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관 출신 1호 유튜버
박일환 전 대법관은 1978년 서울민사지법 판사를 시작으로 법조계에 발을 들였다. 2006년 최종심의 판결을 내리는 대법원의 대법관에 임명돼 2012년 퇴임하기까지 무려 35년간 법복을 입었다. 퇴임 후에도 변호사로 포지션을 변경했을 뿐 법조인의 삶은 계속됐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법조인으로서 활동 영역이 더 넓어졌다. 법을 매개로 세상과 좀 더 자유롭고 다양하게 소통하는 전환점을 맞은 까닭. ‘대법관 출신 1호 유튜버’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통해서였다.
“은퇴 후에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하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35년에 걸친 법관 생활을 정리하고, 그간의 판례를 토대로 사람들에게 법률적인 조언을 건네는 책을 쓸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제 말을 들은 딸의 권유로 유튜브에 도전하게 됐죠.”
2018년 12월에 유튜브 채널을 열었지만, 구독자들이 반응하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특히 처음 서너 달은 조회 수 변동조차 없다시피 해 그만둘 생각도 했다고. 이후 언론 매체와의 인터뷰와 tvN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하면서 구독자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구독자 수 10만 명 달성 시 부여되는 실버 버튼까지 획득했다. 맨 처음 구독자 수 1,000명을 목표로 삼았던 그의 채널은 어느새 13만 7,000여 명의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다(2021년 12월 30일 기준).
“유튜브 채널에는 제 이름 대신 ‘차산선생법률상식’이란 타이틀을 붙였어요. ‘차산’은 고등학생 때 한시를 가르쳐주던 할아버지가 붙여 주신 호예요. ‘그냥 저 산’, ‘동네에 있는 평범함 산’이라는 의미처럼 부담 없이 편안하게 찾아주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죠. 콘텐츠 또한 어렵고 거창한 법률보다는 가족, 재산, 의료, 취미, 산재 등 일상생활에서 일어날 법한 사례 중심의 법률 상식을 한 달에 3~4번 업로드하고 있습니다.”
법을 매개로 사람들과 소통하는 이유
박일환 전 대법관은 유튜브 채널에 업로드할 콘텐츠 아이디어를 주로 과거 재판한 판례에서 찾는다. 최근 부각하는 사회적 이슈 중에서 일상생활과 밀접한 판례가 나오면 발 빠르게 그와 관련한 법률을 다루기도 한다.
그의 채널이 꾸준한 관심 속에 구독자 수를 늘려 나가는 데는 전직 대법관에서 오는 묵직한 신뢰에, ‘차산’이라는 호에 어울리는 푸근하고 따뜻한 인상과 말투, 여기에 생활밀착형 법률 상식이라는 콘텐츠가 조화를 이룬 결과인 것. 실제로 그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사람들이 법률을 제대로 이해함으로써 예기치 못한 법률 문제에 부딪혔을 때 당황하지 않고 현명하게 대처했으면 하는 바람이 가장 크다고 말한다. 그래서 일상생활 관련 법률 상식을 다루는 것으로 친밀감을 높이는 한편 단순히 관련 법률을 알려 주는 데 그치지 않고, 문제점과 해결 방향을 제시해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계기를 유도한다. 오랜 법관 생활 동안 종종 체감했던, 재판 후 좀 더 첨예하게 벌어지는 양형과 국민 정서 사이의 괴리를 좁히고자 하는 바람도 내비쳤다.
“판사는 법대로 재판을 하지만, 국민 체감상 형이 지나치게 낮다고 느끼는 경우가 있어요. 여기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은 다행히 국회에서 법을 개정했지만, 형법을 만들었던 50여 년 전에는 평균수명이 지금보다 훨씬 낮았어요. 그때 기준으로 10, 20년 형은 결코 가볍지 않았지만, 상황이 많이 달라진 지금, 예전 기준의 양형은 국민 정서에 부합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죠. 이처럼 법률 저변의 사정을 알려 재판에 대한 공감을 얻고, 시대에 맞는 법률 개정으로 국민 정서에 맞아떨어지는 재판이 이뤄지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처럼 경험을 토대로 법률 관련 지식을 나누려는 취지로 시작했지만, 일방적인 전달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은 아니다. 댓글로 올라오는 구독자들의 반응과 궁금증을 통해 새로운 이슈를 감지하며, 현역 법조인으로서 우리 사회에 대한 관심의 폭을 넓혀 나가는 동력으로 삼는 것이다.
영상재판, 간이한 소송 처리에 편리한 재판방식
그 연장선에서 박일환 전 대법관은 지난해 11월 18일 개정 민·형사소송법 시행일에 맞춰 전면 실시한 전국 교정기관 영상 재판도 우리 사회의 새로운 변화 중 하나로 눈여겨보고 있다. 그동안 교정시설 수용자는 소송의 당사자나 증인 자격으로 재판에 참여하기 위해 교정공무원의 계호 아래 직접 공판정에 출석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보호 장비 착용에 따른 심리적 위축을 비롯해 장거리 호송으로 인한 인권 침해와 출석 포기 등 국민의 재판받을 권리 보장에 미흡하다는 지적이 따랐다.
최근에는 코로나19로 인해 재판이 지연되는 사례가 늘면서 수용자뿐만 아니라 사건과 관련된 국민의 불편까지 가중됐다. 영상 재판은 법원에 직접 출석하지 않고 원격 영상 재판 시스템에 접속해 재판받을 수 있어 이러한 문제점을 상당 부분 해소할 것으로 보인다. 전직 대법관 출신 변호사인 그는 전국 교정시설의 영상 재판 본격화를 어떻게 바라볼까.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수용자 인권 보호나 재판받을 권리 보장 면에서는 긍정적으로 작용하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모든 재판에 적용하기는 어렵고, 간이공판절차 등 비교적 간단한 소송을 처리하는 데 편리한 방식이라 보고요. 모든 국민은 공개 재판받을 권리가 있다고 헌법에 명시된 만큼 영상 재판 활성화를 위해서는 관련 법 개정 등의 노력이 병행돼야 할 겁니다.”
얼마 전 그는 전 대법관과 변호사, 유튜버에 이어 작가라는 새로운 정체성 하나를 추가했다. 퇴임 직후 첫 계획으로 삼았다가 유튜브로 대체했던 책 발행을 마침내 이뤄 낸 것. 〈슬기로운 생활법률〉은 제목처럼 일반 사람들이 법률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자 펴냈다. 법관으로서의 오랜 경험과 여기에 덧대어진 변호사 활동, 무엇보다 유튜버로서 사람들의 생생한 궁금증과 고민을 접한 경험을 담았다.
“요즘엔 사람들이 계획을 물으면 ‘다 이뤘다’고 말합니다. 법조인으로서도, 은퇴 이후 계획한 바도 정말 다 이뤘거든요. 앞으로는 무언가를 새로 계획하기보다는 변호사이자 유튜버로 살아가는 현재의 삶에 집중할 생각입니다.”
평생 법조계에만 몸담았다가 문화계로 진출했다는 너스레로 삶이 그만큼 풍성해졌음을 말하는 그는 덕분에 이전에 몰랐던 재미를 알아가는 중이라며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