않는 ‘선택적 과잉 공감’이 이뤄진다.
가천대학교 장대익 교수는 작년 출간한 저서 <공감의 반경-느낌의 공동체에서 사고의 공동체로>를 통해 선택적 과잉 공감을 만드는 ‘공감 구심력’보다는 나와 다른 생각과 행동을 받아들이고 그 이유를 깊이 사유하는 ‘공감 원심력’을 길러야 한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감정이입과 같은 ‘정서적 공감’을 넘어 역지사지의 ‘인지적 공감’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흔히들 공감을 온전한 정서적 영역이라고 생각하지만, 현명한 공감은 정서와 이성을 적절하게 조합했을 때 비로소 실현된다. 객관적 지식과 상황을 무시한 채 감정적 공감에만 몰입하면 이는 선택적 과잉 공감으로 이어지며, 선택적 과잉 공감은 흑백논리와 편견, 고정관념을 낳는다. 공감이 오히려 공감대 형성과 화합을 해칠 수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현명한 공감은 교정과 지역사회를 더욱 원만하게 만드는 윤활유 역할을 톡톡히 할 수 있다. 예컨대 교정시설을 신축하는 과정에서 일자리 확대, 지역경제 활성화 등 지역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객관적 데이터를 제시하는 동시에 역지사지의 자세로 주민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교정시설 신축에 적극 반영한다면, 교정시설 확충에 한층 속도가 붙을 수 있다. 그러니 이제부터 무조건적 끄덕임과 추임새 대신 이성과 감성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현명한 공감을 만들어 나가자. 진정한 화합이 그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