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정 포커스

광주감옥과 근대 행형

금용명

교도소연구소 소장, 전 안동교도소장

1. 총설

2. 근대 이전 광주의 옥(獄)과 행형

3. 근대 광주감옥

4. 건물과 설비

5. 직원

6. 수용자

7. 수용자 처우

8. 작업

9. 교육 및 교화

10. 의료처우

11. 은사(恩賜)

1. 총설

가. 연도별 수용자 현황

우리나라에서 구금시설은 상고시대도 뇌옥(牢獄, 감옥)이 존재하였던 것은 의심할 바 없으나, 그것이 어떠한 형태로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이를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광주는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전라도의 중심지로서 중요한 관청이 존재하였고 관청의 부속건물의 하나로 옥이 있었음은 조선후기 지도에 나타나 있는 옥(獄)의 형태와 연관해 이를 알 수 있다.
1894년 갑오경장 이후 경찰서에서 감옥사무를 취급함에 따라 광주감옥서가 설치되어 운영되었으며, 1908년 감옥사무가 법부로 이관됨에 따라 경찰서로부터 이관을 받아 광주감옥을 개청하였다. 그 후 1912년 비교적 근대식 감옥 건축의 형태를 갖춘 광주감옥을 완성하여 재감자를 수용하였다.
그 후 일제강점기 동안 수감자의 증가에 따라 여러 차례 확장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일제로부터 형무소 시설과 설비를 인수받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까지 그대로 사용하였다. 6·25전쟁으로 광주형무소는 대부분이 소실되었고, 그 후 미처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그 자리에 유엔의 원조를 받은 캐나다산 목재로 응급하게 청사, 수용동과 공장, 취사장, 취사장 등을 복구하여 사용하였다. 1971년 7월 15일 광주교도소는 광주시 문흥동으로 신축 이전하였으며, 2015년 10월 19일 현재지로 이전하였다.
광주에서의 구금의 역사는 우리나라에서 국가가 성립된 역사와 함께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금을 위한 시설은 형벌이 존재했던 시대와 함께하였으며, 1905년 형법대전이 제정되고 나서 시간제 형벌인 징역형이 도입되어 현재와 같은 시설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광주의 역사와 함께 한 광주교도소의 역사는 광주의 역사이자 문화였으며, 그 속에는 수많은 인간을 구금하고 처벌하였고 삶과 죽음이 공존했던 역사이기도 하다.
광주감옥과 근대행형에 대한 기록은 오늘 그리고 미래에도 존재하면서 광주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우리나라의 역사이자 문화의 구성요소로 의미와 가치를 축적해 갈 것이다.

광주형무소 정문
본소의 외벽은 판자벽이지만 정면만 벽돌로 개축하여 1922년 11월 준공하였다. 사진의 오른쪽 끝에 일부분이 보이는 2층 건물은 간수훈련소이지만 원래 군청 소속이던 것을 1913년 중에 보관전환(保管轉換)을 받은 것이다.

2. 근대 이전 광주의 옥(獄)과 행형

조선시대까지 광주는 호남지역의 중심지로서 중요관청이 위치하였으며, 구금시설인 옥이 관청의 중요 부속건물로 존재하였다. 조선후기 지도에는 광주부에 옥이 위치한 곳이 표시되어 있다. 특히 옥은 관청의 부속건물의 하나로서 지역사회에서 범죄자를 처벌하여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기능을 하였으며, 기와집으로 지어졌다.
각 지방에는 중앙의 6조(曹)와 같은 기능을 하는 6방(房)이 그 지방의 행정 기능을 담당하였으며, 그중에서 형벌과 형옥에 관한 일은 형방(刑房)이 담당하였다. 형벌은 태, 장, 도, 유, 사의 5형이 중심이었으며 형벌 집행을 위한 구금과 범죄사건 심리를 위한 구금의 구별은 없었다. 그 이유는 옛날에는 형벌로 자유형과 같은 시간제 형벌이 존재하지 아니하였고 사형이나 체형 또는 유형과 같은 종류뿐이었기 때문에 재판이 끝나고 결정이 내려지면 즉시 집행을 마치고 끝내게 되어 재판 후에는 행형을 위해서 일정한 기간 동안 신병을 구속해 둘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광주옥 지도, 서울대학교 규장각

3. 근대 광주감옥

가. 서

1894년 갑오경장을 거치면서 근대국가 체제로의 전환기에 지방 감옥에 대해서 칙령(勅令)으로 ‘각 지방에 감옥서를 설치하고, 종래 존재한 옥사를 이에 충당한다’라고 명하였다. 1898년에 내부대신이 정한 「지방경무장정(地方警務章程)」에서 ‘각 지방경찰관 이하 순검은 경무규정을 실행하는 것을 본분으로 하고 (중략) 감옥사무는 재감인의 출입과 명적, 급여품, 영치물, 작업, 계호, 서신 및 접견, 상여와 징벌처분’이라고 규정이 마련되었다. 이에 따라 지방 감옥사무는 경찰사무에 포함되어 경찰관이 취급하였다.
또한, 갑오경장을 계기로 근대국가체계를 갖추면서 여러 차례 형률이 변경되고 나서 실세상으로 징역형, 금옥형(禁獄刑) 등 자유형이 존재하고 나서부터 미결과 기결의 구금이 있었으며 죄인의 구금은 경찰에서 담당하게 되었고, 이때 옥을 관리하는 것은 각 지방의 경찰의 업무에 속하였다. 경찰에서 수감자를 수용하기 위해 경찰서의 한쪽에 공간을 마련하여 구금시설로 사용하거나 또는 별도의 건물을 옥사에 충당하였다.
1907년 12월 13일 칙령 제52호로 감옥관제가 제정되었고 감옥사무가 1908년 법무로 이관되면서 감옥의 설치 위치를 전국 주요 도시 8곳을 지정하였고 이때 광주감옥이 설치되었다. 새로운 관제에 따라 직원은 모두 새로이 채용하였고, 특히 전옥 이하 판임 이상 직원의 대부분은 일본인 감옥관을 빙용하여 진용을 정비하였다. 그리고 감옥은 재래의 옥사 또는 경찰서 부속 유치장에 대해 응급하게 공사를 시행하여 사용하였고 1908년 6월에서 7월경까지 개청 준비를 완료한 후 경찰로부터 사무인계를 받아 집무를 개시하였다.
1908년 감옥사무를 법무에서 인수하고 나서는 감옥 8개소를 설치할 때 비교적 감옥으로서 형태를 갖춘 설비가 있었던 곳은 경성감옥뿐이었고 그 밖의 각 지방의 감옥은 새로 일본에서 초빙된 일본인 사옥관(司獄官)이 개선에 착수하였으나, 옥사의 신증축은 재정상의 관계로 급속하게 기공에 이르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경찰로부터 인계받은 구옥사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감옥 개청에 앞서 사무실, 감방, 취사장, 목욕탕 등과 같은 설비를 하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에 최우선으로 그 시행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1908년 이후 점차 공사에 착수하여 합병 이후까지 차례로 근대식 감옥을 건축하였다.

광주감옥(통감부시대)
나. 광주감옥 개청

구한국정부 감옥관제 이전에는 광주 서문 밖의 낮은 땅에 다소 거친 온돌식 여러 동의 옥사를 설치하고 여기에 수감자를 수용하였다. 죄질이 가장 중한 사람은 동문 밖에 있는 토포청(討捕廳)의 한 방에 구금하고 토포 관리로 하여 계호하게 하였다.
1896년 경무서(警務署)의 설치와 함께 옥무(獄務)를 경무서의 소속으로 옮겨 군수가 이를 감독하도록 하였다. 이 전후로 군 안에 있던 불결하고 어두운 폐실을 이용하여 1개소의 구류장을 설치하고 이를 순교청(巡校廳)이라 부르고 오직 채무 불이행자를 구금하였다. 같은 해 광주경찰서의 설치와 함께 경찰서 소속이 되었고 군수가 이를 감독하였다. 그 후 이를 경무서로 옮겼으나 당시 옥사로 볼 수 있는 설비는 없었다. 그 처우방법 또한 조잡하고 정도가 지나쳤기에 한번 관리의 기(氣)에 어긋나는 것 같은 일이 있으면 몹시 수인을 가혹하게 다루었다.
1905년 경찰고문을 두고 옥사를 경무서 부속의 유치장으로 이전하고 전남감옥이라 부르고 순사 또는 순교(巡校)로 하여금 옥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1907년 한국감옥 관제를 정하였고 다음 해 4월 법부령 제3호로 광주감옥을 설치하였으며 전라남도 광주(현 광주경찰서 뒤편)에 정하였다. 같은 해 12월 법무령 제19호로서 전라북도 전주에 광주감옥 전주분감을 설치하였다. 1908년 6월 한국 정부의 용빙에 응하여 사옥관(司獄官)으로 부임한 전옥 코가키 소지로(古垣宗次郞)는 같은 해 7월 16일 광주경찰서장 경시(警視) 반도 에이지로(阪東榮次郞)로부터 감옥사무를 인계받았으며 당시 죄수는 130명이었다.
1908년 말 현재 광주감옥 수용인원은 미결 103명, 기결 60명, 계 163명을 수용하였다.1) 1908년 10월 말 광주감옥의 죄명별 기결과 미결 인원 현황2)은 다음과 같다.

* 위핍치사 : 위협하여 죽게함
** 공화홈포 : 공적재물을 사사로이 씀

1908년 12월 법부령으로 전라북도에 광주감옥 전주분감을 설치하였다. 1909년 10월 칙령 제243호로 통감부 감옥관제가 제정되어 통감부령 제31호로서 광주감옥을 전라남도 광주에, 동 전주분감을 전라북도 전주에, 동 목포군감을 목포에 설치하였고 나아가 1910년 6월 통감부령 제24호로서 광주감옥 군산분감을 전라북도 군산에 설치하였다. 그리고 1909년 11월 1일 전옥 마츠무라 마사키(松村政記)는 구한국 광주감옥으로부터 수형자 283명, 피고인 259명 및 건조물 전부의 인계를 받아 그 사무를 개시하였다.
1910년 8월에 당시 전옥(2대째) 마쯔무라 마사모또(松村政基)는 제반 조사연구를 수행한 후에 광주 원촌리(院村里)에 토지를 매수하여 신축 이전에 착수하였다. 당시 시가지와는 상당한 떨어져서 아무런 풍경이나 경치도 없었기 때문에 정문도로 쪽에 앵두나무 가로수를 심는 등 심혈을 기울였다. 1923년 4월 광주면에 편입되었다.
1920년 10월 27일 부령 제518호로서 감옥명칭 위치표의 개정으로 전주분감은 전주감옥으로, 목포분감은 목포감옥으로 승격하고, 군산분감은 전주감옥에서 관할하도록 하였다. 1923년 5월 칙령 제72호로서 당 감옥의 명칭을 광주형무소로 개칭하였다. 1935년 7월 부령 제92호로서 소록도지소를 개설하고 같은 해 9월 전 조선의 나병수형자를 수용하는 형무소로 하여 같은 달 15일에 개청하였다.

구(舊)광주감옥 감방
1908년 4월 구(舊)한국 법부령 제3호로서 광주감옥을 설치하였고, 위치를 전라남도 광주에 정하고 같은 해 7월 법부령 제10호로 사무개시의 취지가 시달되었기 때문에 같은 달 16일 경찰서로부터 130명의 재감자와 조선 구식의 엉성한 감방 1동을 인계받아 사무를 개시하였으며 이것은 그때의 감방이다. 장방형으로 한쪽에 남자감, 다른 쪽이 여자감이고 입구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은 여자죄수들이다. 방수는 합해서 11개, 건평은 약 28.5여 평으로 현재는 흔적도 없다(조선형무소사진첩).
구(舊)광주감옥 감방
1908년 개청 당시 경찰서로부터 인계를 받은 건물에 개수를 한 것이다. 그해 개청한 감옥은 경성을 제외하고는 모두 감방의 부족과 불완전으로 어려움이 있었으나 재정관계상 신축의 전망은 없었고 재감자는 끊임없이 증가하고 있는 사정이어서, 할 수 없이 각종 건물에 임시 설비를 갖추어 감방으로 사용하였다. 그 후 본감옥은 1910년에서 1912년에 걸쳐서 현재의 위치에 신축하였고, 이들 구감은 철거하여 지금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아니하다(조선형무소사진첩).

4. 건물과 부지

가. 건물

1908년 6월 전옥(典獄) 코가키 소지로(古垣宗次郞)는 한국 정부의 빙용에 응해 부임하여 같은 해 7월 16일 광주경찰서장으로부터 재감자와 함께 조악한 감방(흙방으로 건평 28평5합6작)을 인계받은 후, 감방에 인접한 일본인회 소유의 온돌건물 및 그 부지를 차입하여 사무실, 창고 및 휴게실을 설치하고 어렵게 사무를 개시하였다.
같은 해 8월 탁지부(度支部) 직영으로 목조아연판 지붕 단층 건물을 임시사무실, 취사장 및 화장실을 신축하여 약간의 정비를 보기에 이르렀고, 1910년 6월 동쪽 문밖 현재의 위치에 총평 170평27합5작의 건물 신축에 착수하여 다음 해 8월 준공하였으며 1912년 4월 동 감옥 이전을 완료하였다.
그 후 수용인원은 나날이 증가하여 부지의 확장, 감방 및 공장의 증축에 매우 노력하고 비용을 투입하였으며, 이로써 감방 중앙 및 2층 교회당은 1928년 9월에 준공하고 구치감은 경비 12,000여 원으로 1930년 8월에 기공하여 다음 해 3월에 준공하였다.

광주감옥의 확장 배치도

1931년부터 1936년까지 각 연도말 건물 상황은 아래 표와 같다.

※ ▲는 2층 건평을 별도 표기함
광주형무소 배치도

1936년 거실 평수 및 구금 상황을 살펴보면 혼거실 72개, 독거실 59개였으며 각 거실당 수용인원은 아래 표와 같다. 특히, 1930년 건축된 구치감은 독거실 40실이 마련되었다.

광주형무소 감방
오른쪽이 제3감으로 1911년 9월 건축되었고 혼거방 26개, 독거방 2개로 한방의 면적은 혼거방은 2.49평, 독거방은 1.14평이다. 왼쪽은 제4감으로 1921년 3월에 신축되어 혼거방 14개, 독거방 2개가 있고, 한방의 면적은 혼거방은 2.6평, 독거방은 1.22평이다(조선형무소사진첩).
나. 부지 및 경운지

1910년 통감부감옥으로부터 인계받은 부지는 7,666평6작이었고, 경운지는 부지에 접속하여 796평8합1작(외 묘지 252평3작)이었다. 부지에 대해서는 그 후 수회에 걸쳐 합계 3,961평을 민간으로부터 매수 확장하였으며 전라남도와의 사이에 조체보관체(組替保管替)를 실시하여 아래 표와 같은 면적을 가지게 되기에 이르렀다.
경운지는 1913년 1월 서방면(瑞坊面) 신안리(新安里) 및 극락면(極樂面) 내방리(內坊里) 소재 국유의 미개간지 129,600평3합3작의 보관교체를 받았다. 그 후 1935년 4월 가네가후치(鐘ケ淵) 방직주식회사 소유토지 88,740평의 현재의 지산정(芝山町), 산수정(山水町)의 경운지와 교환을 하였다. 그 후 광주세무감독국으로부터 폐지된 도로의 보관전환 등의 증감이 있었다.
1931년부터 1936년까지 각 연도 말 토지 상황은 아래 표와 같다.

5. 직원

가. 직원 정원 연혁(각 연도 말 현재)

1908년 38명의 직원으로 개청하였으며, 그 후 수용인원의 증가와 건물 증축 등에 따라 직원은 점차 증원하여 1936년에는 123명에 이르렀다. 전옥, 간수장, 간수 등의 형무관 이외에도 의무촉탁, 보건기수, 약제사 등 의료관계 직원과 교무촉탁, 작업기수 등 전문직과 감정, 기관수, 고원, 화부, 마자(馬者), 마정(馬丁) 등 감옥 운영에 필요한 직원들이 근무하였다.

나. 직원 정원 현황표(1936년 12월 31일 현재)

1936년 12월 31일 본소 직원은 정원 123명에 현원 119명이었으며, 소록도지소에는 정원 15명에 현원 16명이 근무하였으며, 직급별 등 내역은 아래 표와 같다.

다. 직원 배치 현황(1936년 12월 31일 현재)

1936년 12월 31일 부서별 직원 현황은 서무과 17명, 작업과 14명, 계호과 79명, 의무과 5명, 교회 3명 등 118명으로 그중 계호과 비중이 약 67%를 차지하였으며 세부 내역은 아래 표와 같다.

6. 수용자

가. 개청 이후 각 연도 재소 인원

1908년 광주감옥 개청 이후 1936년까지 1일 평균 수용인원과 연말 인원은 아래 표와 같다. 1908년 연말 인원 157명이었으며 그 후 최대 889명까지 수용하였다.

나. 재소자 입소 및 출소 현황

입출소 현황을 살펴보면 입소는 1931년 2,995명, 1936년 2,026명이었으며 출소는 1931년 3,022명, 1936년 2,115명으로 점차 감소하였다.

다. 재감 인원표(1936년 12월 31일 현재)

수용자뿐만 아니라 형사피고인과 피의자, 노역장유치자, 대동유아 등이 수용되어 생활하였다. 그리고 우리나라 수용자 이외에도 일부이기는 하지만 일본인 12명과 중화민국인 7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라. 재소 인원 및 입출 상황

1932년부터 1936년까지 수용인원과 관련하여 연인원, 1일 평균 수용인원, 연간 입출소, 연말현재 인원에 대한 내역은 아래 표와 같으며, 연말 인원은 점차 감소하였다.

마. 형명 및 형기 인원(1936. 12. 31 현재)

형기가 가장 긴 수형자는 10년 이상 15년 이하가 남, 여 각 1명이 수용되어 있었고, 3년 미만 1년 이상이 30.8%인 203명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 ▲ 중화민국인
바. 범수별(1936년 12월 31일 현재)

1936년 12월 31일 현재 6범 이상은 8명, 3범 이상 156명, 2범 331명, 초범 164명으로 재범이 51.1%로 과반을 차지하였다.

7. 수용자 처우

가. 경비 실비
나. 재소자 식료비 1인 평균액

수용자 식료비 1인 평균액은 매년 증가하였으며 1936년 주식비 125.090원, 부식비 13.866원으로 계 138.956원이었다.

다. 형무소비의 수용자에 대한 비율
라. 수용자 동작시간표

수용자 동작시간은 월별로 달리하였으며, 특히 여름철에는 작업시간이 12시간에 달하였고 겨울철에도 8시간이었다. 기상 시간은 여름철에는 5시 15분이었고, 겨울철에는 7시 45분이었다.

마. 재소자 징벌

감옥법상 징벌은 11종류가 있었으며, 1935년과 1936년에 적용된 징벌 중 감식벌이 가장 많이 적용되었다. 질책(叱責)은 형집행법의 경고와 같은 종류이며, 경병금(輕屛禁)은 금치(禁置)에 해당한다. 위반사항은 폭행, 물품은직, 물품손괴, 외설, 항명, 태역 등 다양하였으며 1932년부터 1936년까지 5년간 위반사항별 징벌 인원은 아래 표와 같다.

징벌 종류별 인원
위반사항별 인원(1932년부터 1936년까지)
바. 청원

당시 청원은 다양한 처우에 대해 제기되었다. 물품구입희망건, 물품차입에 관한 사항, 일신상의 사항, 물품처리에 관한 사항 등의 순이었으며 서적, 편지, 가사, 작업변경, 처우상 등에 대한 청원이 제기되었다.

사. 석방 시 보호

석방 시 보호의 종류는 수용보호, 간접보호, 일시보호 등이 있었으며, 오늘날 질병으로 석방이 어려운 경우 일시 수용하는 제도와 유사한 제도가 시행되었다. 당시 각 지방에는 출소자보호회가 구성되어 출소자에 대한 숙식 제공, 취업 알선 등을 시행하였던바, 석방자에 대한 보호회에 알선, 작업상여금 처리, 공공기관에의 소개 등이 실시되었다.

보호 인원
석방 시 보호 상황(1932년부터 1936년까지)

8. 작업

가. 서

개청 당시에는 감옥 용부(傭夫) 외에 작업이 없었다. 1910년 11월에 이르러 수부업인 고공(藁工)의 신설을 보기에 이르렀다. 그 당시 당소의 형무작업이 시작되었다. 그 후 관사업 죽공(竹工) 신설, 유림수(柳林藪)농장 개간 등에 따라 먼저 작업경영의 기초가 정해졌다. 그리고 수년 동안 업종의 신설확장이 있어서 1914년 수형자 전부의 취업을 보기에 이르렀다.
1914년 이후 초지공(抄紙工)의 수록(手漉)에 대신하여 기계제지를 하였고 면공(綿工)을 확장하여 탈지면공을 설치하였으며, 인쇄기계의 증설, 벽돌요의 개조 등 작업경영을 점차 쇄신하였고, 해를 거듭하여 개선의 실적을 올려 오늘에 이르렀다. 특히 1935년도에 당소로부터 30정 정도 떨어져 있는 만사불편을 느끼고 있었던 유림수(柳林藪) 경운지를 가까운 5정 정도의 단거리의 지산정(芝山町) 토지 내와 교환 이전하여 그 경영상 커다란 편리를 도모할 수 있었다.

광주형무소 공장
이것은 쿠루메(久留米) 명주짜기(絣織) 공장의 광경이다. 일부에는 양재봉공이 설치되어 있다.

초지공(抄紙工)은 환망(丸網)식을 사용하였고 취업 인원 60명, 주 제품은 죽지(竹紙)(온돌에 붙이는 종이)는 외국수입품 방지의 사명을 가지고 전남에서의 죽설(竹屑) 이용의 선구가 되었다. 그 품질이 뛰어나서 나중에 죽제품 평회(評會)에서 금패(金牌) 수상을 하였다.
면공(綿工)은 풍전(豊田)식 및 프랫식 제면기를 사용하여 최신의 탈지정련설비로서 취업 인원 40명, 1일 생산능력은 타면(打綿) 300천(瓩), 지면(脂綿) 200천(瓩)으로 소면(梳綿)탈지가 우수하여 세상에 정평이 나 있다.
그밖에 특별작업으로 경영하고 있는 것은 지물공, 연와공, 양복공, 인쇄공, 혁공, 죽도공의 6종이 있으며 모두 지방에 인기를 얻고 있으며 각각 순조로운 발전을 보였다. 보통 작업은 농장(경지면적 88,740평 취업 인원 평균 100명)을 수위로 하여 무력공(錻力工), 고공, 화재봉공 등 10여 종에 달하고 가급적 작업 개별화의 실현을 기하였다.

대마 재배
현 광주형무소에서 약 20정(약 2.2km) 떨어진 유림수(柳林藪)라고 하는 곳에 광주감옥 소속의 농장이 있다. 40정보(12만 평)에 대마를 많이 재배하였다. 이 사진은 그 대마가 무성한 상황이며 현 대구형무소장인 키요쿠마 노리치카(則近喜代熊)가 동감옥 전옥이었던 시대에 촬영한 것이다. 사진의 가장 왼쪽에 서 있는 것이 키요쿠마(則近), 그 오른쪽이 당시 동감의 작업주임이었던 간수장 마쯔이 이시타로(松井石太郞)이다. 대마의 재배는 지금도 성하며 마포를 짜서 판매하거나 또는 이를 다시 양복 등으로 만들어 팔거나 했는데 그 수요는 해마다 증가하였다. 1922년도의 매상고는 3천여 원에 달했다(조선형무소사진첩).
소년수 경운
소년수는 땅에 맡기어 그 심신의 창달을 도모해야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바이다. 본감옥에는 1913년경부터 호남지방의 소년수를 수용하게 되어 매일 반드시 감옥 앞의 경운지에서 채소 재배를 하도록 하였다. 채마밭 가장자리에 보이는 백색회칠의 2층 건물은 현재 남아 있는 간수훈련소이며 높은 벽은 외벽의 판자벽이다. 이 판자벽은 현재 벽돌벽으로 개축되었다(조선형무소사진첩).
나. 작업 인원(1936년 12월 31일 현재)

1936년 12월 말 작업 인원은 총 616명으로 그중 수형자가 596명 노역장 유치자가 20명이었으며, 형사피고인의 신청에 의한 작업은 없었다. 수형자 645명 중 49명이 불취업자이었으며 이에는 징벌자, 환자 등 작업이 어려운 수형자가 그 대상이었다.

다. 형명 및 작업별 수용자(1936년 12월 31일 현재)

작업은 취사, 청소, 간병, 이발, 변사, 세탁, 보철, 경리 등의 작업인 관용부와 목공, 인부의 영선부 그리고 면공, 양재봉공, 지물공 초지공 인쇄공, 고공, 짚신공, 죽공, 경운, 혁공, 철공 등 직영작업(관사업) 및 양재봉공, 망공, 지물공, 인부 등 위탁업 등이 실시되었으며 각 작업장 취업 인원은 아래 표와 같다.

라. 작업 수입

작업 수입은 1936년 취업 연인원 161,367명, 1일 평균 취업 인원 495명이었으며 작업 수입은 연 약 104,059원으로 1인 평균 연 약 210원, 일 0.645원이었다. 아래 표는 1932년부터 5년간의 작업 수입을 나타낸 표이다.

마. 작업상여금

1936년 작업상여금 총액은 6,222원이었으며 석방 시 급여한 금액은 713명에게 6,079원을 지급하였고 석방 시 1인 평균 금액은 약 10원이었다. 또한, 일정한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재소 중에도 작업상여금을 지급하였으며 1936년에는 143원을 지급하였다.

9. 교육 및 교화

가. 교회 등 시행 횟수 및 연인원(1936년)

1936년에 시행한 집회는 총집교회 38회, 특별집합교회 86회, 개별교회 6,718명에 대해 시행되었다. 접견은 2,017명에 대해 실시하였으며 편지를 보내고 받은 통수는 12,067건이 시행되었다.

나. 수형자 간독서적종별표(1936년)

도서는 종교, 문학, 지리 등 18과목 387종에 관본 5,676권, 사책 659권 등 총 6,335권이 이었으며 구체적인 내역은 아래 표와 같다.

다. 교육시행 성적(1936년)

교육은 연 3학기제로 운영하였으며 조선어, 일본어, 산술, 습자, 글짓기에 대해 학습을 하였다.

라. 여자수형자 교육

여자수형자를 대상으로 1934년 8명, 1935년 9명, 1936년 4명에 대해 8과목에 대해 교육을 실시하였으며 상세한 내용은 아래 표와 같다.

마. 남자수형자 교육

남자수형자를 대상으로 1934년 13명, 1935년 16명, 1936년 33명에 대해 8과목에 대해 교육을 실시하였으며 상세한 내용은 아래 표와 같다.

10. 의료처우

가. 월별 신환자 및 사망자(1936년)

1936년에 새롭게 발생한 환자는 699명으로 월별 신환자 내역은 아래 표와 같으며, 사망자는 4명이 발생하였다.

나. 사망자, 병자, 투약 인원 백분비

환자와 투약 인원에 대해서는 1936년 환자 736명으로 연인원으로 환산하면 18,376명이었으며 투약 연인원은 17,473명으로 재소자 연인원에 대한 비율은 6.08%이었다.

다. 병명별 사망 인원

1927년부터 1936년까지 10년간 사망한 수형자 63명의 병명별 사망원인은 아래 표와 같으며, 폐렴이 가장 많은 14명으로 22.2%를 차지하였고 이어서 폐결핵은 8명으로 약 12.7%를 차지하였다.

11. 은사(恩賜)

1910년 8월 조선통치의 시작에 있어 혜택을 시행하기 위해 구형소범(刑所犯)의 죄수 중 정상이 불쌍하고 하찮은 사람에 대하여 대사를 실시하도록 한다는 취지의 조서(詔書)를 하사받고, 칙령 제325호로써 대사령이 발포되었다. 조선의 죄수 중 이 은전을 입게 되는 사람은 미결수 남자 262명, 여자 30명, 기결수 남자 1,317명, 여자 102명 등 합계 1,711명이나 되었다.
광주감옥에서는 9월 5일에 그 선고식을 거행하는 것으로 하여 다양한 준비를 하였지만, 당일 밤새 비가 와서 돛자리까지 차올라 구내에서 식을 거행할 장소가 없어서 어쩔수 없이 광주경찰서 연무장을 식장으로 하여, 소재 각 관아의 수장이 열석하여 매우 장엄하게 식을 거행하였다. 당일은 오전 5시 50분 은사(恩赦)를 입은 222명(여 5명 포함)을 식장에 집합시켜 6시 전옥이 식의 거행 취지를 고하고, 광주지방재판소 검사정은 정성스럽고 인정이 많은(懇篤) 훈계를 한 후 대사통지서를 하사하였으며 전옥의 훈계, 교회사의 교회(敎誨)가 있었고, 식을 마치고 광주지방재판소 정원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였다.

광주감옥 대사(大赦)선고식

전 유형수 정철화(鄭哲和, 1878~1943)의 유형에 관한 실화3)

(전략) 다음 해인 1909년 6월 2일에 이르러 나의 죄가 결정되어, 내란죄라고 하는 죄명이 붙여져서 평리원(平理院)에서 유(流) 15년을 선고받았다. 그 재판은 6월 8일로서 확정되었지만 재판일로부터 11일째에 완도에 유배되었다. 더욱이 유배지로 보내지는 일에는 종로감옥의 감방에서 나와 호송자인 순검(巡檢)의 손에 인도되었다. 그때 함께 보내진 사람은 20명이었다. (중략) 우리에게 지정된 면(面)은 완도에서 강 하나 사이인 고금도(古今島)로 그 섬에는 남면(南面)과 농상면(農桑面)의 두 개의 면이 있었는데, 나 외에 5명 총 6명에 대해서는 남면이 지정되었고 농상면에는 다른 7명이 배치되어, 결국 완도에는 총 13명이 두어진 셈이다. (중략) 나는 가족이 함께였고 또한 돈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집 한 채를 샀다. 그 집은 최근까지 오랫동안 유형의 사람이 살고 있었던 집이었다. 나는 그 집에 살면서 김, 그 밖의 해산물상을 경영하면서 나와 함께 유형에 처해져 온 사람들을 고용하여 가업을 도와주기 시작하였으며 모두 편안하게 살고 있었다. 섬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우리들 유형인들을 환영하였으며 싫어서 꺼리는 듯한 분위기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들을 환영하는 것은 유형인에게는 섬에 불편함을 끼치는 자가 없고, 오히려 유형인이 오기 때문에 섬의 상매(商賣)가 번창할 뿐만 아니라, 그중에는 학문을 가르치고 그 밖에 섬을 위하는 자가 있는 가운데 대체로 인격이 훌륭한 사람이 많았고, 특히 비록 유형인이라고 하더라도 정변(政變)으로 인한 것이어서 언젠가는 사면이 됨과 동시에 대신(大臣)이 되어 조정에 서는 사람도 있어 존경할 만한 사람도 많기 때문이었다. 또한 유배가 되어 섬에 살더라도 본토로 건너가는 것은 매우 쉬웠고, 항상 배편도 있고 또 도망가 버리는 일도 가능하지만, 도주하면 참(斬)해지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하지 않더라도 섬 관리의 허가만 받으면, 언제라도 육지의 어느 곳에나 건너갈 수가 있었다. 다만 경성에만은 들어갈 수 없었다. 가령 유형(流刑)이 종신이더라도 때때로 대사(大赦)가 있어 귀환을 맞이하는 날도 있는 가운데 유형수는 일반적으로 책임감이 강하기 때문에 때가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을 뿐으로 도망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우리들은 이 섬에 자리 잡고 나서 2년여가 되었을 그 무렵 조선이 병합되었다는 소문이 있었고 유형인 중에는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섬의 순검(巡檢) 쪽에 알아보니 절대 그런 일은 없다고 대답하여 그대로 있었으나, 1910년 8월 21일에 돌연 순검이 와서, 광주지방재판소의 검사국으로부터 호출이 있어, 지금 같이 출발해야 하니 서둘러 준비를 하라고 서둘러대서 무슨 일인지 전혀 모르지만 가족에게 작별을 고할 겨를도 없이 배에 올랐다. 그때 함께 모인 사람은 11명이었다. 최초에는 13명이었으나 2명은 죽었다. 그날 목포에 도착하였고, 다음 날은 광주에 도착하여 바로 광주감옥에 수용되고 말았다. 그때 여러 섬으로부터 모여진 유형수가 약 70명을 헤아렸고, 모두가 내란죄의 사람뿐이었다. 그리고 수용된 후 5일째 되는 날 대사(大赦)가 시행되었다. 그것은 한일병합 때문이었다고 하는 것을 처음 알았던 것이다. 그때 생각하지도 않은 은사를 입은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때문에 감옥에서 석방된 것은 아래의 정도로 기쁘다고도 생각되지 않았다. 그것은 유배의 몸이라도 파렴치한 행위를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책의 생각도 없었고, 처자와도 동거하였으며 상업도 상당히 호황이었으며, 섬지방 사람들도 친밀하게 교제를 하고 있어 생활상으로는 아무런 부자유도 없이 차츰차츰 섬에 대한 친근감도 깊어져 왔고 또한 유형(流刑)에는 조만간 은사를 내려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으며 이래저래 정신상으로도 신체상으로도 아무런 고통도 없이, 오히려 매우 창기(暢氣)에 생활하고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사를 받은 후에도 다시 완도로 돌아가 1년 정도 그곳에서 생활을 한 후, 가족을 데리고 그 섬을 떠났다.

1) 나까하시 마사요시(中橋政吉) 저/금용명 역, 전근대 한국의 감옥과 행형, 교도소연구소, 2023년 6월 10일, 152쪽.
2) 나까하시 마사요시(中橋政吉) 저/금용명 역, 전게서, 152-157쪽.
3) ‌정철화(鄭哲和, 1878~1943)는 1908년 군대해산시에 일어났던 폭도의 주동자 중 한 사람이다(나까하시 마사요시(中橋政吉) 저/금용명 역, 전게서, 210-213쪽).
〈참고 문헌〉
•‌나까하시 마사요시(中橋政吉) 저/금용명 역, 전근대 한국의 감옥과 행형, 교도소연구소, 2023년 6월 10일
•‌광주교도소, 광주교도소사, 2014년 12월 23일
•‌일본국회도서관 소장, 광주형무소 요람, 1937년
•‌금용명 역, 조선형무소사진첩(1924년), 2022년 12월, 교도소연구소
•‌금용명 역, 조선의 행형제도(1936년), 2021년
•‌금용명 역, 조선형무소 연혁(연도미상),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