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과 무관심의 차이, 분별력
관심이 생기고, 또 무관심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기호나 취향, 애호나 애착은 모두 이 두 마음에서 빚어진다. 자연스레 관심이 가는 일이 있는 반면, 아무리 접해도 좀처럼 관심이 생기지 않는 일도 있다. 때로는 싫거나 혐오스러운 일까지도 생긴다. 정보가 넘치는 현대사회, 우리는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 달라는 많은 사물, 사람들과 마주한다. 어쩌면 우리는 무관심을 삶의 도구로, 방어막으로 활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질 수 없는 노릇이고, 가져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일에 관심을 둔다면 시간과 에너지가 금세 소진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분별력, 분별심이다. 내 삶에 도움이 될 것에 관심을 갖고, 내 삶을 망가뜨리는 것, 혹은 나와 큰 상관이 없는 것에는 무관심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는 분별력을 잃고 관심이 필요한 대상에는 무관심해지고, 무관심해져야 할 대상에는 계속 마음을 뺏긴다. 그래서 진지한 인생에서는 삶을 풍요롭게 할 만한 것을 찾아내, 관심 가질 수 있는 분별력이 필요한 것이다.
때로 무관심은 병일 수 있다
도시에서 삶의 8할은 무관심이 지배한다. 도시의 삶을 동경하는 또 다른 이유는 지나친 간섭과 관심에서 벗어나 자연스레 무관심 상태로 들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극도로 관심을 받지 못하는 삶은 고독하며, 때로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한편으로 관심 갖기나, 관심 받기를 두려워한다. 관심을 주거나 관심을 받는 일에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기에 의도적으로 무관심을 즐기고 이를 유지하는 사람도 많다. 우리의 관심이 그저 매스미디어 속 모르는 사람 정도에나 향할 뿐, 주변 사람이나 사물들에는 좀처럼 뻗어가지 못하는 것은 그런 걱정과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나친 무관심은 마음의 병일 수 있다. 무관심(indifference)은 어떤 사물이나 사람에게 관심이나 애정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하지만 무관심이 자기 삶을 지배한다면 혹시 무기력이나 희망 없음(hopelessness)의 징후가 아닌지 의심해 봐야 한다. 매사에 열정을 느낄 수 없는 마음, 우울이나 비관이 무관심을 유발하는지도 모르는 까닭이다. 사실 건강한 무관심은 어려운 일이며, 오히려 적절한 관심과 애정만이 건강한 영혼을 유지하는 자양분이 될 수 있다.
건강한 관심의 원동력, 포용력과 개방성
철학에서는 건강한 무관심을 무심(無心)이라고 말한다. 무심과 무관심은 다른 말이다. 무심은 큰 의도 없이 대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무심은 오랜 수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높은 경지의 정신이다. 대상을 무심하게 바라보고, 대하는 태도는 오히려 대상을 편견 없이 더 잘 이해하고, 통찰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관심은 다르다. 부정적인 생각이나 감정이 무관심을 조장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나 사안에 무관심해지는 이유는 그것이 싫거나 내 삶을 방해해서, 혹은 혐오나 미움 같은 심리적 거리낌 때문일 때가 많다. 무관심의 대부분은 ‘의도적 무관심’인 것이다. 어느 날 그것이 내게 부정적인 생각이나 감정을 일으켰기에 의도적으로 무관심의 ‘스탠스(stance,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어쩌면 내 안에 무관심이 많은 것은 부정적인 생각이나 마음이 많음을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혐오나 증오 같은 심한 거리낌까지는 아니라도 상대에 대해 마음의 문을 단단히 닫고 있는 것이 원인인지도 모른다.
이런 부정적 무관심을 치유할 수 있는 마음이 포용력과 개방성이다. 현대사회를 ‘혐오사회’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혐오사회를 만들고, 또 퍼뜨리는 것은 나와 너, 혹은 그것들을 분리하고 차별하는 편견이나 선입견이다. 이런 배타성이 들어차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마음을 열고 상대를 끌어안는 포용력이 필요하다. 프랑스어 톨레랑스(tolérance)는 관용, 아량, 포용력을 뜻한다. 이는 인류의 정신적 전통이자 미덕이다. 톨레랑스는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자유와 다른 사람의 정치적·종교적 의견의 자유에 대한 존중을 의미한다. 자기 생각에만 갇히지 말고, 타인을 향해 마음을 열고, 그 사람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다. 또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쩌면 이는 혐오와 차별이 넘쳐 나는 현대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덕목일 것이다.
관심, 포용력을 넘어서는 연민과 공감
천재 문학가 오스카 와일드는 최저의 삶을 산 것으로 악명이 높다. 그는 심지어 미성년자와 동성연애를 한 혐의로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다. 그런 그가 남긴 아름다운 동화가 <행복한 왕자>다. 이 작품은 마치 자기 삶을 참회하는 것으로도 읽힌다. 이 동화에서 주인공인 왕자는 죽은 후 동상이 돼서야 비로소 인간의 진실을 깨닫는다. 동상이 된 왕자는 곁에 머물던 제비에게 자신의 동상을 꾸미고 있는 보석을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에게 나눠 주게 하고, 끝내는 볼품없는 흉물이 된다. 행복은 나눔임을 깨닫게 하는 줄거리다. 동화 중반에는 눈물의 의미에 대한 감동적인 장면이 나온다. 왕자가 심부름에 지친 제비에게 답했다.
“내가 살아 있으며 인간의 심장을 가지고 있을 때는 눈물이 무엇인지 몰랐단다. 항상 슬픔이 침범할 수 없는 성에 갇힌 채 살았기 때문이지. 낮에는 정원에서 친구들과 뛰놀고, 저녁에는 파티에서 춤을 췄지. 성은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나는 담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도통 알지 못했어. 그런 나를 사람들은 ‘행복한 왕자’라고 불렀단다. 난 그저 행복이란 기쁨이라 여겼지. 내가 죽고, 사람들은 나를 동상으로 만들어 여기에 높다랗게 세워 놓았어. 이곳에서 난 도시의 비루함과 불쌍한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었지. 비록 내 심장은 납으로 만들어져 있지만, 그래서 이렇게 눈물을 멈출 수 없는 것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