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에 찾아온 픽사의 힐링 애니메이션
<소울>이 전하는 영롱한 감동에 대하여.
글 민용준(영화 저널리스트&대중문화 칼럼니스트) / 사진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다. 지난 1월 20일에 개봉한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23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소울>은 지난 2월 26일 기준으로 18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근래 보기 드물게 화제가 된 극장 개봉작이 됐다. 심지어 코로나19 3차 유행으로 실시한 사회적 거리 두기 강화 조치로 오후 9시 이후 극장 운영이 불가하고, 상영관 내 좌석을 한 칸씩 띄어 앉아야 하는 상황임을 감안하면 <소울>이 거둔 성적은 그 자체로 기적이나 다름없다.
그러니까 <소울>은 좋은 작품의 저력을 보여 주는 최선의 사례다. 그리고 매년 한두 편의 장편 애니메이션을 발표하는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공력을 증명하는 최신의 절정이다. 픽사는 1995년에 개봉한 <토이 스토리>로 영화 역사상 최초의 3D 장편 애니메이션을 발표했다. 이후 <몬스터 주식회사> <니모를 찾아서> <인크레더블> <라따뚜이> <월-E> <업> <인사이드 아웃> <코코> 등을 통해 기술과 예술이 맞물려 이루는 감동의 경지를 거듭 넓혀 왔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
<소울> 이전에 픽사의 15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의 감독이었던 피트 닥터에게 2015년은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인사이드 아웃>은 그해 8억 6750만 달러의 수익을 거둬들이며 전 세계적인 흥행을 기록했고, 이듬해엔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 부문을 수상했다. 일찍이 <몬스터 주식회사>와 <업>을 연출한 픽사의 최고 브레인 피트 닥터는 또 한 번 픽사의 빛나는 역사를 넓힌 장본인이 됐다. 하지만 피트 닥터의 머릿속에 이상한 생각이 끼어들기 시작했다.
‘이만한 경험도 없을 텐데 왜 아직도 내 인생이 완전히 채워졌다고 느끼지 못하는 걸까? 해결하지 못한 게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더 해야 할 일이 있는 걸까?’ 픽사의 23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소울>은 바로 그 물음표를 구체화한 작품이다. 명랑한 성격의 열한 살짜리 딸이 갑자기 말수가 줄어든 것을 본 피트 닥터의 고민에 착안한 작품이 <인사이드 아웃>이다. <소울> 역시 자신의 삶에서 발견한 물음표를 심어 키워 낸 결실이다. 가장 개인적인 삶에서 발전시킨 가장 창의적인 이야기인 셈이다.
재즈의 선율과 영혼의 울림
<소울>의 주인공 ‘조 가드너’는 뉴욕의 재즈 피아니스트로 살아가길 꿈꾸지만 현실은 중학교 파트타임 음악 교사다. 그나마 정규 교사로 채용되어 건강보험과 연금 혜택을 받을 자격을 얻은 덕분에 아들이 음악을 한다는 사실이 늘 못마땅했던 어머니의 환대를 받지만 당사자 마음은 심란하다. 그런데 그 심란한 마음을 들뜨게 만들 전화가 걸려 온다. 유명한 색소폰 연주자 도로테아 윌리엄스의 재즈 클럽 공연에서 피아노 세션을 맡을 수 있는 기회가 왔기 때문이다.
‘소울’이라는 제목은 중의적이다. 작품의 주요 배경인 사후 세계의 영혼을 직시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재즈 음악에서 일컫는 소울을 뜻하기도 한다. 동시에 죽은 자로부터 분리된 영혼의 존재를 소재로 하는 영화를 보는 재미만큼이나 영혼을 담은 육체로 맞이하는 매일의 감각을 깨우고 보다 생생하게 체감하는 울림이 상당한 영화다. 그런 의미에서 <소울>이 말하는 ‘소울’, 즉 영혼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지금 존재하는 나의 내면, 진정한 자아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소울>에서 음악은 영화적인 요소를 넘어 주요한 캐릭터나 다름없다. 나인 인치 네일스의 트렌트 레즈너와 아티커스 로스 듀오가 만들어 낸 스코어는 사후 세계의 신비감을 고양시키면서도 극 전반에 따듯한 온기를 실어 나르는 파이프라인과도 같다. 트렌트 레즈너는 ‘지구의 것이 아닌 듯한’ 사운드를 만들어 영롱하게 반짝이듯 은은하게 퍼지거나 리드미컬한 울림을 잔잔하게 쌓아 가는 음악으로 공감각적인 묘미를 선사한다.
픽사의 처음이자 현재진행형의 성취
본래 조 가드너로 정착하기 전까지 그 자리를 차지한 캐릭터는 주인공으로 고려되는 대상이 아니었다. 원래는 영혼 ‘22’의 길잡이 정도의 캐릭터였고, 흑인이 아닌 백인이었으며 재즈 피아니스트가 아닌 배우나 과학자로 구상했다. 하지만 관객의 마음을 더 강하게 당길 만한 직업군을 고려하며 재즈 뮤지션이 됐고, 그에 걸맞은 흑인 캐릭터로 변경됐다. 그 과정에서 파트타임 작가로 고용했던 흑인 감독 캠프 파워스에게 공동 감독의 지위를 부여했다. 덕분에 조 가드너와 캠프 파워스는 각각 픽사 최초의 흑인 주인공과 픽사 크레디트에 처음 이름을 올린 흑인 감독이 됐다.
피트 닥터는 지금껏 수많은 애니메이션이 해 왔던 실수를 <소울>에서만큼은 범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유색인종 캐릭터를 동물로 변화시키거나 그들의 특성을 반영해 의인화한 동물 캐릭터를 그리는 데 거리낌이 없던 이전까지의 관습을 철저히 밀어내고자 했다. <소울>의 유 세미나에 머무는 영혼들이 어떠한 인격도 갖추지 않은 무의 성질로 그려지는 것도 그런 성찰의 결과다. 그러니까 매너가 남자를 만들고, 영화도 만든다.
참고로 <소울>은 피트 닥터가 픽사의 창작 부문 최고책임자로 부임한 이후에 만든 첫 작품이기도 하다. <소울>은 성추행 문제로 픽사에서 퇴출된 전임 창작 부문 최고책임자 존 래시터의 그림자를 완전히 잊게 만든 작품이란 점에서 더욱 고무적이다. 그리고 <소울>은 <토이 스토리>로 시작한 픽사의 모험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며 거듭 전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픽사의 새로운 영토다. “무한한 공간, 저 너머로!”라는 <토이 스토리>의 도전적인 대사는 오늘날 “매 순간을 살아가자”는 낭만적인 울림으로 진화했다.
누군가는 꿈을 먹고 산다고 하지만 가끔 어떤 꿈은 삶을 잡아먹는다. 많은 사람이 위대한 꿈을 이루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 믿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평범한 인생을 살고 그런 이들의 일상이 모여 세계의 하루가 흘러간다. 즉 위대한 악보를 완성하는 삶이 있다면 음표를 따라가는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 삶도 있다.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소울>은 바로 그런 순간의 감각을 일깨우는 영화다. 자신을 위해 매 순간을 살아가는 것, 그것만으로도 삶은 성공적일 수 있음을 깨닫게 만든다. 그렇게 영혼을 맑게 울린다. 정말 좋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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