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가 연 한국 드라마의 신세계
대중문화 콘텐츠는 플랫폼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KBS, MBC가 이끌던 지상파 시절에 가족드라마가 많이 만들어지고 또 인기도 끌었던 건 그 플랫폼과 관련이 있다. 매스미디어로서 지상파가 국가 홍보나 공보의 역할을 했던 그 시기, 우리가 콘텐츠를 접하는 풍경은 대체로 온 가족이 둘러앉아 함께 식사하며 TV를 보는 모습이었다. 즉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국가가 주도했던 가족주의 시대와 지상파 플랫폼은 같은 시대를 풍미했다. 하지만 1990년대부터 PC통신을 거쳐 인터넷이 생겨나 2000년대를 넘어서 이른바 디지털, 모바일 시대가 도래하면서 가족드라마는 서서히 줄어들었고 최근에는 ‘KBS 주말드라마’를 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이렇게 된 건 사회가 가족주의 시대에서 점점 개인주의 시대로 이행했기 때문인데, 여기에는 인터넷과 모바일 같은 새로운 매체가 영향을 미쳤다. 이제 가족 구성원들은 한자리에 모여 TV로 한 프로그램을 함께 보기보다는, 각자 자기 방에서 자신의 개인미디어(컴퓨터, 모바일, 태블릿 등)로 자신이 원하는 방송을 찾아보는 시대로 들어섰다. 이 개인주의 시대가 요구하는 콘텐츠는 좀 더 개인의 삶에 맞춰진 것들이다. 드라마로 치면 ‘장르물’처럼 가정 대신 일터가, 가족 대신 직장 동료를 다루는 콘텐츠가 요구된 것이다.
이런 변화 속에서 최근 콘텐츠 소비의 새로운 플랫폼으로 떠오르는 게 바로 OTT다. 개인화된 서비스로 초기화면이 구독자의 취향에 맞게 제공되는 플랫폼은 이제 지상파, 케이블, 종편으로 불리던 플랫폼을 레거시 미디어로 만들면서 이 시대의 주력 플랫폼으로 급성장했다. 넷플릭스는 이 과정에서 기존 레거시 미디어들이 그 플랫폼의 한계 때문에 시도하지 못했지만, 이미 해외의 장르들까지 경험하며 요구하기 시작한 콘텐츠를 선보였다. 예를 들어 김은희 작가가 쓴 <킹덤> 같은 드라마는 기존 미디어들이 제작 편성에 난색을 보였던 작품이지만, 넷플릭스는 단 한 줄의 설명만으로 제작을 확정했다. 그것은 ‘조선시대 좀비물’이라는 설명이다. 좀비 장르는 신체가 절단되기도 하는 등 수위 높은 장면이 나올 수밖에 없고, 나아가 마니아들만 소비한다는 편견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한국드라마에서 시도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넷플릭스는 세계적인 플랫폼인데다 <워킹데드> 같은 좀비물 마니아를 구독자로 확보하고 있어 <킹덤>이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조선시대’라는 차별성이 분명한 시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좀비들과의 사투라니! 한국드라마는 새로운 플랫폼을 만나면서 신세계를 열었다.
어라, 외국인들도 난리네?
넷플릭스는 전략적으로 그간 한국의 플랫폼들이 시도하지 못한 소재나 장르에 과감하게 투자했다. <인간수업> 같은 드라마는 청소년 성매매를 소재로 했는데, 그간 지상파 등에서 청소년을 소재로 하면 거의 천편일률적으로 나왔던 교육문제, 청춘멜로 같은 접근을 훌쩍 뛰어넘은 파격이었다. 사실상 청소년 성매매가 존재하고 그 문제가 심각한 수준이지만 외면해왔던 것을 정면으로 다룬 이 작품은 호평을 받았다. <스위트홈> 역시 한국드라마가 시도하지 않았던 크리처물이라는 장르를 가져와 세계적인 인기를 누렸고, 는 탈영병을 추적하는 임무를 가진 헌병 이야기로 역시 한국드라마가 다루지 않았던 군대 폭력에 대한 소재를 다뤄 화제가 됐다.
놀라운 건 이러한 본격 장르물에 한국의 색깔을 넣은 드라마가 국내만이 아닌 해외에서도 뜨거운 반응이 쏟아졌다는 점이다. <오징어게임>은 전 세계인들이 그 드라마 속 게임을 따라 할 정도로 신드롬을 일으켰고, <지옥>, <지금 우리 학교는> 같은 디스토피아를 그리는 작품들이 코로나19 팬데믹 상황과 맞아떨어지면서 호평과 인기를 누렸다. 그간 지상파 시대에 가족드라마, 사극, 멜로드라마가 주로 만들어졌던 것에서 이제 OTT라는 플랫폼은 본격 장르물을 쏟아내며 이른바 ‘K드라마’의 외연을 확장했다. 여전히 <사랑의 불시착> 같은 멜로드라마가 OTT를 타고 일본에서 신드롬을 일으켰지만, 이와 동시에 <지금 우리 학교는> 같은 학교를 배경으로 하는 좀비 장르가 인기를 구가하는 시대로 들어선 것이다.
초국적인 취향 공동체의 탄생
넷플릭스가 본격적으로 연 OTT 시대는 이제 티빙, 웨이브, 왓챠, 쿠팡플레이 같은 토종 OTT가 대거 진입해 자리를 잡아가고 있고, 여기에 디즈니플러스, 애플TV 같은 글로벌 OTT가 한국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춘추전국시대를 열고 있다. 기존 지상파 시절 TV를 통해 한 방향으로 콘텐츠가 제공되던 시절에는 드라마들도 ‘보편성’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남녀노소가 모두 한 자리에서 소비할 수 있을 만큼 보편적인 소재와 표현 수위를 담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독 개념으로 구독자의 취향을 읽어내 거기에 맞는 콘텐츠를 제안하는 OTT의 플랫폼 특성은 ‘보편성’보다는 여러 개개인의 취향대로 골라볼 수 있는 ‘다양성’이 중요해졌다. 좀비물 같은 한때는 일부 마니아들의 장르로 치부되던 것들이 OTT에서는 ‘취향이 확실한’ 콘텐츠가 되는 이유다. 마니아라는 개념도 한 국가 내에서는 소수지만, 글로벌로 보면 그 저변이 넓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취향이 확실한 이들은 저 스스로 입소문을 내며 타인들도 소비에 끌어들이기 마련이었다.
OTT 시대에는 그래서 국가, 언어, 나이, 성별 같은 것들이 콘텐츠 소비를 가르는 절대적인 기준이 되지는 않는다. 한국에서 20대 남성이 좋아하는 콘텐츠를 남미의 60대 여성이 좋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오징어게임>으로 경험했듯이 OTT 드라마들은 그 비슷한 취향을 통해 국가를 뛰어넘는 초국적인 공동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새로운 플랫폼이 과거와는 새로운 드라마들을 만들어내고, 그 드라마들이 국가를 뛰어넘는 취향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것. 이것이 지금 OTT를 통해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