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우성(장흥교도소 교위)
최근 동고동락하던 선배님께서 명예퇴직을 하셨다. 선배님은 이제 조금 편히 쉴 수 있겠다고 너스레를 피우며 밝은 모습으로 직장을 떠나셨다. 힘들 때마다 격려해 주고 이끌어 주신 선배님이셨는데…. 사람이 들어간 자리는 티가 안 나지만 나간 자리는 티가 난다고 선배님의 빈자리가 유독 크게 느껴졌다. 그리고 은퇴하시는 선배님이 너무 부러웠다.
나는 언제쯤 가능할까? 요즘 들어 부쩍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정년까지 15년은 더 버텨야 하는데…. 견뎌 볼 생각을 하니, 15년이라는 세월의 무게가 태산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막막함이 밀려왔다. 나에게 정년은 필수 사항이고, 명예퇴직은 희망 사항이다. 외벌이로서 아이들 교육비와 집값, 그리고 노후 자금 등 점점 더 고민이 많아진다. 가능한 한 빠른 은퇴를 바라지만 그건 단순한 바람일 뿐이다. 그래서일까? 명예퇴직하신 선배님을 보면 무한한 존경심과 부러움이 가득하다.
사람은 어떨 때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까? 아마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 할 때가 아닐까? 그것도 어쩔 수 없이 말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격언처럼 순응하고 살면 괜찮을 것 같지만, 이런 삶이 계속 반복된다면? 우리의 자존감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특히 출근하자마자 개성 강한 수용자를 상대하는 감정 노동과 반복적인 야간 근무는 교도관에게 피할 수 없는 스트레스다. 코로나19 탓에 원하는 것을 못 하고, 원하지 않는 일을 해야 하는 작금의 현실이 내가 처한 상황과 비슷해 마음이 더욱 무거워진다.
반면 코로나 시대를 초월한 존재가 있으니, 바로 우리 집에 있는 두 딸들이다. 초등학생 딸들에게 코로나는, 인형 놀이에 쓰이는 다양한 에피소드 중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게다가 딸들은 코로나를 핑계로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은 맘대로 하고 있다. 날이면 날마다 펼쳐지는 인형 놀이, 술래잡기, 숨바꼭질 등…. 삼시 세끼 다른 반찬을 요구하는 이 녀석들을 보면서 육아야말로 엄청난 스트레스임을 새삼 느꼈다.
과거에는 매일같이 싸우고 큰소리치는 아내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아이들 엄마인데 좋은 말로 타이르면 좋지 않을까? 예쁜 말로 설명해 주면 이해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딸들과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육아가 극한의 스트레스임을 알게 됐다. 나도 모르는 사이 큰소리는 기본으로 장착하게 되고, 잦은 회유와 협박 사이를 줄타기하고 있다. 좋은 말로 달래고 또 달래다 안 되면, 불같은 화로 다스리는 내 모습을 보면서 아내가 새삼 대단해 보였다. 아니, 이 세상 모든 엄마가 위대하게 느껴졌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 1위가 ‘엄마’라는데 너무도 당연한 결과라 생각한다.
요즘 딸들의 인형 놀이 소재는 탐정 놀이가 주를 이룬다. 옆에서 가만히 들어 보자면 흥미진진하다. 한창 긴장감이 고조돼 사건이 미궁에 빠지다가도 결국에는 사건을 해결하고 인형 놀이의 대미를 장식하는 대사를 한다. “몸은 작아졌어도 두뇌는 그대로, 미궁에 빠지지 않는 명탐정! 언제나 진실은 하나!” 그리고 서로에게 “결정적 증거는 ○○○이다”라고 대화를 주고받으며 토론을 한다.
듣고 있자니 재미있게 노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지다가도,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온종일 놀고 있는 걸 보면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쉬며 “얘들아, 너희는 좋겠다. 아빠는 요즘 너무 힘들다. 식이 조절과 운동으로 혈압 관리를 하려 했는데 실패하고, 자격증 공부는 어려워 그만둘까 하는 생각도 들고, 날마다 살만 찌는 것도 싫다”라고 푸념을 했는데 딸들의 답변에 순간 못난이 아저씨가 되고 말았다.
“아빠,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봐. ‘실패했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도전했다는 증거고, ‘힘들다’는 것은 아빠가 그동안 열심히 했다는 증거고, ‘그만둘까’ 하는 것은 지금까지는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 아니야? 그리고 ‘살쪘다’는 것은 그동안 맛있는 것을 많이 먹었다는 결정적인 증거야. 어른이면 좀 긍정적으로 생각해 봐!”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건을 보면 진실은 언제나 하나다. 마치 불변의 진리와 같은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 덕분에 그 진실을 바라보는 것이 생각과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이어트에 실패했다는 것은 진실이다. 하지만 실패한 수많은 원인 중 맛있는 것을 많이 먹었다는 증거를 결정적인 이유로 본다면 그렇게 억울하지 않고, 덕분에 웃을 수 있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결정적 증거다!
내게 일어나는 일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결정적인 증거는 많을수록 그리고 빨리 찾을수록, 내게 일어났던 불행도 불쾌한 일도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다. 그렇다면 ‘결정적 증거는 어떻게 찾을 것인가’라는 과제가 남는다. 그 해답은 아이들의 대답에서 찾을 수 있었다. 아이들은 결과만을 평가하지 않았다. 과정을 평가함으로써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긍정적인 요소를 쉽게 찾아낸 것이다.
결정적 증거는 우리가 일상에서 받는 스트레스로부터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유독 결과에 집착하는 우리 사회의 특성 탓에 마음의 시력이 흐릿한 이 시대에 부디 긍정적인 마음으로 잃어버린 시력을 되찾길 바란다. 나아가 코로나19도, 우리의 스트레스도 슬기롭게 극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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