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이- 삐이-”. 나에게 생각지 못한 ‘이명(耳鳴)’이 찾아왔다. 한가한 주말 아침이었다.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데, 밖에서 사다리차 소리가 났다. 아내에게 “우리 아파트에 누가 이사 오나 봐? 한동안 조용했는데…” 했더니 무슨 소리냐고 되묻는다. “지금 사다리 올라가는 소리 안 들려?” 했더니 “아침부터 무슨 생뚱맞은 소리야?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라며 황당해 한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베란다 창문을 열고 밖을 살폈다. 세상의 아침은 너무나 고요했다. 다시 집중해 들어 보니 내 귀에만 들리는 소리, 바로 ‘이명’이라는 불청객이었다.
얼마 전 유튜브에서 50세를 ‘반백 살’이라고 재미있게 표현하기에 따라 웃었던 기억이 있다. 50세와 반백 살은 같은 나이를 표현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확연히 다른 느낌이 난다. 왠지 더 오래 산 느낌이랄까? 난 아직 50세도 안 됐는데, 이렇게 뜬금없이 이명이라니….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문뜩 어머니께서 이명으로 약을 드셨던 것이 생각나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께서는 대수롭지 않게 말씀하셨다. 어머니도 지금의 내 나이 즈음해서 들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고쳐 보려 음악을 크게 들어 보고, 귀가 아프도록 잡아당기거나 비벼 보기도 하고, 약도 먹어 봤는데 이명에 신경 쓰면 쓸수록 스트레스만 커졌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받아들이고 친구처럼 산다고 하신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나는 이명이 ‘뚜우~’ 하고 들리는데 ‘뚜우~’ 소리가 나면, 몸이 나에게 지금 힘드니 영양 보충 좀 하라고 알려 주는 반가운 소리로 알고, 맛있는 것 먹고 쉬면 어느새 좋아지더라. 그러니 너도 친구라 생각하고 받아들이면 괜찮아질 것이다”라고 하셨다.
어머니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명이라는 낯선 친구를 받아들이기가 너무 어려웠다. 일단 병원을 찾아갔다. 의사의 권유로 청력검사를 했는데, 결과는 고음역대가 안 들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명은 어쩔 수 없는 노화의 과정이고, 그럴 나이가 됐으니 이제부터 건강관리에 신경 써야 한다고 말했다. 청천벽력 같은 얘기였다. 나는 아직 젊다고만 생각했는데….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것을 하나 꼽으라면 바로 시간이 아닐까? 특별히 누구에게만 더 빠르고 또는 더 느리게 가는 법이 없으니 말이다. 그동안 나는 나름 건강하고, 아직까지는 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돌아보니 어느새 아이들도 많이 컸고, 얼굴에 주름살도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 받아들이자. 그리고 받아들인 김에 진정한 나의 오랜 숙적인 혈압까지 받아주자’라고 결심했다. 그래서 내과에도 방문해 혈압약 처방을 받으려다 뜻밖의 얘기를 들었다. 심장초음파를 마치고 결과를 설명해 주던 의사가 나에게 부정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부분까지 조절해 주는 혈압약으로 처방해야 한다며, 의사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선생님 같은 분은 옛날 같았으면 현재 나이쯤 돼서 아마 돌아가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당연히 오래 살 것처럼 몸을 함부로 학대하지 마세요.”
나는 ‘당연히’라는 단어가 ‘컥’ 하고 목에 걸렸다. “특별히 암이라든가 큰 사고만 겪지 않는다면 적어도 80세까지는 살 수 있지 않나요?”라고 했더니, “100세 시대를 살고 있는 요즘 사람들은 당연히 수명이 늘었다고 생각하는데, 현대 의학 기술과 약이 없다면 지금 죽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약 거르지 마시고, 체중 관리하고, 규칙적으로 운동하세요”라고 했다. 이어 “그러지 않으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수명은 사라질 것이고, 그때가 되고서야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달으실 거예요”라고 경고했다. 그러고는 죽을 때 깨달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고, 지금 깨달은 것이 좋지 않겠느냐며 웃었다.
너무나 황당했다. 의사라는 분이 어떻게 이런 도사 같은 말을 하나 싶었다. 그런데 얼마 후 수용자에게 “당연하다”는 말을 듣게 됐다. 하루는 수용동 근무를 하는데, 수용동 팀장님께서 “○○방 ○○○번은 배식할 때 주의하라”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점심 배식 때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이게 국이야, 물이야? 건더기 하나 없고, 국이면 당연히 건더기가 있어야지 이게 뭐냐? 배식도 건성으로 하고, 나를 무시하는 것 아니야?”라며 답변할 틈도 주지 않고, 수용동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계속 소리를 질렀다.
한참을 들어주다 잠시 주춤하기에, 알았으니 내 얘기도 들어보라 했다. “지금 음식이 당연한 것처럼 얘기하는데, 밥 한 그릇의 쌀도 어느 농부가 논에다 씨를 뿌리고 물을 줬고, 그 씨는 먼 태양으로부터 오는 햇빛을 받아 자랐어요. 농부는 이를 땀으로 보살피고 수확했고, 그 누군가가 그것을 취사장으로 옮겼으며, 취사장에서는 뜨거운 불을 다루며 조리했고, 도우미의 배식으로 이곳에 있는 것이에요. 모든 것이 그냥 당연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누군가의 땀과 정성으로 여기 있는 것이죠. 감사할 일 아닌가요? 그러니 음식을 대할 때는 어린아이처럼 투정 부릴 것이 아니라, 모름지기 어른이라면 음식 앞에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요? 나보다 인생을 더 사신 분 같은데 이러면 안 되는 것 아닌가요?” 했더니 결국 사과하며 요구 사항을 말하는 것이다. 평소 밖에서도 밥을 많이 먹는 편인데, 밥이 너무 적어 배가 고프니 앞으로 밥이라도 좀 더 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는 어른이면 어른답게 솔직하게 말하세요. 배식하고 남는 밥이 있으면 더 줄 것이니 도우미에게 윽박지르지 말고, 잘 대해 주세요” 하고 마무리를 지었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다.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결코 당연하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 나의 생명도 부모님의 사랑으로 태어난 것이고, 입고 있는 옷이며, 지금 누리고 있는 삶도 누군가의 정성과 노력 덕분이라는 것을…. 그러고 보니 자연스럽게 당연하다는 마음이 감사하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백 년도 못 살면서 천 년을 살 것처럼, 그리고 당연히 그럴 것처럼 행동한다. 마치 눈앞의 미끼만 보고 바늘은 보지 못하는 물고기처럼 말이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오로지 감사할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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