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27일 교정본부 의료과로부터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아프가니스탄 특별기여자 약 400명이 코로나 때문에 공무원인재개발원에 격리되어 있는데 그중에 100명 정도의 어린이가 있다고 하였다. 격리 기간 2주 동안에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외부병원 진료를 나갈 수 없기에 그동안 그 어린이들을 진료할 소아청소년과 전문의가 필요한데 내가 적임자라고 하였다.
갑작스러운 제안이었으나 법무부에서 관심이 많고, 나도 국내외 의료봉사를 많이 하였기에 아프간 어린이라는 특별한 환자들에 관심이 생겼다. 그래서 8월 30일 오전에 대구에서 진천까지 220km를 운전하여 인재개발원에 도착하였는데 거기에는 이미 진료를 위한 의료팀이 구성되어 열심히 활동하고 있었다. 현직 내과 군의관 2명, 법무부 소속 공중보건의 2명, 그리고 국군 간호장교와 교정본부 산하의 간호사 교도관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여 경찰이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었고, 구급차도 상시 대기하고 있었다. 개발원 외부 곳곳에는 진천군민들이 아프간 사람들과 고통을 함께 하겠다는 영어와 아랍어로 된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도착 첫날 내과 군의관과 간호장교 그리고 아프간어 통역을 대동하고 진료가 필요한 어린이들이 거주하는 방을 일일이 방문하였다. 이들 중에 코로나 확진자도 있었기에 얼굴부터 발끝까지 레벨 D 방호복으로 완전 무장을 하였다.
통역이 환자가 있는 방을 노크하니 가족들이 문 앞으로 몰려왔다. 내가 처음으로 대하는 아프간 사람들이었다. 통역이 어른들과 이야기 하는 동안 아이들이 신기한 눈초리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루종일 바깥에 나가지 못하는 생활을 하다 보니 외부인의 방문이 반가울 수밖에 없다. 주로 감기 증상이 많았다. 내가 통역사를 통하여 기침, 열, 콧물 등이 있는지, 그런 증상이 언제부터 나타났는지를 물어보고 핸드폰의 라이트를 이용하여 입속을 살펴보았다. 약을 처방하고 행여 열이나 기침이 심해지면 연락하라고 하였다. 방호복을 입고 있었기에 청진기를 사용할 수가 없어 매우 불편하였다.
특별기여자 중에는 의사, 치과의사, 외교관 등 그 나라의 상류층도 있었지만 아프간 주재 우리나라 기관의 식당이나 경비 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프간어 통역을 통하여 증상을 묻고 설명을 하다 보니 어린이 한 명을 진료하는데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였다. 그리고 8월 말경이라 아직도 더운 날씨여서 방호복을 입고 10여 명을 진료하는 동안 몸은 땀으로 흥건히 적셔졌다.
특히 아프간은 이슬람 국가이므로 남자가 여자의 몸을 직접 볼 수 없기에 여자 어린이의 다리에 생긴 피부 질환도 남자 의사인 내가 직접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여자 간호장교가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서 내가 사진으로 보고 진찰을 해야 하는 해프닝도 생겼다. 그중에는 소아과 환자 이외에 임신부도 있었고, 출산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산후조리가 필요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 외에 심장병과 콩팥에 문제가 있는 환자 등 다양한 환자들이 있었다.
진천 개발원에서 계속 도시락으로 세끼 밥을 먹고 교육생들이 자는 방에서 잠을 자며 주말까지 보냈다. 소아 환자가 많지 않았으나 아프간과 한국의 기후 차이로 감기 증상이 많았고 때로 폐렴이 의심되는 환자도 있었다.
금요일까지 진료를 마치고 청송으로 돌아오면서 생각하니 2주 격리 중 아직 1주일이 남았는데 내가 없으면 어린이 진료를 어찌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의료계의 인맥을 동원하여 충청북도 의사회장과 진천군 혁신도시의 소아청소년과 개원 원장과 접촉을 하여 앞으로 남은 1주일 동안 문제가 생기면 소아청소년과 의사가 방문 진료를 해주는 시스템까지 만들어 주었다. 나의 자발적인 생각과 노력으로 왕진 시스템이 만들어진 것에 대하여 법무부로부터 과분한 격려의 말을 들었다.
나름대로 아프간에서 잘 살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나라를 잃고 타국으로 탈출한 심정이 어떠했을까? 내가 만일 이들과 같은 상황이 되면 어찌할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니 섬뜩하였다. 그러나 내가 만난 아프간 사람들의 표정은 비교적 밝아 보였다. 지긋지긋한 전쟁터를 벗어났다는 안도감일지, 아니면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왔다는 기대감일지?
TV에 나오는 황량한 산악지대와 전쟁으로 폐허가 된 모습 이외에 솔직히 아프간에 대하여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아프간 사람들을 진료하게 되었으니 의무관 10년에 정말 특별한 경험이었다. 우리의 일반적인 개념으로 볼 때 가장 위험하고 살기 어려운 나라가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아프리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번에 아프간 어린이를 진료함으로서 그 세 곳 모두 인연을 맺게 되었다.
2003년 5월 이라크 전쟁이 끝나고 한 달도 되지 않은 위험천만한 시기에 범의료계 이라크 의료봉사단의 단장으로 이라크 바그다드에 10일 동안 의료봉사를 다녀왔다. 인천에서 두바이와 요르단 수도 암만을 거쳐 시리아 사막 950km를 차량을 이용하여 바그다드까지 갔다 왔는데 지금 생각하면 꿈만 같다. 그 위험하고 먼 길을 겁도 없이 가다니, 용기인지 어리석음이었는지?
이라크 의료봉사를 turning point로 조금은 봉사적이고 자유로운 의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2004년에는 ‘원장 없어 발 동동’이라는 신문 기사를 보고 6개월이나 공석으로 있던 울릉군보건의료원장에 자원하여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에서 4년을 살았고, 정년퇴임 후 아프리카 케냐와 말라위에서 의료봉사도 하였다. 그리고 이제 12월이면 청송의 의무관으로 10년이 된다. 비록 위험하고 힘들었지만 지난 18년 동안 전형적인 의사의 길을 벗어나 변주곡을 연주하는 것처럼 살았다, 더 보람 있고 더 재미있다고 생각하면서.
슈바이처, 테레사 수녀, 그리고 우리나라 이태석 신부님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인류에 봉사하는 성인들도 있지만 보통 사람들이 그렇게 살기는 어렵다. 그러나 즐겁게 자신의 삶을 살면서도 여유나 여력이 생겼을 때 봉사적인 일을 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이런 생활 속의 봉사, 그리고 내가 조금 힘들지라도 남에게는 큰 도움이 되는 일이 있으면 기꺼이 해주자는 것이 나의 생활철학이다. 수입이 많고 빛나는 자리에는 의사들이 넘쳐나고 낙도나 교도소 같은 어렵고 힘든 곳에는 의사가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나는 이번에 의무관 근무 10년 만에 뜻하지 않게 아프가니스탄 어린이를 진료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프리카와 이라크를 포함한 3대 위험지역 사람들을 진료한 특별한 경험을 가진 의사가 될 수 있었다.
앞으로도 기회가 된다면 화려하고 빛나지 않더라도 봉사적인 의미가 있는 일을 하는 의사로 남고 싶다. 스스로가 만족하는 삶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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