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Vol.536 세상을 지키는 따뜻한 사람들 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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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가득 담긴 손길은 시든 화초에서도 꽃을 피웁니다

  권미선(라디오 작가)
그녀가 사는 집은 작은 정원 같습니다. 안방과 거실, 부엌에서 베란다까지 집 안 구석구석 꽃과 나무가 가득합니다. 거실 창가에는 사람 키만 한 화초도 여럿 있는데 가끔 집에 들르는 딸은 말하곤 합니다. “꼭 열대우림 정글 같다. 올 때마다 한 뼘씩은 자라는 거 같아.” 그녀는 딸에게 새로 핀 꽃들을 자랑하느라 바쁩니다. 화초만 보면 싱글벙글 웃음 가득, 그렇게나 좋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화초를 기르기 시작한 건 의무감 때문이었거든요.
그녀의 남편은 식물 가꾸는 걸 좋아했습니다. 까다롭다는 난도 몇 가지나 길렀고, 꽃 보기가 어렵다는 화초도 남편의 손길 아래서는 아름다운 꽃을 피우곤 했습니다. 행운목이 하얀 꽃을 피웠을 때 그녀를 불러 자랑하던 남편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 남편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에게 남겨진 건 그가 가꾸던 엄청난 수의 화분이었습니다. 사실 그녀는 식물을 기르는 데 영 취미가 없었습니다. 딱히 화초를 좋아하지도 않았죠. 하지만 이제 남편이 하던 모든 일을 그녀가 맡아서 해야만 했습니다. 처음에는 엄두가 나지 않아 사람들에게 나누어 줘 버릴까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남편 생각이 나서 차마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뭐 그렇게 어렵겠어? 물 듬뿍 주고 햇볕 쬐어 주고 그러면 되겠지’ 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화초 기르는 일은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얼마 안 가서 꽃과 나무가 하나둘 시들시들하더니 몇 달이 지났을 때는 절반 이상이 죽어 버렸습니다. 매일 꼬박꼬박 물을 주고 좋다는 영양제까지 챙겨 줬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집에 찾아온 지인들은 이런저런 조언을 해 주었습니다. 물을 너무 자주 주면 안 된다, 종종 창문을 열어서 바람을 쏘여 줘야 한다, 지지대를 잘 세워 줘야 한다, 곰팡이나 벌레가 생기지 않게 살펴야 한다 등등. 그녀는 더 신경을 써서 화초를 돌봤습니다. 화분들의 위치도 바꿔 주고, 흙도 갈아 주고, 물 주는 시간도 바꿔 봤죠. 하지만 별로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알지 못했습니다. 식물을 돌보는 요령은 조금 늘었지만 아직 그녀에겐 빠진 것이 있다는 걸. 그것은 바로 마음이었습니다. 사실 그녀는 자신이 기르는 꽃과 나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의무감 때문에 억지로 기르고 있었습니다. 귀찮다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물 한 번 줄 때도 싫은 숙제 끝내듯이 급하게 해치우고 있었죠. 식물도 살아 있는 생명입니다. 그러니 알지 않을까요? 이 사람이 자신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마음을 다해 자신을 돌보고 있는지 아닌지.
애는 썼지만 1년이 지나자 살아남은 화초가 별로 없었습니다. 이제라도 잘 키워 줄 사람들에게 보내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하니 속이 상했습니다. 남편에게 미안하기도 했죠. 그제야 그녀는 남아 있는 몇 개라도 죽지 않고 살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정성을 쏟기 시작합니다. 아침저녁으로 눈을 마주치고 이야기도 해 주었습니다. “물 많이 먹고 쑥쑥 자라렴. 내년엔 예쁜 꽃도 피워 주렴.” 시들시들하던 화초가 조금씩 기운을 차렸을 땐 진심으로 기뻐했습니다. 기특하다고 칭찬도 해 주었죠. 그렇게 매일 조금씩 그녀는 식물들과 가까워졌고 조금씩 식물을 돌보는 일이 좋아졌습니다. 남편이 그랬듯 그녀 역시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화초의 안부를 살피는 일이 되었습니다. 잎을 어루만져 주고 말을 걸어 주고 웃어 주었습니다. 그러자 언제부터인가 식물들은 더는 시들지 않고 점점 더 오래 살아남았습니다. 기르던 꽃나무에서 처음으로 꽃이 피었을 때는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 듯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그녀가 마음을 주자 꽃과 나무는 그녀에게 행복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그녀의 정성스러운 손길 아래에서 잘 자란 화초들은 그녀에게 위로의 손길을 건네주었습니다. 그녀를 따뜻하게 안아 주고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남편이 떠난 지 5년, 이제 그녀의 집은 남편이 있을 때만큼이나 아름다운 정원이 되었습니다.

식물을 특별히 잘 키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린 핑거스(green fingers)라고 불리는 이 사람들은 꼭 식물의 요정 같습니다. 손이 닿기만 하면 시들어 가던 식물도 생기를 되찾고, 꽃도 활짝 피어납니다. 물론 그들은 식물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키워야 튼튼하게 자라고 예쁜 꽃을 피울 수 있는지.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마음을 다해 화초를 돌보는 것입니다. 작은 싹이 자라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때까지, 따뜻한 햇볕과 바람, 적당한 물만큼이나 필요한 것은 관심과 사랑과 정성입니다. 어디 식물뿐일까요? 세상 많은 것이 우리가 손길을 주는 만큼 자랍니다. 일도 사랑도 사람도. 이 봄, 어떤 것들이 우리의 손길 아래에서 푸른 싹을 틔우고, 아름다운 꽃을 활짝 피우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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