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Vol.536 세상을 지키는 따뜻한 사람들 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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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을 이해하고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는 따뜻한 마음

  권미선(라디오 작가)

서정홍 시인의 ‘선배노릇’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돌담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 이제 / 할머니 혼자 남았는데 // 할아버지 먼저 떠나보낸 / 마을 할머니들이 / 날마다 같이 잠을 자줍니다 // 혼인하고 예순 해 넘도록 / 둘이 자다 혼자 자면 / 빈자리, 얼마나 쓸쓸하겠냐며” 한 사람이 있다 간 빈자리가 얼마나 크고 깊은지, 누군가를 떠나보낸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먼저 그 슬픔을 겪어 본 할머니들은 매일 돌담 할머니를 찾아와 같이 잠을 자 줍니다. 너무 외롭지 말라고, 우리가 곁에 있으니까 힘을 내라고. 혼자 남은 돌담 할머니의 빈자리를 채워 준 것은 마을 할머니들의 따뜻한 마음이었습니다.
독일 중부 지방의 작은 마을에도 비슷한 풍습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마을 사람 중에서 누군가 아내나 남편을 잃으면 홀로 남겨진 배우자는 일주일 동안 부엌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시장을 보러 가서도 안 되고 요리를 해서도 안 됩니다. 그럼 어떻게 식사를 했을까 싶은데, 그 일주일 동안 마을 사람들이 대신 장을 봐 주고 음식을 만들어 주고 잘 먹는지 보살펴 줬다는 겁니다. 부엌 출입 금지령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슬픔을 혼자 감당하지 말라는 배려였던 것이죠. 마을 사람들은 홀로 남겨진 사람 곁에서 때론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어 주는 것으로, 때론 함께 울어 주는 것으로 그 슬픔을 나눴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조용히 울어 주는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리다가 그림 하나가 생각났습니다. 호주의 카툰 작가 마이클 루닉의 그림입니다. 그림 속에는 방 하나 크기의 아주 커다란 유리병이 있습니다. 병 속에는 한 여자가 있고 밖에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남자는 여자를 유리병에서 꺼내 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유리를 깨는 건 위험합니다. 여자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눈물입니다. 남자는 병 입구 쪽 꼭대기에 올라가서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흘리기 시작합니다. 남자가 흘린 눈물은 한 방울 두 방울 병 속으로 떨어져 공간을 채웁니다.
그는 그곳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눈물을 흘린 것일까요? 밑바닥부터 조금씩 차오르던 눈물은 어느새 병의 절반을 채우고, 여자는 수영장 물 같은 그 눈물 위에 둥둥 떠서 점점 위로 올라오고 있습니다. 남자는 앞으로도 한참을 거기 서서 눈물을 흘리고 또 흘릴 겁니다. 자신의 눈물이 유리병을 가득 채울 때까지. 여자가 마침내 입구를 통과해 밖으로 나올 때까지. 남자의 눈물이 후회의 눈물이든 슬픔이나 아픔, 고통의 눈물이든 남자는 여자를 위해 울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위해 마음을 다해 울어 준다는 것, 그렇게 진심이 전해지는 눈물은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채워 주곤 합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눈물로 자란다고 말할 수도 있겠죠. 상대방이 흘린 눈물로 마음이 움직이기도 하고, 삶을 바꾸기도 하고, 나 역시 다른 누군가를 위해 울 수 있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진실 된 눈물만큼이나 빈 마음을 채워 주는 것이 또 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여기, 이런 사랑은 어떤가요? 남자는 피아니스트입니다. 음악을 작곡하고 연주하는 데는 천재적이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아이처럼 서툴기만 합니다. 그런 그를 곁에서 돌보며 엄마처럼, 친구처럼 함께했던 아내는 그의 음악을 정말 사랑했습니다.
상처 많은 세상을 피해 집 안에서 은둔하던 남자가 다시 세상 밖으로 나가 연주를 시작하게 됐을 때, 아내는 매일 그의 연주를 들으러 갔습니다. 쉽게 초조해하고 불안해하는 남자는 사랑이 가득 담긴 아내의 따뜻한 눈빛에 기대어 무사히 연주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어쩌다 아내가 찾아오지 못하는 날이면 남자는 안절부절못하다가 아내에게 전화를 겁니다. 몇 마디 안부를 나눈 후, 남자는 전화를 끊지 않고 아내가 들을 수 있게 전화기를 그냥 놔둔 채로 연주를 시작합니다. 아내가 곁에 함께 있는 것처럼 안심이 되었겠죠.
연주를 다 마치고 나면 남자는 다시 전화기를 들고서 아내를 부릅니다. 그러면 아내는 사랑 가득한 목소리로 속삭여 줍니다. 정말 아름다운 연주였다고. 음악 말고는 아는 게 없었던 남자, 남자의 음악이면 충분했던 여자. 두 사람은 상대방에게 부족한 무언가를 바라는 대신 서로가 갖지 못한 것들을 채워 주며 살았습니다. 사랑은 완벽한 두 사람이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완벽하지 않은 두 사람이 서로의 부족한 조각을 채워 주는 일이니까요.
누군가의 사랑과 진심 어린 마음, 그것은 우리의 삶을 따뜻하게 채워 줍니다.
그런데 그런 채움은 밖에서만 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역시 우리에게 좋은 것들을 채워 줄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건강한 음식,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 일상의 작은 행복을 찾는 일 등등.
이렇게 하나하나 좋은 것들을 채워 가는 삶, 내가 나에게 줄 수 있는 좋은 선물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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