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꺼이 들어선 교정위원의 길
해남교도소와 박혁 교정위원의 인연은 해남교도소가 개청한 2010년에 움텄다. 평소 우리 사회의 사각지대에서 다방면으로 봉사활동을 펼치며 수용자 교정교화에 관심을 두었던 그였기에 해남교도소 교정위원으로 활동해 달라는 주변의 권유를 흔쾌히 받아들였고, 12년여 동안 누구보다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사실 교정위원을 포함한 여러 봉사활동을 하게 된 데에는 몇 가지 계기가 있습니다. 저는 1980년부터 5년간 서울 강남소방서에서 소방관으로 근무했습니다. 당시 응급 구조와 화재 진압을 하면서 어려움에 맞닥뜨린 사람들을 많이 봤는데요. 망연자실한 그들을 위해 봉사하는 얼굴 없는 천사들을 보며 봉사활동의 가치를 느꼈습니다. 이후에는 고향에 내려와 1990년부터 무등일보 기자로 활동했는데요. 다양한 사건을 취재하던 중 죄를 짓고 교도소에 입소한 수용자들을 만나며 이들에게도 적절한 도움과 온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다만 이렇다 할 기회가 없어 활동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해남교도소가 문을 열면서 교정위원으로 활동할 수 있게 돼 내심 기뻤던 기억이 납니다.(웃음)”
바랐던 일을 하게 된 만큼, 그는 지금껏 교정협의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의 중심에 서 있었다. 기댈 곳이 없는 무의탁 수용자들과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심층 상담을 진행했고, 형편이 어려운 수용자들에게 생활지원금을 전달해 안정적인 수용 생활이 가능하도록 도왔다. 불우 수용자의 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하기도 했으며, 수용자 정서 순화 및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수용자 노래자랑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수용자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한 명의 인간입니다. 그렇기에 죗값을 치르는 일과 별개로 그들의 심신 안정을 불러오는 여러 활동도 병행해야 하는데요. 이것이 바로 교정위원회의 역할이라고 생각했고, 다른 교정위원들과 힘을 합쳐 부족하게나마 민간 차원에서의 교정교화 활동을 내실 있게 제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모두에게 중요한 출소자들의 삶
박혁 교정위원의 적극적이고 진심 어린 교정교화 활동은 그를 교정협의회장으로 이끌었다. 2017년 3월 제4대 회장이 된 그는 내처 제5대 회장까지 지내며 4년간 해남교도소 교정협의회를 살뜰하게 책임졌다. 교정협의회 활동을 기획, 진행하며 늘 ‘내가 수용자라면 무엇이 가장 필요할까?’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졌고, 수용자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들을 지원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가끔 출소자들에게 연락이 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말과 함께, 교정협의회의 활동 덕분에 새로운 미래를 그리며 한결 수월하게 수용 생활을 마칠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뿌듯합니다. 어떤 분들은 ‘위원님처럼 이웃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기도 하는데요. 그럴 때마다 교정교화의 힘이 대단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며 더 열심히 움직여야겠다고 다짐합니다.”
박혁 교정위원은 ‘죄를 뉘우치고 심신의 건강을 증진하는 수용 생활’ 못지않게 ‘수용자의 출소 후 인생’에도 큰 관심을 두고 있다. 하지만 아직 출소자 사회복귀와 자립을 위한 지원은 다소 미흡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벗어나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을 ‘사회 초년생’이라고 부르며 여러 가지로 배려합니다. 출소자들도 지난 잘못을 뉘우치고 제2의 인생을 살기 위해 새로운 마음으로 세상에 나섰다는 점에서 사회 초년생과 다를 바 없습니다. 출소자들이 다시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일상에 무사히 안착하는 것이 곧 우리 사회의 안정과 직결되는 문제인 만큼, 출소 후의 삶에 대해 유·무형적 지원책을 더욱 폭넓게 마련해야 한다고 봅니다. 저도 앞으로 이러한 쪽으로 더 큰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누군가 나를 도우면 나도 누군가를 돕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든다. 박혁 교정위원은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굳게 믿으며 수용자들의 교정교화에 나선다. 그들이 출소 후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거듭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말하는 그에게서 4월의 봄날 같은 포근한 심성이 물씬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