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태희 대한민국 재향 교정동우회장, 전 교정본부장
전사란 무기를 들어 전장에서 싸우는 자를 일컬었으니, 그들의 여정에서 죽음이야 어차피 친숙한 동반자일 것이었다. 그러나 죽는 게 두렵지 않은 삶은 없을 터, 누가 감히 전사가 되어 스스로의 삶을 그렇듯 초개같이 떠나보낼 수 있었던가. 가파르고 험난했던 역사의 격랑에 무릎 꿇지 아니하고 생의 어두워져 가는 저녁, 마지막 한숨마저 그렇듯 비장한 울림으로 포효하고 떠난 교정의 전사들은 대체 누구였던가.
1950년 6월 25일 천인공노할 북괴군의 남침으로 나라의 존망이 위태로웠을 때, 분연히 맞서 싸운 제복의 전사들이 있었으니 군인, 경찰관, 교도관이었다. 평시라면 각자에게 주어진 본연의 업무에만 전념했을 것이로되, 그러나 전쟁은 제복을 입고 총을 든 모든 이를 전사로 불러 그 등을 밀었었다.
일선이 삽시에 무너지고, 종전 시까지 후방에는 빨치산들이 들끓었으니 전선은 전후방이 따로 없을 듯싶었다. 후방 도처에서 준동하던 빨치산들이 경찰서와 교도소를 표적 삼아 상시 기습을 일삼으니 그 전투의 상흔들이 적지 아니했다.
심지어 개성형무소의 경우, 개성 시내가 적들의 수중에 떨어지고 적의 선봉이 이미 포천과 동두천까지 진출한 시점까지도 소개 지시를 받지 못하여, 적의 정규군에 포위된 채 장장 10시간을 사투했고, 종래 소장이 자결, 산화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었다.
아프지만, 그러나 기품을 담은 죽음이었다.
소강과 격화를 거듭하던 길고 오랜 전쟁이 멈춘 후, 전사들의 충의와 넋을 위로하고 그 삶과 성취를 잊지 않고 남기고자 전적지 등 곳곳에 충혼탑이 세워졌다. 살아남은 자들의 당연한 의무였다.
그러나 전사의 일원이었음에도 교도관에게는 떠난 이들의 이름과 영혼을 품고 새길 작은 터 하나가 쉽게 주어지지 않았으니, 가슴을 후비는 찬 바람과 마음에 이는 앙금을 감당하기가 못내 힘이 들었었다.
잊혀진 듯한 그 아쉬움을 보듬고자, 그나마 청계산 자락 서울구치소 한구석에 6.25 때 산화한 개성형무소장의 흉상 하나 작게 만들어 세워 놓고, 현충일이면 전현직 교도관들 몇몇이 모여 산화한 영혼들의 이름을 불러 깨우곤 했었다. 그리하여 떠났지만 다시 돌아와 가슴에 와닿는 뜨거운 것들, 그토록 많은 소멸을 뒤로하고도 두 눈 붉게 뜨고 다가와 포옹해 오는 것들과 조우하곤 했으니, 이름하여 교정혼이었다.
돌이켜 보노라면, 참전용사들에 대한 국가의 참전 수당이 지급될 시점에도, 당시 생존해 있던 365명의 6.25 참전 교도관들이 증빙자료 부실 등의 이유로 혜택을 받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었었다.
누군가 살뜰히 챙기지 않았더라면 그마저 놓쳐버리고 말았을 것을, 다행히도 그 피흘린 삶의 흔적들을 꼼꼼히 챙겨 관계부처에 제기함으로써, 오늘날까지 그 수당을 받기에 이르게 한 교도관이 한 명 있었으니, 선배들을 향한 그의 따뜻한 마음과 헌신이 마냥 눈부실 따름이다.
견디고 이겨내면 결국 봄은 온다고 하던가, 오늘에 이르러 교정본부의 노력과 장관님의 특별한 관심에 힘입어 드디어 교정 충혼탑이 남부교도소 인근에 모양 좋게 세워지기에 이르니, 가슴 먹먹한 감동을 감추기가 쉽지 않다. 풀지 못한 응어리를 가슴에 안고 긴 세월 떠돌아 온 전사들의 영혼이, 늦게나마 그 무게에 걸맞은 안식의 터를 찾고 자리함이 참으로 감회롭기 그지없을 따름이다.
존재로서의 가장 큰 슬픔은 잊히는 것이다. 역사가 현재를 비추고 미래의 길을 제시하는 거울이라 했거니, 그것은 곧 오늘 이 탑에 선배 전사들의 삶과 성취를 잊지 않고 남겨 두며 기억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깊이 그 이름들을 새기고, 소리 높혀 그 영혼들의 이름을 불러 주어야 할 까닭이기도 하다.
오늘 이 충혼탑에 늦게나마 교정전사들의 혼이 모이고 불멸의 역사로 조명받기에 이르니, 교정의 등대처럼 그 빛이 향하는 바를 뒤따름에 무얼 주저하리오. 비록 늦었지만 위대한 발걸음이다.
교정의 의연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